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사기꾼. 게으름뱅이 무임승차자에게서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려는 강력한 소망을 가진바, 이를 더 유심히 살펴 공평성 기반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사기꾼·게으름뱅이 · 무임승차자 들이 어떤 제재도 받지 않고 계속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까지 협동을 멈추고, 그러면 사회구조 자체가 흐트러지고 만다. 공평성 기반은 우리가 누구에게서 직접 사기를 당했을 때 의분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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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공평성 기반은 이보다 더 넓은 차원의 관심사에도 적용된다. 즉, 공평성 기반이 있기에 우리는 사기꾼이나 파렴치한 등 집단을 위해 물을 모아두기보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물을 ‘마셔버린‘ 사람은 누구든 경계하게 되는 것이다.
공평성 기반을 자극하는 통용적 동인은 집단의 크기와 숱한 역사적·경제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중에서도 사회적 안전망을 갖춘 대규모 산업사회의 경우에는, 생존에 필요한 응급처치 이상으로 이 안전망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통용적 동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 안전망의 남용 여부를 사람들은 중요하게여긴다. 이 사실을 알면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안 하면서 사회 기금을 챙기는 미혼모 같은 사람들 말이오. 이들이 낳은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민주당원이 되지"라고 말한 남성처럼, 왜 경제적 보수주의자들이 화가 나서 내게 이메일을 보냈는지 설명된다. 한 보수주의자가 사람들이 민주당에 표를 던지는 이유를 "게으르기" 때문이라거나, "열심히 일해 돈을 버는 사람,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정부의 도움에 기대지 않는 사람들이 싫어서"라고 꼽은 이유도 이해할 수 있고 말이다.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허위로 서류를 꾸며 대규모 대출을 받아 주택을 산 이들을 왜 국민들이긴급 구제해주어야 하느냐고 산텔리가 분통을 터뜨린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 P330

 즉, 진보주의자들은 세 가지 기반의 도덕성을 가진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여섯 가지 기반 모두를 활용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말이다. 진보의 도덕 매트릭스는 배려/피해, 자유/압제, 공평성/부정 기반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단 진보주의자들은 공평성 (비례의 원칙)이 동정심이나 압제에 대한 저항과 상충할 때에는 공평성은 버리고 그 대신 이 둘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보수주의자의 도덕성은 여섯 가지 기반 모두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에 비해서 배려기반을 희생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다른 도덕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그 과정에서 해를 입는 사람이 생겨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 P335

• 도덕성 기반에 우리는 자유/압제 기반을 추가했다. 이 기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배의 표시가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그것을알아차리고 의분을 느낀다. 불한당과 독재자에게 저항하거나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 같이 뭉쳐야 한다는 욕구도 여기에서부터 생겨난다. 이 기반을 잘 알면 자유주의자와 일부 보수주의자가 왜 "나를 짓밟지 마라" 식의 반정부 감정을 가지는지는 물론,
좌파의 평등주의와 반권위주의도 이해할 수 있다.
• 우리는 공평성 기반에 수정을 가해 그것이 비례의 원칙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했다. 공평성 기반이 호혜적 이타주의 심리에서 출발하는 것은 맞지만, 인간이 험담과 징계가 가능한 도덕공동체를 만들어내고부터는 공평성 기반이 짊어진 의무가 훨씬 많아졌다. 사람들 대부분은 심층적인 직관 차원에서 인과법칙을 중시한다. 사기꾼은 벌을 받고 착하게 살아가는 시민은 응분의 보상을 받기를 사람들은 대체로 기대한다. - P337

이렇게 수정을 가하자 근래 들어 민주당이 골몰해온 커다란 수수께끼 하나를 이 ‘도덕성 기반 이론‘을 통해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문제란 바로 왜 미국의 시골 주민과 노동 계층은 일반적으로 공화당에 표를 던지는 경향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재분배를 통해 국민들에게 좀 더 공평하게 돈을 나누어주고자 하는 쪽은 오히려 민주당인데도 말이다.
민주당에서는 이들이 이렇게 자신의 경제적 이해에 반하는 식으로 투표하는 것은 공화당의 농락에 넘어간 때문이라고 곧잘 이야기한다(2004년의 인기작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What‘s theMatter with Kansas?))의 주된 논지도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도덕성 기반이론‘에서 보면, 시골 지역과 노동자 계층 유권자들은 사실 자신들의 도덕적 이해에 따라 투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입맛은 ‘더 트루 테이스트‘ 식당에는 맞지 않을뿐더러, 나아가 자신의 나라가 피해자들을 돌보고 사회의 정의를 실현시키는 데만 매달리는 것도 원치 않는다. 뒤르켐의 사회관을 비롯해서 여섯 가지 기반의 도덕성과 세 가지 기반의 도덕성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민주당은 사람들이 공화당에 투표하는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책 1부에서 나는 도덕심리학의 첫 번째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다음이다"라는 것이다. 2부에서는그러한 직관들 하나하나를 세세히 설명해나갔고, 그 과정에서 도덕심리학의 두 번째 원칙을 제시했다.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제는 이 다양한 도덕성 때문에 좋은 사람들 사이에 너무도 쉽게 편이 갈리는 모습을 살펴볼 차례이다. 이렇게 편이 갈라지면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는않고 적대적으로 싸우기만 한다. 이제 우리는 도덕심리학의 세 번째원칙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준비가 되었다. 바로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라는 것이다. - P337

이 이야기를 좀 더 정확하게 정리해보자. 내가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또래와의 경쟁에서 자신의 이익을 능숙하게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갖가지 정신 기제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인간 본성이 이집단적이기도 하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타 집단과의 경쟁에서 우리 집단의 이익을 능숙하게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갖가지 정신 기제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성인(聖人)은 못 되어도 더러 훌륭한 팀플레이어가 될 수는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면, 이집단성의 기제는 과연 어디서 생기는가가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오늘날 우리가 집단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까닭은, 먼 옛날 집단적인 개인들이 한 집단 내의 그렇지 못한 개인들을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면 이는 표준적이고기본적인 자연선택이 그저 개인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에 지나지않는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의 집단성은 글라우콘이 말한 식일 것이다. 알고 보면 사람들은 실제로 집단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위의 가정이 아니라고 하면, 국기 주위에 몰리기 현상(rally-round-the-flag)에서 보이듯이, 우리가 집단성 기제를 가진 것은 함께 뭉쳐 협동한 집단이 그렇지 못한 집단을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고 하면, 나는 이른바 ‘집단선택‘의 개념을들먹이는 것이 되는데, 이 집단선택의 개념은 1970년대에 학계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추방된 바 있다. - P344

다윈은 이때 이미 오늘날 다차원 선택(multi-level selection)이라고 알려진 개념의 기본 논리를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큰 인형을 열면그 안에 작은 인형들이 연달아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처럼, 생명은여러 차원이 위계 서열에 따라 겹겹이 포개진 모습을 하고 있다. 즉, 유전자는 염색체 속에 들어 있고, 염색체는 세포 속에 들어 있으며, 세포는 개별 유기체 안에 들어 있고, 개별 유기체는 벌집이나 인간사회 등 각종 집단 속에 들어 있다. 그리고 경쟁은 이러한 위계 서열의 어느 차원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주된 목적을 생각하면(도덕성 연구), 여기에서 중요한 차원은 딱 두 가지, 개별 유기체와 집단뿐이다. 집단 간 경쟁이 벌어질 때에는 보통 단결력과 협동심이 좋은 집단이 이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각 집단에는 저마다 이기적인 개인들(무임승차자)이 있어 결국에는 이들이 이득을 챙겨가지 않는가. 제일 용맹스러운 부대가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맞지만, 제일 용맹스러운 부대 안에서 이득을 보는 이들은 따로 있다. 즉, 몇몇겁쟁이가 전장에서 몸을 사리고 살아남아,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식을 낳고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다차원 선택은 결국, 각 차원에서 선택 압력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느냐, 즉 삶의 경쟁이 특정 특성들에 대해 어떤 유전자를 더 선호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 P348

 하지만 초창기 인간들이 애초 그런 집단 형성 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서였을까? 이에 대해 다윈은 인간이 팀플레이어들로 구성된 집단을 출현시키기까지 거쳤을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가능성 높은단계‘를 제시한다.
첫 단계는 ‘사회적 본능‘이었다. 아득히 먼 옛날에는 혼자 있기 좋아하면 포식자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았다. 집단 가까이에 머무는 충동이 강해 남들과 잘 무리를 짓는 사람들은 잘 살아남고 말이다. 두번째 단계는 호혜성이었다. 사람들은 전에 남을 도운 적이 있어야 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그것을 얻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다양한 사회성 덕목을 발전시키는 데에 무엇보다 중요했던 자극제‘는 따로 있으니, 바로 사람들은 ‘동료들의 칭찬과 책망‘에촉각을 곤두세운다는 사실이다." 다윈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에 살며 글을 썼지만 아테네의 귀족 출신이었던 글라우콘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자신의 평판에 강박적일 정도의 관심을 갖는다고 여겼다. 그가 보기에 이런 강박증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자연선택이개인적 차원에서 작동하며 생기는 것이었다. 즉, 나쁜 짓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거나 영예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주변 친구들이나 배우자에게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다윈은 한 가지 단계를 추가한다. 즉, 사람들에게는의무나 원칙을 신성시하는 능력이 있으며, 이것이 우리 인간의 종교적 본성 일부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이이 단계들을 하나로 합쳐놓고 보면 초창기 유인원이 어떤 길을 거쳐 인류로 진화했는지 그 모습이 그려지는데, 인류로 다 진화한 시점에서는 인간에게 무임승차는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군대에서도 명예· 충성심 · 조국이 그 무엇보다 신성시되는 만큼, 사실 겁쟁이들이 고향에 돌아가 자식을 낳고 아버지가 될 확률은 그다지높지 않다. 이런 이들은 군대에 들어가면, 십중팔구 구타를 당하거나 낙오하거나 아니면 부대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이유로 동료 병사들의 총탄에 목숨을 잃을 확률이 가장 높다. 설령 전장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의 평판은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 여자들은 물론 장차 고용주가 될 사람까지도 그를 멀리할 것이다. - P349

 윌리엄스가 주목했던 사실은 특정 차원에서 적응이 일어날 때는 항상 그 차원에서 선택 (설계) 과정이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떤 특성이 나타나는 이유가 저차원(이를테면 개체)의선택 효과로 충분히 설명된다면 굳이 고차원(이를테면 집단)까지 눈을돌릴 필요가 없다고 그는 독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논의 전개를 위해 윌리엄스는 사슴의 뜀박질 속도를 사례로 든다. 사슴들이 무리 지어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면, 속도가 빠른 무리가 마치 한 단위처럼 움직이며 이따금 경로까지 다 같이 바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리의 그런 행동을 보고 우리는 보통 집단선택에기대어 그것을 설명하곤 한다. 속도가 느린 무리보다 속도가 빠른 무리가 포식자를 피해 잘 달아난 세월이 벌써 수백만 년에 이를 것이고, 그러다 보니 속도가 느린 무리는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 속도가빠른 무리가 살아남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윌리엄스는 지적하길, 사슴의 경우 포식자를 피해 달아나는 능력은 개체 차원에서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즉, 선택 과정은 개체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 속도가 느린 사슴은 포식자에게 잡아먹힌 반면, 같은 무리에 있더라도 속도가 빠른 녀석들은 포식자를 피해 달아날 수 있었다. 이렇게 설명이 되는 만큼 굳이 선택에 무리 차원을 끌어들일 필요는 전혀 없다. 사슴 무리가 빠른 것은 다름 아니라 빠른 사슴들이모여 있기 때문이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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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헤일셤에서 점심 식사를 기다리는 ‘줄‘은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이상적인 장소 중하나였다. 그 대형 홀은 일종의 방음 장치가 되었다. 웅성거리는 소음과 높은 천장 덕택에 말소리를 낮추고 바짝 다가서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다른 사람이 엿듣는 걸 피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런 선택은 배반당하지 않았다. ‘조용한‘ 장소는 종종 최악의 장소이기도 했는데, 말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서 누군가 지나갈 가능성이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다.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슬그머니 빠져나온 듯한 모습을 포착 당하는 순간, 장소 전체가 이내 그 사실을 알아채는 듯했다. 그래서 적당한 기회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46

 선생님 말은, 진심으로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다지 창의적으로 될 수 없는 토미의 상태는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이었다. 그 점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 그에게 벌을 주거나 어떤 식으로든 압력을 가한다면, 학생이든 교사든 간에 그들이 잘못된 것이었다. 그건 토미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선생님 말씀이 맞지만 실제로는 모두들 그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긴다고 토미가 대꾸하자, 루시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고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이 너한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것만은 잊지 마. 이곳 헤일셤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그 점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적어도 난 네가 좋은 학생이고 그동안 알아 온 다른 학생들처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네가 얼마나 창의적인지는 중요하지않아." - P56

그리고 마담의 반응은 우리의 예상을 밑도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저 얼어붙은 듯 그자리에 멈춰 서서 우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고, 헉 하고 숨을 멈추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내적 반응을 감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충격을 받은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멈춰 서는 순간 나는 그녀의 표정을 힐긋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도 분명 그랬을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몸서리쳐지는 것을 애써 억누른 채 혹시 우리 중 하나가우발적으로 자기 몸에 닿을까 봐 겁에 질려 있었다. 걸음을멈추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는 그것을 알아챘다. 그것은찬란한 햇빛 속에서 나오자마자 으스스한 그늘이 드리워진듯한 느낌이었다. 루스의 말이 옳았다. 마담은 우리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미를 겁내는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를 겁내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상황에 대비가 되어 있지않았다.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거미가 된다면, 거미처럼보인다면 어떤 느낌일지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은 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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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캐시 H. 서른한 살이고 11년 이상 간병사 일을 해왔다. 11년이라면  꽤 긴 세월처럼 들린다. 실제로 그들이 내게 올해 말까지 8개월을 더 일해 주길 바라고 있으니, 그렇게 되면 내 경력은 거의 12년에 이른다. 내가 간병사로서의 경력을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한 게 그 일을 환상적으로 잘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서인 것만은 아님을 이제 나는 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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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밀드레드가 나오는 부분에 이른다. 그녀의 서류를 훑어보고 그녀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지 이해한 다음이기 때문에, 내가밀드레드의 모습이랍시고 지어낸 사소한 장면들에 민망함을 느낀다. 앤드루가 자서전에서 자기 아내를 밀어낸 정도를 보고 충격을받고 나의 공모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 정신에 전혀 해롭지 않은부분 몇 군데는 그가 기운차게 편집해버렸다. 오늘 밀드레드의 서류를 훑어보며 알게된 바에 따르면, 이 문단들에서 드러나는 밀드레드의 모습은 극도로 희석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죽은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존재가 그보다도 더 축소되어야 한다고생각했던 것이다. 자서전을 써야겠다는 베벨의 결심은 많은 부분아내의 오명을 벗기고 그녀가 배너의 소설에 나오는 은둔한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글을 읽어보니, 베벨은 밀드레드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그녀를 완전히 특징 없고 안전한 인물로 바꿔놓는 것을 더 원했던 것 같다-베벨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당시에 읽었던 위대한남자들의 자서전에 나오는 아내들과 똑같이 말이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어쩌면 해럴드 배너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똑같은 일을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왜 소설에 밀드레드의 망가진 모습을 그린단 말인가? 이건 『채권을 처음 읽은 이후로 내가 자문하고 또 자문한 질문이었다. 밀드레드는 그토록 명석했던 게 분명한데, 왜 그녀를 미친 사람으로 만드나? 세월이 지나며 나는 여러 가지 답을 생각해보았지만-질투, 복수심, 단순한 악의-배너의 인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몰랐기에 늘 같은 결론으로 돌아왔다. 배너가 밀드레드의 정신과 몸을 망가뜨린 것은 단지 그게 더 나은 이야기가 되기때문이었다고(설령 밀드레드에게 모욕이 되고 결국은 배너 자신을 파괴할지라도, 그가 쓰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던 이야기인 것이다). 배너는 역사 전체에 걸쳐 출현한 비극적 운명의 여주인공, 자신의 파멸을 구경거리로 내놓는 그런 여주인공이라는 고정관념에 억지로 밀드레드를 끼워맞췄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 P346

버린 종이를 도둑맞았다는 걸 알게 된 뒤 위로가 된 건, 그 내용이 전부 협박범을 위해 작성하던 허구라는 것뿐이었다. 그 페이지에는 앤드루 베벨의 정체를 드러내거나 나를 추적해올 만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이런 깨달음 때문에 생겨난 안도감이 잭을 생각하면서 든 분노와 슬픔보다 컸다. 이번에도 나는 내가 친구나 가족보다 베벨을- 베벨의 규칙과 표준, 위협을- 더 많이 신경쓴다는 걸 알고 낙심했다. 나와 그토록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도 기밀 유지 조항을 위반했을 때의 결과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게 보였다. 이 사실에 두 배는 더 의기소침해진 건, 내 생각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를 잃는 것은 베벨의 분노에 맞서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베벨의 힘은 그 정도였다. 그의 재산이 주변의 현실을 구부렸다. 그 현실에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세상에대한 그들의 인식은 내 인식이 그렇듯 베벨의 부를 향해 끌려가는 중력에 포획되었다. 그 중력으로 휘어졌다. - P368

"회장님은 밀드레드의 지성이 어떻게 드러났다고 생각하세요?"
"뭐, 알잖나. 수많은 사소한 것들을 통해서 드러난 거지. 이런 저택을 운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직원도 이렇게 많고 말이지. 물론, 밀드레드의 음악 취향도 그렇고. 하지만 그 얘기는 이미 했고, 책에 쓰일 만한 모든 사항을 다루었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내게 뒤지지 않으려면 꽤 재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해." 그는 콧구멍으로 웃었다. "쉽지 않지. 나한테 뒤지지 않는다는 건 전혀 쉬운일이 아니야. 혹시 이 얘기도 책에 넣겠나? 적당히 유머러스하게말이야. 그건 그렇고, 자네도 그리 나쁘진 않다네, 알겠지만."
베벨을 자극하고 구석으로 몰아넣어야겠다는 욕구가 사라지면서 두 뺨이 붉어졌다. - P375

문득, 음료수가게에서 선디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그를 보자 어떤 깨달음이 들었다. 원래의 영역에 있는 그를 본 지금, 이자가 비양심적인 신문사든, 정부든 뭐든 높은 권력을 위해 일하는 공모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그냥 브루클린 꼬맹이였다. 단벌 정장을 입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있잖아." 나는 핸드백에 손을 넣었다. "여기 10달러 줄게."
그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돈을 보더니 굳었다.
ㅍ"난 누가 널 이리로 보냈는지 알아." 내가 말했다. "그 사람 이름을 말하면 10달러는 네 거야. 말하지 않으면 그냥 갈게. 네가 할 수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이봐요, 파르텐자 양. 우린 당신의 공산주의자 아버지에 대해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을 뗐다.
"잭이요." 그가 말했다.
나는 멈춰 섰다. 그 순간의 경험은 오늘날까지도 내가 증오심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남아 있다. 나는 돌아가 테이블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 P378

"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아버지가 한참 만에 말했다. "내가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었어."
나는 아버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하지만 시간이 됐구나. 넌 현명하니까 네 판단을 믿는다. 내생각이 너랑 다르더라도 말이야."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됐어. 아니, 지났지. 넌 떠나야 해."
이런 마지막 말과 함께, 아버지도 내 손을 더욱 꽉 잡고 나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식탁을 돌아가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알겠지만, 이런 시궁창도 괜찮다면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는 따뜻하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그날을 함께 보냈다.  - P398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직장에서든 사생활에서든 무수히 많은 남자들이 내 아이디어를 자기 것인 양 내 앞에서 되풀이해 말하는 경험을 했다 처음에 그 생각을 떠올린 사람이 나라는 걸 내가 기억하지 못할 것처럼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허영심이 기억을 가리는 바람에, 그들이 선택적인 기억상실에 힘입여 양심에 한 점 부끄럼 없이 문득 떠오른 깨달음을 자기 것이라고주장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당시에 어린 나이에도나는 이런 기생적 형태의 가스라이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가우리 가족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인 것처럼 말한다니?
"대체로 나는 아내가 알려준 단서로 사건을 해결했지만, 아내에게는 티를 내지 않도록 신경썼네." 베벨은 잔을 들고, 다시 한번 혼자 미소 짓는 듯하더니 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늘 어떤 비서나 집사를 의심하다가, 밀드레드가 실제 살인자가 누구인지 밝히면놀란 척했네."
이건 내가 베벨의 회고록에 적어넣지 않은 내용이었다. 나는 용의자가 누군지 모르는 척하고, 상대를 아이 취급하며 틀린 게 분명한 용의자를 지적하는 내용을 밀드레드와 베벨에 관한 내 이야기에 집어넣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방금 읽은 소설을 아버지에게 말해줄 때마다 아버지가 한 바로 그 행동이었다. 아버지는 늘 나의 가짜 단서들을 성실하게 따라온 다음 범인이 버릇 나쁜 양아들이나 모욕을 당한 여자 후계자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는 내내 아버지가 나를 상대로 장난을 친 것뿐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당혹스러웠다. 베벨의 생각이 아버지와 똑같은 방식으로 돌아가는 걸보자 두 배로 우울했다. 내가 만들어준 허구의 세계에, 베벨은 현실에서 아버지가 나를 대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아내에게 반응하는, 자기가 만든 장면을 덧붙였다. - P405

"뭐라고요?"
"그래. 내가 이 칼을 받으면 운이 나빠질 거다. 우리가 싸우게 될거야. 우리 둘의 연결이 끊어져."
나는 아버지의 작은 미신들이 단지 고향에서부터 가져온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가져온 다른 전설과 일화, 요리법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문제에 관해 이상할 만큼 진지해 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상자를 집어들려고 했다.
"잠깐. "아버지가 말했다. "해결책이 있어. 돈이야."
나는 아버지를 보았다.
"돈이라고."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내가 너한테서 칼을 사는거지. 그렇게 해결하는 거야. 그러면 선물이 아니니까." 아버지는주머니를 뒤져 내게 동전을 내밀었다. "여기, 1페니를 받고 그 멋진 칼을 팔아주겠니?"
나는 동전을 받았다. 아버지가 상자를 집어들었다.
"아, 이것 좀 봐라!" 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엄지로 칼날을 더듬어보았다. "전에 이런 게 있었는데. 기억나니? 네가 그 칼로 화살을 깎아서 만들었어. 아주 오래전이지. 하지만 이 칼이 훨씬 낫구나. 멋진 작품인데, 아주 비쌌겠어. 무척 고맙구나, 얘야."
우리는 칼을 사용해 살라미 소시지와 치즈를 좀 자르고, 예전처럼 카운터에 서서 수다를 떨며 먹었다-나는 겨우 보름 전에 집을나왔지만, 아버지와 보낸 시간은 이미 옛 시절이 되었다. 베벨 이야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도 그 이후로도.
나는 우리를 구해준 그 동전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 P413

종 모양 유리 덮개 안에서는 종이 울리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그 무엇도 기억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무시무시한 자유

콧노래가 내 머릿속에서만 들린다는 걸 깨닫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린다
파장이 없는 소음도 소리일까?

간호사가 방금 내 손톱을 깎았다. 깎으면서 먼지를 불어 날린다

사물에서 단어들이 벗겨진다

잠을 들락거린다. 검은 천 밑에서 나왔다가 다시 사라지는 바늘처럼. 실이 꿰어지지 않은 채. - P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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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브루클린 공립도서관에서 그런 책 몇 권을 빌릴 수 있었고, 이어지는 주에는 혼란스럽고도 무계획적인 방식으로 그 책들을 훑었다. 별 체계 없이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건너뛰며 출처를 적지않은 채 아무 내용이나 메모했다. 나는 문서 연구에 대해서나 서지정보를 제대로 다루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훈련받은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게 이점이었다. 나의 거칠고 타협의 여지 없이 비체계적인 접근법 덕분에 책들이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남자들 각각의 개인적인 특징은 카네기의 자족적인 독실함, 그랜트의 근본적인 품위, 포드의 딱딱한 실용주의, 쿨리지의 수사적 검약 등등 당시 내가 생각하던 그들 모두의 공통점 앞에 무너져내렸다. 즉, 그들은 모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말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자신들의 결점 없는 삶에 관한 이야기는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고. 그들 모두가 내 아버지에게 있던 바로 그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베벨이 글로 옮기고싶어하는 확신이라는 걸 알았다. - P311

아버지는 감정의 독점권을 행사했다. 아버지의 행복은 그 어떤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기분이 좋으면, 모두가 기꺼이아버지의 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의 농담에 웃고 뭐든 아버지가떠올린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여해야 했다- 재앙에 가까운 집 인테리어든, 스물네 시간 내내 하는 인쇄 업무든, 누군가 이야기한 이탈리아인 정육점 주인을 찾아 브롱크스를 돌아다니는 것이든. 하지만 자기 기분이 처지거나 억울할 때면,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 화가 나 있을 때의 아버지 얼굴처럼 결의에 찬 얼굴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슬프게도, 그 결의는 오직 자신에게만 고정된 결의였다 결의에 차겠다는 결의에 찬 얼굴. 일단 그런 상태가 되면,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모든 형태의 타협을 자기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존재 전부가 부식되어 쓸려나갈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십 년 넘게 아버지와 같이 살았고, 우리는 내가 독립한 뒤에도 가까이 지냈다. 그 모든 세월 동안 아버지는 내게 단 한 번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사과하지 않았다. - P312

이 모든 이유로, 아버지가 "급진적인 행동"이라는 말로 무엇을이야기하고자 했는지 알아내는 건 내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잭이 아버지의 말에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던 건 기억난다.
"제가 한 생각은요." 잭이 생각에 잠겨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제 자리가 유럽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보도하는거죠. 최전방에서요. 헤밍웨이처럼. 어쩌면 최전방에 합류할지도 몰라요. 국제여단이요. 아시죠? 뭔가 하는 거예요. 이렇게 빈둥거리고있으니 죽을 것 같아요."
나는 우울하게 술잔을 들여다보는 그 두 사람을 보고 당혹감에 몸을 떨었다. 겉만 번드르르한 그들의 말. 소년 같은 진지함. 결정이 정말로 어떻게 내려지는지 이들이 알았다면, 진정한 권위의 목소리가 얼마나 조용조용한지 들을 수만 있다면, 자신들이 어떤 형태로든 진짜 권력으로부터 얼마나 불가능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 P325

"혹시 내가 악의나 복수심에 따라 움직인다거나, 그보다 더 나쁘게는 잔인함에서 변태적인 전율을 찾는다는 얘기를 하는 건가? 내가 보기에 자네는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같군. 내가 보기에 자네는 이 모든 일이 다 무엇에 관한 것인지 모르는 것 같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
"현실을 조정하고 구부리는 것입니다."
당시에 나는 그 표현이 이 상황에 적용되는 것인지 전적으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가 남이 자기 말을 인용하는걸 좋아한다는 건 알았다.
"바로 그거야. 그리고 현실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 배너가 존재한 적도 없던 세상에서 배너의 흔적이 발견된다니,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인가?"
앤드루 베벨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나는 두려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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