1999년 1월, 이런 편지를 받았다.

색스 박사님,

제가 겪는 (아주 특이한) 문제를 한 문장으로, 비의학적 용어로 말씀드리자면 읽지를 못합니다. 음악이든, 뭐가 됐든 읽지 못해요. 안과에서는 시력검사판의 맨 아랫줄까지 한 글자씩 전부 읽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낱말은 읽지못하고, 음악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로 몇 년을 시달리면서 최고의 의사들을 만났지만 아무도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박사님께서 시간을 내어 저를 봐주신다면 정말로 기쁘겠습니다.

진심을 다하여,
릴리언 칼리르 드림 - P15

후방피질위축증PCA 을 처음 공식적으로 기술한 것은 1988년 프랭후 벤슨의 연구진이었지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벤슨 연구진의 논문이 돌풍을 일으켰고, 현재까지 10여 건의 사례가 기술되었다.
후방피질위축증을 앓는 사람들은 시력과 움직임이나 색깔을 인지하는 능력 같은 시지각의 기본 요소는 잃지 않는다. 하지만 글 읽기나 사람 얼굴, 물건을 인지하는 데 곤란을 겪으며 이따금 환각이 나타나는 등 복합적인 시지각 장애의 경향을 띤다. 또한 시지각적 공간지각 결함이 심해질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사는 동네나 심지어는 집에서도 길을 잃는다. 벤슨은 이를 ‘환경 실인증‘이라고 불렀다. 그밖에 좌우 혼동, 쓰기와 계산 장애, 심지어 자신의 손가락을 인지하지 못하는 실인증의 네 가지 주요 증상을 보이는 게스트만증후군도 많이 나타난다. 일부 환자는 색을 구분하고 분류할 수는 있지만 색의 이름은 말하지 못하는 이른바 색깔실어증을 보일 수 있다. 이보다 희귀한 경우지만, 시각적 조준과 움직임 추적에 장애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장애와는 대조적으로 기억력, 지능, 통찰력, 개성은 이 병의 말기까지 보존되는 경향을 보인다. 벤슨이 기술한 모든 환자가 "자신의 과거를 말할 수 있고, 최근 일어난 일도 인지하며, 자신이 처한 곤경에 대해놀라운 통찰을 보여주었다".
후방피질위축증은 분명히 퇴행성 뇌질환이지만, 더욱 흔한 알츠하이머병과는 상이한 특징을 보이는 듯하다. 알츠하이머의 경우에는 기억력과 사고력, 언어의 이해와 사용, 행동과 성격까지 총체적 변화가 나타나며, 일반적으로는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한 통찰력을 초기에 상실한다. - P28

릴리언이 내 사무실이나 골목길 일대의 많은 상점에 있는 물건들을 잘분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익숙한 것, 암기한 것에 얼마나 의존해서 생활하는지, 어째서 자신의 아파트와 동네에서 벗어나지 않는지 명확해졌다. 어떤 장소를 자주 찾다보면 점차 그곳에 익숙해지긴 하겠으나 엄청난 인내심과 비상한 수완, 전적으로 새로운 분류 및 기억 체계가 필요한, 너무나 복잡한 일이 될 것이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앞으로는 내가 릴리언의 아파트로 찾아가는 왕진 방식을 고수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는데, 릴리언이 스스로 정돈되었다고 느끼고 주인으로서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외출은 그녀에게 갈수록 초현실적인 시각적 모험이 되었다. 환상이 넘치지만 때로는 무시무시한 착각이 기다리는 - P36

릴리언은 발병한 후로 11~12년까지 창의적이었고 원기 왕성했다. 시각이면 시각, 음악이면 음악, 감정이면 감정, 지능이면 지능 등,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자원을 끌어내 자신을 지탱해왔다. 가족과 친구들, 특히 남편과 딸이 큰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 동료들 그리고 슈퍼마켓이나 거리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 모든 사람이 그녀의 도전을 도와주었다. 그녀가 실인증에 대해 보여준 적응력은 실로 대단했다. 이는 끊임없이 진행되는 영구적 인지 장애에 맞서 자신을 단단히 세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소중한 수업이었다. 그러나 릴리언이 병에 대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초월하게 해준 것은 기술, 즉 음악이었다. 이점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은 릴리언이 피아노를 칠 때였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감각과 근육, 육체와 정신, 기억과 환상, 지성과 감성, 자신의 총체, 살아 있음이 총체적으로 융합된, 일종의 초융합적 상태를 필요로 하는 활동이었다. 그녀의 음악적 능력은 천만다행하게도 병에 영향받지 않고 온전히 유지되었다.
릴리언의 연주는 내가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 난해해지는 듯했는데, 그녀에게 예술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이는 어떤 문제들이 닥치더라도 그녀가 여전히 기쁨을 누리고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 P41

그런데 내가 그녀가 전에 들려주었던 하이든 4중주곡을 언급하자 릴리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가 정말로 홀딱 빠졌던 곡이에요.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연주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거든요." 릴리언은 그 음악이 얼마나 뇌리를 떠나지 않았는지, 어떻게 머릿속으로 하룻밤 사이에 피아노곡으로 편곡했는지, 그때 일을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내가 다시 연주를 청했다. 릴리언은 못한다고 했지만 다시금 조르자 피아노 쪽으로 몸을 옮겼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클로드가 살며시 바로잡아주었다. 피아노에 앉은 릴리언은 첫 음을 잘못 쳤는데,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내가 어딜 친 거죠?" 릴리언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가슴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내 제자리를 찾아 아름다운 연주를 시작했다. 높이 울려 퍼지다가 서서히 녹아들어 안으로 휘감기는 소리였다. 클로드는 놀라고 감동받았다. "2~3주간 전혀 연주하지 않았거든요." 클로드가 내게 속삭였다. 릴리언은 연주하면서 허공을응시했고 입으로는 선율을 흥얼거렸다. 릴리언이 전에 보여주었던 힘과 감정이 온전히 실린 절정의 예술적 연주 속에서 하이든의 음악은 격랑, 음악적 격론에 휘말려 들어갔다. 연주가 피날레를 향하고 마무리 화음이울리면서 릴리언이 말했다. 간결하게 "다 용서했어."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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