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번화가에서 양구이로 점심을 먹고 나서 안중근이 말했다.
-옷을 사러 가자.
-옷이라니?
-지금 입은 옷은 추레하다.
-돈이 모자랄 텐데.
-넌 돈 걱정을 하지 마라.
-왜 갑자기 옷이냐?
-쏘러 갈 때 입자.
우덕순이 웃었다. 우덕순의 웃음을 보면서 안중근이 웃었다.
안중근은 겉옷 한 벌과 셔츠를 샀다. 겉옷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더블 버튼의 반코트였고 셔츠는 흰색이었다. 갖추어 입으면 목둘레로 셔츠의 깃이 드러났다. 우덕순은 무릎까지 내려오는긴 옷이었다. 안중근은 옷가게 거울 앞에서 새로 산 옷을 입어보면서 우덕순의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옷값은 이십 루블이었다. 우덕순은 돈을 내는 안중근을 심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새로 산 옷을 싸 들고, 안중근은 우덕순을 이발소로 데려갔다.
-머리를 깎자. 잡힐 때 깔끔한 게 좋겠다. 새 옷도 입고.
-그렇겠구나. - P1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사회적 고통을 치유하는 일은 사람을 치유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하다. 그 해결을 위한 시작은 각자가 타인에 의해 이끌리지 않는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깨닫는 것이다." - P10

 몸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와 내 주변 세계를 연결한다. 먼저 몸은 주변 세계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통로‘로서 그 역할을 한다. 사람은 눈과 코, 입과 귀, 그리고 손과 피부를 통해 주변 세계를 감지하고 인식한다. 비가 오는지, 날씨가맑은지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아는 사람인지 처음 본 사람인지, 지금 먹는 음식이 무슨 재료로 만든 것인지, 각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인지한다. 우리는 몸을 매개하지 않고 결코 바깥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반대로, 몸은 우리가 세계를 향해 반응할 수 있게 만드는 ‘수단‘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반짝거리는 눈빛이라든지,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입꼬리가 빙긋이 올라가는 것은 세상이 내게 던져준 자극에 대한 몸의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만일 입이 없다면 내 생각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것인가? 타인에게 반가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는 행위도 몸을 통해서 가능하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거나 동작을 행하는 일 역시 몸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는 주변 세계에 반응한다. - P20

 근대성의 대표적 특징으로는 종교적 영향력의 쇠퇴와 전문가들이 시민들의 몸에 행사하는통제력이 증가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중세 시대에만 해도인간의 몸은 물론이거니와 삶 전반을 신의 의지를 대변하는 성직자의 가르침에 따라서 진행하면 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한 종교적 공동체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확인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의 몰락과 함께 기존의 종교 공동체가 가진힘이 쇠퇴하면서 시민들의 몸과 정신은 이제 각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각종 상품이 즐비한 소비문화의 성장이 나타났고, 다른 한편으로 다양한 의료·심리·교육 전문가들이 등장하였다. 몸에 관한 관심이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확대되면서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고 오래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몸을 만들 것인가‘ 등이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후기 근대성은 이와 같은 근대성의 경향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급진화되는 것을 일컫는다. 후기 근대성을 명명하는 방식은 학자에 따라 다른데, ‘위험사회‘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독일의 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이를 ‘제2근대성‘이라고 하고, 사회구조화 이론을 구축한 영국의 학자앤서니 기든스 Anthony Giddens는 이를 ‘고도 근대성‘이라고 일컫는다. 또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으로 현대 서구 사회의 불안정한 삶을 설명한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은 이를 ‘액체 근대‘라고 명명한다. 어떻게명명하든지 간에, 20세기 후반이 되면서 시민들은 근대성이 지니는 긍정적 측면뿐 아니라 부정적 측면을 인식하게되었다. 또한 점점 의지할 대상이 없고 혼란스러운 자아를 평온하고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신과 몸에 관한 질문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 P27

후기 근대에는 몸에 대한 태도도 급진화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건강하고 오래 생존하며, 노동시장에서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몸을 만드는 데 관심사가 있었다.
반면 이제는 플라스틱처럼 각자의 욕망에 따라 몸의 변화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환상과 가능성의 영역에서 몸이 언급되고 있다. 생물학적 복제, 유전공학, 성형수술 등과 같이 더 이상 몸은 신이 부여해준 고정불변의 형체가 아니며, 개인이 개조하거나 얼마든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러한 선택을 내리는것은 아니다. 백만장자와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이 자신의몸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과 자본은 같을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오늘날 한 개인이 몸의 한계를 통제하고 변화시킬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상황 속에서 이른바 ‘몸 프로젝트‘가 범람하고 있다.
이제 몸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자 자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재료로서, 어떻게 몸을 가꾸고 관리하느냐가그 사람의 가치와 지위, 성향 등을 표현해주는 상징이 되고있다. 이제 건강의 문제는 질병이 닥쳤을 때 다루어야 할것이 아니다. 젊었을 때부터 노화의 속도를 조정하기 위해성인병을 사전에 관리하고, 몸매를 가꾸고, 노후 건강을 위한 영양식품 섭취 등이 삶의 주된 관심사이자 자아를 드러내는 지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 P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중국 도시 우한이 그 대표적인 예다. 2000년에서 2018년 사이에우한과 중국을 세계 다른 지역과 연결하는 새로운 철도와 항공교통이 생기면서 우한의 인구는 세 배로 증가했다. 이탈리아 북부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장 먼저 창궐하여 최악의 피해를 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십억 달러 규모의 무역 및 투자 프로그램으로 두 나라 간의 교류가 배가되었다. 하루 여섯 편의 저가 항공편으로 밀라노와 중국을 오가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중국 기업이 대거 인수한 롬바르디아Lombardia 주의 섬유 산업체에서 일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또한 산업 중심지인 밀라노는 세계에서 스모그가 가장 심한 도시 중 하나이며, 이곳 사람들은 특히 폐 질환에 취약하다. 또한 롬바르디아는 인구 밀도가 높고 많은 개인 병원이 효율성 위주로돌아가기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초기 단계에서 제지 없이 퍼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코로나 팬데믹이 자연재해처럼 갑자기 우리를 찾아왔다는 것은 많은 정치인이 퍼뜨린 두 번째 거짓말이다.  - P508

이 마시멜로실험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되고 기록되었다. 그런데 또 다른 학자들은 결과가 조금은 잘못 해석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실험에서 측정된 의지력은 학업 성취도와 연관되었기 때문에 의지력이 많을수록 더 좋은 성적으로 이어진다는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족의 소득 상황은 고려되지 않았다. 이 요인 또한 중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험에서 빈곤가정의 아이들은 일찍부터 불안정감과 불확실함을 경험했기 때문에 즉각적인 보상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은 자신이 당장 얻을 수 있는 것을 취한다. 반면더 안정되고 확실할수록 더 쉽게, 더 잘 배울 수 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무조건적 기본소득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이 논제를 확인시켜준다. 자기 서사에서 재정적 불확실함을 배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전기적 모험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한 여유를 더 많이 갖고 있다. - P511

우리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 가지 조언을 한다면 그것은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안보 훈련에서 가장 자주 듣는 조언일 것이다.
위험이 임박했을 때 위험해지기 전에 행동하는 것이 현명하다. 말하자면 주인공이 되지 말고 이야기하는 원숭이로 남아 있는 것이 좋다.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라. 그리고 이야기를 확실한 해피엔딩으로 시작해보라. 여러분이 어느 지점에서 주인공이고 어느 지점에서 적대자인지 솔직하게 자문해보라. 유토피아를 만들고 낙원 상태를 상상해보라. 그리고 용기를 가져라. 지금까지 감히 꿈만 꾸었던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행동하기 전에 방아쇠를 기다리지않는 것이다. 여러분의 여정을 오늘 바로 시작하길 바란다. - P5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지체높은 사대부들이 비통한 글을 남기고 잇달아 자결했다. 그들은 독약을마셨고 물에 뛰어들었다. 조선 황제는 자살한 신하들에게 표창을 내려서 충절을 기렸다. 오백 년을 지탱해온 나라의 관리와 식자 몇 명이 치욕을 못 견디어 자결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토는 이 죽음에 따른 민심의 동태를 주시하면서도 못 본체했다. 이 동시다발적 죽음들은 무력하기는 했으나 의 반열에 올랐다.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이미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은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서울의 통감부 집무실에서 이토는 날마다 주둔군 사령부에서 보내오는 폭민 대처 상황 보고서를 읽었다. 정보참모는 여러지역의 소요사태를 열거하고 문서의 말미에 상황개요라는 항목으로

일파가 흔들리니 만파가 일어선다
산촌에서 고함치면 어촌에서 화답한다

라고 써놓았다.
••••• 참으로 한가한 녀석이구나.
이토는 주둔군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서
-귀 사령부의 정보참모는 문장력이 좋더구나. 풍류남아냐?
라고 말했다. 그뒤로 정보참모는 보고서에 상황개요를 쓰지 않았다. - P18

수백 년 동안의 수탈과 억압으로 검불처럼 무기력해 보이던조선 백성들이 무너진 왕조의 부흥을 외치며 그토록 가열하게봉기하는 사태가 이토는 두려웠다. 농장기를 들고, 꽹과리를 치고. 과거 보러 가는 유생들처럼 갓을 쓰고 도포를 펄럭였지만 조선의 폭민들은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면서 일어섰고 한 고을이 무너지면 이웃 마을이 또 일어섰다. 기생과 거지까지 대열에 합세했다. 무력집단이라기보다는 시위군중에 가까웠지만, 영명한 장한壯漢들이 지휘하는 부대는 무장과 대오를 갖추고 주둔군을 위협했다. 허튼 풍류기가 추접하기는 했지만, 주둔군 정보참모의 상황개요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국인 배설이 경영하는신문 대한매일신보가 이 폭민들을 의병이라고 일컫고 기세를 부추겼다. 통감부가 신문사를 겁박했으나 배설은 굽히지 않았다.
조선이 문명개화되면 이 거친 백성들의 들뜸은 스스로 잦아들어 제국에 동화될 테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소요가 풍토병으로 눌어붙으면 조선 병합 정책은 순조롭지 못할 것이었다. 무리가 되더라도 빨리 정리해야 할 것이라고 이토는 판단했다. 그의 결정은 단호했고 돌이킬 수 없었다. - P19

큰 구도가 필요하다. 폐허를 크게, 조선 황제를 작게 나타내라고 이토는 만월대 돌계단 앞에서 일본인 사진사에게 명령했다. 이토는 손짓으로 송악산 능선과 계단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무너진 돌계단과 그 너머의 송악산 능선을 구도의 횡축에 들어앉히고 조선 황제의 대열이 그 폐허에 종축으로 길게 늘어선 사진을 이토는 요구했다. 미리 현장을 답사한 사진사는 이토의 요구를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사진사는 멀리 떨어져서 카메라를 설치했다. 시야의 범위를넓게 잡고, 렌즈의 각도를 위쪽으로 오 도쯤 올려 잡았다. 뷰파인더 안에서 돌계단의 폐허가 화면 중앙에 가득차고 그 너머로송악산 능선이 구름처럼 떠 보였다. 조선 황제의 얼굴이 또렷이보이지는 않았지만 일산이 받쳐져 있어서 거기가 황제의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이토는 그 옆에 희미하게 보였고 군도를 찬 일본군 장교가 그 앞에서 대열을 인도하고 있었다. 돌계단을 내려오느라고 황제의 대열은 흐트러졌다. 대열이 폐허를 배경으로 종축을 이루었을 때 사진사는 셔터를 눌렀다. - P51

안태건이 소주 한 잔을 단숨에 마신 뒤 카, 소리를 뱉었다.
-이번에 큰 놈을 잡았구나. 살이 실하다.
-큰삼촌댁에 뒷다리 한 짝을 보냈습니다.
-몇 발로 잡았느냐?
- 한 발 쐈습니다.
안태건이 안중근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잔을 채웠다.
-아름다운 솜씨다. 짐승을 쏘기에는 아깝구나.
안태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술자리에 모인 사내들에게그 말은 이 세상을 향해서 하는 말처럼 들렸다. 사내들은 한동안 침묵했고,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모르게 시국의 위태로움을 말했다. 안씨 가문의 사내들은 마을의 우물을 청소하는 일이나 홍수에 터진 개울 둑방을 다시 쌓는 일을 논의하는 것처럼 시국의 일을 말했다. 일본이 청을 무찌르고 러시아를 무찔러서 조선의 독립은 탄탄해졌다고 한다하는 식자들이 신문과 강연으로필설을 펼쳤다. 말은 자욱했는데, 아무도 말을 믿지 않았다.
가끔씩 서울이나 평양에 다녀온 사람들이 날짜 지난 대한매일신보를 가져왔다. 대한매일신보는 조선 전역의 소요사태를 상세히 보도했다. 신문은 소요군중을 ‘의병‘이라는 두 글자로 일컬었는데, 글자 두 개가 더 큰 무리를 불러모았다. 신문의 문장은 곧고 단단해서 읽는 사람을 찌르고 들어왔다. 이 신문의 영문판에 ‘지난 목요일 경기도 양주와 포천 접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 열두 명이 반란군insurgents에 의해 살해되었고, 죽은 자들의 시신은 서울로 운구되었다고 보고되었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청계동 사내들은 신문을 돌려 보며 영문을 아는 사람의 설명을 들었다. ‘반란군‘이라는 말의 뜻을 놓고 사내들은 여러 말을뒤섞었다. - P54

- 내일 아침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원산으로•••••
안정근은 형이 가려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날 서울 도심에서 눈으로 본 일들이 형이 가려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안정근은 형이 여기에 남아서 함께 견디면서 함께 살기를 바랐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야 하기는 마찬가지일듯싶었다. 안정근이 말했다.
-형님은 장자 아니오.
장자라는 말이 안중근의 가슴을 때렸다.
-대륙으로 건너가도 나는 여전히 장자다.
-어머니는 내가 모실 테지만 형수님과 아이들은 어찌하시려오.
-어쩔 수 없는 일을 자꾸 얘기하지 마라. 내가 자리잡히면 데려가겠다.
-형님, 가지 마시오. 여기서 삽시다.
-여기는 이미 이토의 땅이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살길을찾아가겠다. 이것은 벌레나 짐승이나 사람이 다 마찬가지다. 이것이 장자의 길이다.
안정근은 형이 의논하러 온 것이 아니고 통고하러 온 것임을 알았다. 안정근은 길게 말하지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럼, 먼 길에 조심하시오. 어머님께 형님이 우라지로 가셨다고 전하리다.
안정근은 돌아갔다. 안중근은 어둠 속에서 누웠다. 총소리와 호각소리, 고함소리, 빠르게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 P74

-우리는 강토를 모두 잃고 어디로 가려는가. 이번에 한 번싸워서는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승패와 유불리를 돌아보지 말고 싸워야 한다.
승산이 없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승산을 헤아리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을 대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안중근의 부대는 일본군 부대를 상대로 기획된 작전을 펼치지 못했다. 산속을 이동하다 마주친 일본군 분견대와 그들의 척후병 두어 명을 상대로 작은 전투를 벌였다. 쌍방에서 서너 명씩 죽고 다쳤다. 죽은 자들은 피아의 구별이 없이 쓰러져 있었다. 의병들은 죽은 일본군의 신발을 벗겨서 신고 군복을 벗겨서 입었다. - P91

안중근은 말했다.
- 너희들은 돌아가라. 돌아가서 포로가 되었던 일을 입 밖에내지 마라.
포로들 중 선임병이 말했다.
-총기 없이 돌아가면 군법으로 처형됩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안중근은 포로들의 소총을 돌려주었다.
-가져가라. 가서, 발설하지 마라.
포로들은 돌아갔다.
장교들이 안중근에게 항의했다. 장교들은 일본군이 생포한 의병들을 학살한 사례를 들며 분노했다.
-우리는 적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 아니오!
-포로를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너희들은 여러 말을 하지마라.
장교 한 명은 추종자들을 데리고 부대를 떠났다.
석방된 일본군 포로는 부대로 돌아가서 안중근 부대의 위치와병력 규모를 보고했다. 일본군 부대는 즉각 출동했다. 석방된 자들이 선두에서 길을 인도했다. 회령에서 일본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조여들어왔다. 안중근 부대는 대항하지 못했다. 장교들은 포로를 풀어주어서 부대의 위치가 노출된 것이라고 안중근에게 들이댔다. 안중근 부대는 지휘 통제가 허물어져서 예닐곱 명씩무리를 지어서 흩어졌다. 산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두어 명씩 만났고 또 헤어졌다. 투항해서 포로가 되자는 대원과 집단자살하자는 대원이 싸웠다. 장맛비가 며칠째 쏟아졌고 안개가 끼어서 봉우리도 골짜기도 보이지 않았다. 풀뿌리를 캐 먹고 열매를 따먹었다. 옷을 찢어서 다친 발을 싸매고 걸었다. 닭 소리나 개소리가 들리면 민가로 내려가 밥을 얻어먹었다. - P92

연추에서 안중근은 한인들의 집에 기식하거나 여관에 묵었다. 안중근이 물색없이 포로를 살려주어서 기습 공격을 자초하게 된것이라고 연추로 돌아온 대원들이 말을 퍼뜨렸다. 연추에서 안중근은 운신할 수 없었다. 사람들과 더불어 세력을 일으키기는 점점 어려웠고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연추에서 안중근은 늘 엎드려 있었고, 가끔씩 마을에 나가서 멀리서 온 소식들을 귀동냥했다. 소식들은 엇갈렸고 출처가 없는 소문은 더빨리 퍼졌다. 그해 겨울은 뒤숭숭했다. - P94

안중근이 하숙방으로 찾아와서 술을 사주면서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말을 했을 때 우덕순은 안중근이 왜 왔는지를 대번에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에게 동행할 것인지를 대놓고 물어보지않았고, 우덕순도 같이 가자고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안중근이이토의 만주 방문을 알리는 신문을 보여주었을 때, 우덕순은 안중근과 함께 가기로 되어 있는 운명을 느꼈다. 자신의 생애는 이불가해한 운명의 예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우덕순은 생각했다. 그 예감은 이토를 쏘아야 한다는 뚜렷하고 밝은 목표로 귀결되고 있었다. 이토를 쏘면 이토는 그 사격의 결과로 죽게 될것이었고, 총알이 급소를 치지 못해서 이토가 죽지는 않더라도 총을 쏜 이유를 말할 자리는 마련될 것이었는데, 우덕순은 총알이 급소에 정확히 박히기를 원했다.
그날, 우덕순과 술집에서 마주앉았을 때 안중근은 우덕순을찾아온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음을 저절로 알았다. - P1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1

1908년 1월 7일, 일본 제국 천황 메이지明治는 도쿄의 황궁에서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李垠을 접견했다. 이은은 열두 살이었다.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 황태자의 보육을 책임지는 태자태사太子太篩의 자격으로 작년 말 이은을 서울에서 도쿄로 데려왔고 이날 메이지의 어전으로 인도했다.
메이지는 일본 제국 대원수의 군복에 군도를 차고 있었고, 이은은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이토는 신년 하례용 연미복 차림이었다. - P7

이토는 한국 통감으로 부임한 후 서울의 여러 공공건물에 시계를 설치했다. 건물 정면에 대형 시계를 붙였고, 집무실과 회의실마다 벽시계를 걸었다. 통감부에 모이는 조선의 대신들은 벽시계 아래서 통감의 시정연설을 들었다. 이토는 시간이 제국의공적 재산이라는 인식을 조선 사대부들에게 심어 넣으려 했으나, 시간의 공공성을 이해시킬 길이 없었다. 이토 자신이 설명의언어를 갖추지 못하기도 했지만 시간을 계량하고 시간을 사적내밀성의 영역에서 끌어내 공적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이문명개화의 입구라고 설명을 해도 고루한 조선의 고관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이었다. - P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