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밀드레드가 나오는 부분에 이른다. 그녀의 서류를 훑어보고 그녀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지 이해한 다음이기 때문에, 내가밀드레드의 모습이랍시고 지어낸 사소한 장면들에 민망함을 느낀다. 앤드루가 자서전에서 자기 아내를 밀어낸 정도를 보고 충격을받고 나의 공모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 정신에 전혀 해롭지 않은부분 몇 군데는 그가 기운차게 편집해버렸다. 오늘 밀드레드의 서류를 훑어보며 알게된 바에 따르면, 이 문단들에서 드러나는 밀드레드의 모습은 극도로 희석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죽은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존재가 그보다도 더 축소되어야 한다고생각했던 것이다. 자서전을 써야겠다는 베벨의 결심은 많은 부분아내의 오명을 벗기고 그녀가 배너의 소설에 나오는 은둔한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글을 읽어보니, 베벨은 밀드레드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그녀를 완전히 특징 없고 안전한 인물로 바꿔놓는 것을 더 원했던 것 같다-베벨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당시에 읽었던 위대한남자들의 자서전에 나오는 아내들과 똑같이 말이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어쩌면 해럴드 배너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똑같은 일을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왜 소설에 밀드레드의 망가진 모습을 그린단 말인가? 이건 『채권을 처음 읽은 이후로 내가 자문하고 또 자문한 질문이었다. 밀드레드는 그토록 명석했던 게 분명한데, 왜 그녀를 미친 사람으로 만드나? 세월이 지나며 나는 여러 가지 답을 생각해보았지만-질투, 복수심, 단순한 악의-배너의 인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몰랐기에 늘 같은 결론으로 돌아왔다. 배너가 밀드레드의 정신과 몸을 망가뜨린 것은 단지 그게 더 나은 이야기가 되기때문이었다고(설령 밀드레드에게 모욕이 되고 결국은 배너 자신을 파괴할지라도, 그가 쓰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던 이야기인 것이다). 배너는 역사 전체에 걸쳐 출현한 비극적 운명의 여주인공, 자신의 파멸을 구경거리로 내놓는 그런 여주인공이라는 고정관념에 억지로 밀드레드를 끼워맞췄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 P346

버린 종이를 도둑맞았다는 걸 알게 된 뒤 위로가 된 건, 그 내용이 전부 협박범을 위해 작성하던 허구라는 것뿐이었다. 그 페이지에는 앤드루 베벨의 정체를 드러내거나 나를 추적해올 만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이런 깨달음 때문에 생겨난 안도감이 잭을 생각하면서 든 분노와 슬픔보다 컸다. 이번에도 나는 내가 친구나 가족보다 베벨을- 베벨의 규칙과 표준, 위협을- 더 많이 신경쓴다는 걸 알고 낙심했다. 나와 그토록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도 기밀 유지 조항을 위반했을 때의 결과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게 보였다. 이 사실에 두 배는 더 의기소침해진 건, 내 생각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를 잃는 것은 베벨의 분노에 맞서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베벨의 힘은 그 정도였다. 그의 재산이 주변의 현실을 구부렸다. 그 현실에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세상에대한 그들의 인식은 내 인식이 그렇듯 베벨의 부를 향해 끌려가는 중력에 포획되었다. 그 중력으로 휘어졌다. - P368

"회장님은 밀드레드의 지성이 어떻게 드러났다고 생각하세요?"
"뭐, 알잖나. 수많은 사소한 것들을 통해서 드러난 거지. 이런 저택을 운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직원도 이렇게 많고 말이지. 물론, 밀드레드의 음악 취향도 그렇고. 하지만 그 얘기는 이미 했고, 책에 쓰일 만한 모든 사항을 다루었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내게 뒤지지 않으려면 꽤 재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해." 그는 콧구멍으로 웃었다. "쉽지 않지. 나한테 뒤지지 않는다는 건 전혀 쉬운일이 아니야. 혹시 이 얘기도 책에 넣겠나? 적당히 유머러스하게말이야. 그건 그렇고, 자네도 그리 나쁘진 않다네, 알겠지만."
베벨을 자극하고 구석으로 몰아넣어야겠다는 욕구가 사라지면서 두 뺨이 붉어졌다. - P375

문득, 음료수가게에서 선디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그를 보자 어떤 깨달음이 들었다. 원래의 영역에 있는 그를 본 지금, 이자가 비양심적인 신문사든, 정부든 뭐든 높은 권력을 위해 일하는 공모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그냥 브루클린 꼬맹이였다. 단벌 정장을 입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있잖아." 나는 핸드백에 손을 넣었다. "여기 10달러 줄게."
그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돈을 보더니 굳었다.
ㅍ"난 누가 널 이리로 보냈는지 알아." 내가 말했다. "그 사람 이름을 말하면 10달러는 네 거야. 말하지 않으면 그냥 갈게. 네가 할 수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이봐요, 파르텐자 양. 우린 당신의 공산주의자 아버지에 대해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을 뗐다.
"잭이요." 그가 말했다.
나는 멈춰 섰다. 그 순간의 경험은 오늘날까지도 내가 증오심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남아 있다. 나는 돌아가 테이블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 P378

"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아버지가 한참 만에 말했다. "내가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었어."
나는 아버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하지만 시간이 됐구나. 넌 현명하니까 네 판단을 믿는다. 내생각이 너랑 다르더라도 말이야."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됐어. 아니, 지났지. 넌 떠나야 해."
이런 마지막 말과 함께, 아버지도 내 손을 더욱 꽉 잡고 나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식탁을 돌아가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알겠지만, 이런 시궁창도 괜찮다면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는 따뜻하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그날을 함께 보냈다.  - P398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직장에서든 사생활에서든 무수히 많은 남자들이 내 아이디어를 자기 것인 양 내 앞에서 되풀이해 말하는 경험을 했다 처음에 그 생각을 떠올린 사람이 나라는 걸 내가 기억하지 못할 것처럼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허영심이 기억을 가리는 바람에, 그들이 선택적인 기억상실에 힘입여 양심에 한 점 부끄럼 없이 문득 떠오른 깨달음을 자기 것이라고주장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당시에 어린 나이에도나는 이런 기생적 형태의 가스라이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가우리 가족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인 것처럼 말한다니?
"대체로 나는 아내가 알려준 단서로 사건을 해결했지만, 아내에게는 티를 내지 않도록 신경썼네." 베벨은 잔을 들고, 다시 한번 혼자 미소 짓는 듯하더니 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늘 어떤 비서나 집사를 의심하다가, 밀드레드가 실제 살인자가 누구인지 밝히면놀란 척했네."
이건 내가 베벨의 회고록에 적어넣지 않은 내용이었다. 나는 용의자가 누군지 모르는 척하고, 상대를 아이 취급하며 틀린 게 분명한 용의자를 지적하는 내용을 밀드레드와 베벨에 관한 내 이야기에 집어넣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방금 읽은 소설을 아버지에게 말해줄 때마다 아버지가 한 바로 그 행동이었다. 아버지는 늘 나의 가짜 단서들을 성실하게 따라온 다음 범인이 버릇 나쁜 양아들이나 모욕을 당한 여자 후계자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는 내내 아버지가 나를 상대로 장난을 친 것뿐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당혹스러웠다. 베벨의 생각이 아버지와 똑같은 방식으로 돌아가는 걸보자 두 배로 우울했다. 내가 만들어준 허구의 세계에, 베벨은 현실에서 아버지가 나를 대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아내에게 반응하는, 자기가 만든 장면을 덧붙였다. - P405

"뭐라고요?"
"그래. 내가 이 칼을 받으면 운이 나빠질 거다. 우리가 싸우게 될거야. 우리 둘의 연결이 끊어져."
나는 아버지의 작은 미신들이 단지 고향에서부터 가져온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가져온 다른 전설과 일화, 요리법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문제에 관해 이상할 만큼 진지해 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상자를 집어들려고 했다.
"잠깐. "아버지가 말했다. "해결책이 있어. 돈이야."
나는 아버지를 보았다.
"돈이라고."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내가 너한테서 칼을 사는거지. 그렇게 해결하는 거야. 그러면 선물이 아니니까." 아버지는주머니를 뒤져 내게 동전을 내밀었다. "여기, 1페니를 받고 그 멋진 칼을 팔아주겠니?"
나는 동전을 받았다. 아버지가 상자를 집어들었다.
"아, 이것 좀 봐라!" 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엄지로 칼날을 더듬어보았다. "전에 이런 게 있었는데. 기억나니? 네가 그 칼로 화살을 깎아서 만들었어. 아주 오래전이지. 하지만 이 칼이 훨씬 낫구나. 멋진 작품인데, 아주 비쌌겠어. 무척 고맙구나, 얘야."
우리는 칼을 사용해 살라미 소시지와 치즈를 좀 자르고, 예전처럼 카운터에 서서 수다를 떨며 먹었다-나는 겨우 보름 전에 집을나왔지만, 아버지와 보낸 시간은 이미 옛 시절이 되었다. 베벨 이야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도 그 이후로도.
나는 우리를 구해준 그 동전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 P413

종 모양 유리 덮개 안에서는 종이 울리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그 무엇도 기억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무시무시한 자유

콧노래가 내 머릿속에서만 들린다는 걸 깨닫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린다
파장이 없는 소음도 소리일까?

간호사가 방금 내 손톱을 깎았다. 깎으면서 먼지를 불어 날린다

사물에서 단어들이 벗겨진다

잠을 들락거린다. 검은 천 밑에서 나왔다가 다시 사라지는 바늘처럼. 실이 꿰어지지 않은 채. - P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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