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학창 시절, 나는 학년 말이면 여름 한 철 읽을 만한 것을 찾으러 예일대학교 협동조합 상점에 가곤 했다. 주머니 사정은 썩 좋지 않았지만, 조합에서 운영하는 서점은 잘 안 팔리는 책들을 말도 안 되는 싼 값에내놓았다. 나는 상자 속에 무더기로 뒤섞여 쌓여 있는 이런 책들을 별생각 없이 훑어보면서 내 흥미를 끌 만한 뭔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로 기묘한 페이퍼백 표지가 내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 일부로, 지면 위로 아득히 떠 있는 초승달 아래 몸통은 없이 다리 두 쌍만이 천상의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붙어 있는 그림이었다. 그 책은 루크레티우스가2,000여 년 전에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를 산문으로 바꿔 번역한 영어판(On the Nature of Things)이었다. 책값은 10센트에 불과했고, 나는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고백하건대, 물질계에 대한 고대의 설명에 대한 호기심 못지않게 표지에 끌렸던 것이 사실이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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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사이 몇 년 가운데 어느 무렵, 나는 유철인이 말한 "맺힌 원한, 좌절의 슬픔 또는 억울함을 풀어내는(...)신세 한탄" 비슷한 것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음에서,
몸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 되풀이되는 엉킴"에 대처하기위해 수행되는 의식이지만, 여기서 자아는 마치 무당처럼 다른목소리나 매개체를 통해 말한다. "환자는 자신의 언어로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당이 환자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 매개체는 주로 "환자를 치유하거나사회적 탈구까지" 치유한다고 여겨진다. 나는 다른 이의 목소리로 혹은 탈구된 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라는 매개를통해 ‘신세 한탄‘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기"는 우리에게 주체성의 경험을 안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젝을 인용하자면

하지만 그 목소리가 동시에 주체의 자기 존재감과 자기 투명성을 대단히 근본적으로 해치는 건 아닐까? 나는 나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지만 내가 듣는 것은 전적으로 나 자신은 아니며 내 심장 안에 있는 이질적인 몸, 기생충이다. 그리하여 그 목소리는 산 것도 죽은것도 아니다. 그보다 그 원초적인 현상학적 상태는 자신의 죽음에서, 그러니까 의미의 퇴색에서 살아남은 유령 같은 허깨비의 상태,
살아있는 죽음의 상태이다. 

리 타지리처럼 나는 일부분이 삭제된, 진실이 아닌 이야기를 들으며 지냈고, 종국에는 새로운 이야기들, 과거 사건 혹은 만개한 환각을 아주 조금 변형한 반복들, 진실도 전부도 아닌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썼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는 주체에게 묶이지는 않았지만 디아스포라의 무의식 속에 살아 있는 기억의 정동적인 표현이다. - P329

이 책의 핵심적인 동기는 어머니였지만 여러분이 상상하듯 가족의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내게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내가 말들을 무대 위에 올리자 가족 내에서 이견과 분란이 일어났지만 이 드라마가 이어졌을 때 내 글쓰기를 유일하게 지지해준 분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반대하셨더라면 이 책은 결코 세상에 나오지 못했으리라. 결국 어머니는 내가수년 동안 입밖에 내고 싶었던 그 말들을 발화할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내 무의식을 다독이는 선물을 내게 주셨다.
어머니에게 "엄마, 난 어머니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수치스럽지않아요. 엄마는 인정받아 마땅해요"라고 말할 수 있어서 대단히 행복했다. 이 책은 책으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망각되었을것들의 기억을 살아 있게 만들려는 의도에서 저술되었다. 이모든 말들이 종국에는 어머니를 그늘에서 끌어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책을 어머니에게 바친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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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군 신부로서의 양공주가 자기 몸 안에 있는 양갈보로서의 양공주를 억압할 때, 그래서 자기 과거의 유령에의해 배회당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런 유형의 정신적 폭력은 동화 프로젝트가 유발하는 가장 큰 골칫거리이기만 한게 아니라 동화 프로젝트에 가해지는 가장 큰 골칫거리이기도하다. 양공주가 명예 백인성이라는 판타지 주변을 배회하기 때문이다. 양공주에게는 뒤에 남겨진 모든 양공주들과 죽음을통해 기지촌을 탈출한 이들뿐만 아니라, 감춰진 그 자신의 과거가 유령처럼 들러붙는다. 양공주가 그 자신에 관해, 그리고 자신이 상징하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관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은 디아스포라 전체에 무의식적으로 전파된다.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이들마저도 또 다른 이의 과거에서흘러나와 주위를 맴도는 공포에 의해 여전히 배회당한다. - P258

 마치 기억의메커니즘이 그 비극이 일어난 현장에 있었던 개인이 아니라, 시간을 관통하며 유포된 눈과 혀와 그 외의 부분들이 결합된 아상블라주라는 듯이.
이 아상블라주는 픽션이 섞인 이 이야기의 경계를 넘어서,
침몰 사건이 일어나고 56년이 지난 뒤 그 우키시마호를 보고있는 사람들의 눈까지 포괄한다. 존스턴은 이런 형태의 보기를 ‘기계 비전‘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수동적인 감각기관인 눈뿐만 아니라, 환경 속에서 이질적인 조건들과 협력하는유포된 눈들의 아상블라주의 기능이다. "새로운 유형의 집합적인 정신 장치에 해당하는) 이 아상블라주의 사회적 공간들 안에서는, 이미지를 보기 또는 흡수하기가 일반적인 형태의 기계 비전을구성한다. 존스턴이 밝히듯 기계적 아상블라주가 "새로운 유형의 집합적인 정신 장치"라면 우리는 초세대적 배회를 기계 비전의,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유포된 지각의 사례로 파악할수 있다. 대신 말해줄 다른 몸들을 찾는 초세대적인 유령이 그렇듯, 주체가 자신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트라우마를 보지못하는 까닭에 주체의 눈은 몸과 세대를 횡단하여 유포된다. 디아스포라의 기계 비전은 어쩌면 배회당하는 역사를 ‘볼‘ 수있는 유일한 수단인지 모른다. - P299

주체가 자신의 역사를 말하지 못할 때, 역사가 이해불가능하거나 이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누가 또는 무엇이 주체를 위해 이야기할까? 직접적으로 발화되지 못하는 것은
"복화술사처럼, 주체 자신의 정신적 지형도 내의 이방인처럼 작동하는"유령이 된다. 4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이 유령은몸을 타고 아래로, 몸을 횡단하여 전달되고, 목소리는 다양한 화자를 통해 스스로를 유포함으로써 표현 방법을 찾아낸다. 알리사르보는 한 세대의 기억이 다른 세대의 기억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한 시기나 장소의 기억이 미래에 투사되어 일상의여기와 지금처럼 보이는 곳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때 나타나는 이 현상을 "한다리 건너뛴 기억memory once removed"이라고 부른다.
다른 세대의 목소리가 침투된 무의식은 르보가 "간접적인" 혹은 "전이적인 자서전"이라고 부르는 글쓰기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런 이야기에서 화자는 원 사건이나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지난 삶의 흔적을 담고 있는, 그래서 원래의 것을 환영으로 만드는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해 말한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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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프로젝트를 위해 무엇이 부정되는가? 데이비드 엥은 아시아계 미국인의 역사는 배제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공식 역사로부터 아시아인들의 몸을 배제하고, 미국으로의이주에서 아시아인들의 몸을 배제해온 역사라고. 엥은이런 누락을 "존재를 흔적 없이 지워버리겠다고 위협하는결핍"이라고 일컫는다." 엥의 목록에 추가해야 하는 다른 배제들도 있다. 아시아 이민자들은 애당초 이주를 촉발한 트라우마로 얼룩진 역사로 인해 겪는 슬픔을 부정당할 뿐 아니라 "인종화된 타자를 배제하면서도 붙들고 있어야만" 그 민족적 이상이 유지되는 나라에서 겪은 트라우마로 얼룩진 출발로 인해 겪게 되는 슬픔 역시 부정당한다. 아시아이민자들은 동화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결코 동화에 닿지못하는 "거의 백인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들은 "자신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에 특권을 부여하는 지배적인 인식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달고 사는 뿌리 깊은, 무형의, 심리적 문제"에 시달린다. 이들은 자신의 슬픔을 부정하면서 존재가 지워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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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윤금이라고 하는 기지촌 성노동자가 말싸움중에 한 손님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기지촌에서 살해당한 성노동자는 윤금이가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의 죽음은과잉 가시화되었고, 이 사건은 미군이 한국 성노동자에게저지른 범죄 때문에 한국 재판으로 인도된 첫 사례라는 점에서 한미관계에 전례가 되었다." 목숨을 잃은 윤금이는 김현숙의 말을 빌리면 "한국 여성의 몸을 상대로 자행된 제국주의적폭력의 물질적 증거가 되어 "젠더와 성 정치를 논의하기위한 새로운 장을 열었다. 물질적 증거‘는 분명 이 사건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양공주는 그 생명이 기지촌이라고 하는 게토 안으로 제한되어 있고 그 죽음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없다고 여겨지는 일회용품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자행되는 폭력은 일반 대중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하지만윤금이 사건은 ‘주한미군의 윤금이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에소속된 광범위한 단체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 위원회는 나중에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로 이어졌다. 1980년대와1990년대에 미국과 한국 정부를 향한 적개심이 커지면서 양공주라는 인물에 반제국주의적 욕망이 가득 들어찰 수있는 조건 역시 확대되었다. 윤금이 사건은 피식민국가의 상징인 양공주가 수치심 때문에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던성노동자에서 환대를 받으며 귀향한 조국의 딸로 탈바꿈하는전기가 되었다. 그 사건은 한국의 파열된 과거로 회귀하는 또다른 순간이기도 했다. - P203

그래서 이제는 이 여자를 바라봐야하는 건, 이 여자를바라보면서 남한 민중이 국가의 탐욕에 어떻게 팔아넘겨지고있는지, 미국의 군사 헤게모니에 의해 어떻게 짓이겨지고있는지까지 시야를 넓혀야하는 건 정치적 의무였어.
죽은 양공주의 이미지는 이 사건을 떠들어대는 운동가들에의해 널리 유통되었지. "이 여성의 몸이 발견된 환경이너무 참혹해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라고 그들 스스로주장하면서도 말이야. 너무 잔인하게 살해당해 거기에 생긴모든 시시콜콜한 상해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인 여자의 몸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언어는 이런 식이었지. "여자의 자궁안에 맥주병 두개. 코카콜라 병 하나가 질을 관통하고 있음.
우산이 직장 안으로 27센티미터 들어감. " "여자의 알몸이 "증거를바닥에 늘어져 있음. (...) 몸과 얼굴은 피범벅임.
훼손하려는 시도에서 (범인은) 여자의 입엔 부러진 성냥을채워 넣었고 몸에는 흰 가루세제를 뿌렸다. " 하지만 여자를 보이게 하려는 이 시도 속에서 여자는 다시 한 번 삭제되었어. - P205

하지만 윤금이 살인 사건 이후 기지촌 매춘부들은 반미담론에서 "한국인과 한국 여성들의 집단적인 고통을 상징하는" 군사 지배의 희생자로 노출되었다. 김현숙의 주장에 따르면 양공주에게 이런 상징을 부여하는 행위는 자기 삶의 의미를 협상하는 기지촌 여성의 행위자성을 부정한다. 양공주의 몸위에서 이데올로기 전투가 일어나면서 양공주가 한반도의 포퓰리즘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고, 이에 따라 여기저기 퍼날라지는 양공주의 이미지는 갈등 정치의 상징인 양공주가 디아스포라를 경유하면서 더욱 굴절될 것임을 암시하기도 했다. 양공주라는 인물을 두고 디아스포라 학계는 억압받는 자의 몸을 복화술사의 헝겊 인형처럼 사용하는 반체제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모국의 정치에 간여하고픈 긴장된 욕망을 드러냈다. 특히 페미니스트들에게 양공주는 한인 디아스포라내의 여성 주체성에 관한 의미 협상의 장이 되었으며, 여성주체에게 자신의 의미를 협상하는 역량을 부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고심하게 만들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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