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자료가 될 수도 있으므로, 끝으로 여기에 타루가 묘사한 의사 리유의 모습을 옮겨 적어 두어도 무방할 것이다. 서술자의 판단으로는 상당히 충실한 묘사라고 볼 수 있다.
‘서른다섯 살쯤 되어 보인다. 중키, 딱 벌어진 어깨, 거의 직사각형에 가까운 얼굴, 색이 짙고 곧은 두 눈이지만 턱뼈는 불숙하게 튀어나왔다. 굳센 콧날은 고르다. 아주 짧게 깎은 검은 머리, 입은 활처럼 둥글고, 두꺼운 입술을 거의 언제나 굳게 다물고 있다. 햇볕에 그은 피부, 검은 털, 한결같이 짙은 색이지만 그에게는 잘 어울리는 양복 색 같은 것이 어딘가 시칠리아 농부 같은 인상을 준다.
그는 걸음걸이가 빠르다. 그는 걸음걸이를 바꾸는 법도 없이 보도를 걸어 내려가지만 세 번이면 두 번은 가법게 껑충 반대편 보도로 올라간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방심하기 일쑤여서, 길모퉁이를 회전하고 난 뒤에도 깜빡이를 끄지 않은 채 가고 있다. 늘 모자를 쓰지 않은 맨머리다. 세상사를 훤히 다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표정.‘
- P44

물론 그는 리유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게 뭔지 알고 있겠죠?"
"분석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 결과를 알아요. 분석을 해 볼 필요도 없어요. 나는 한때 중국에서 의사 생활을 한 경험이 있고 파리에서도 몇몇 경우를 겪었어요. 이십여 년 전의 일이죠. 다만 당장에는 그것에다가 감히 병명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이었지요.
여론이란 무서운 것이니까 경거망동은 금물이죠. 무엇보다도 경거망동만은 안 돼요. 그리고 어떤 동료 의사 말마따나 있을수 없는 일이다. 서양에서는 그것이 아주 자취를 감추었다는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이거예요. 그래요. 누구나 다 그것은 알고 있었어요. 죽은 사람만 빼고는 자, 리유,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게 무슨 병인지 잘 알고 있어요."
리유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자기 사무실의 창문 저 너머 멀리 물굽이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는 낭떠러지 바위의 등성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푸른빛이기는 했지만 해가 기울어 감에 따라 그 흐릿한 광채는 점점 부드러워졌다.
"그래요. 카스텔." 그가 말했다. "거의 믿기지 않는 일이오.
그렇지만 이건 페스트인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 P52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결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그의 망설임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가 불안과 믿음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던 것도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것이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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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일 혁명은 세계 석유 시장을 완전히 뒤바꿔놓았고 에너지 안보의 개념 자체를 변화시켰다. 수십 년 동안 석유 시장을 지배해왔던 ‘OPEC과 비(非)OPEC 국가들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사라지고 새로운 개념과 구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빅 3‘의 시대가 그것이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사태에 따른 석유 시장의 커다란 위기 속에서 우리는 이들 세 나라 사이의 전례 없는 상호 작용을 통해 그 시대를 똑똑히 목도할 수 있었다.
- P113

러시아의 부활을 이끌고 경제 발전을 뒷받침한 건 바로 석유와 천연가스다. 또한 러시아는 이 두 천연 자원을 이용해 국방력 이외의 다른방법으로 자국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푸틴은 "석유가 국제 정치 상황과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라 말했는가 하면 러시아가 에너지 초강대국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과거의 관점에서 벗어나고 싶다. 초강대국이란 냉전 시절에나 사용되던 용어다. 나는 한 번도 러시아를 에너지 초강대국이라 한 적이 없지만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들과 비교해봤을때 우리 러시아는 더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푸틴이 애기한 분명한 사실은 러시아가 보유 중인 천연 자원의 규모 자체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러시아는 미국, 사우디아라비아와 더불어 석유 생산국 빅3 중 하나이며 세계 2위의 천연가스 생산국 및 세계최대의 천연가스 수출국이라는 지위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석유와천연가스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러시아의 국력을 뒷받침하는 재정적 기반이다. 러시아는 국가 예산의 40~50퍼센트, 전체 수출 수익의55~60퍼센트, 그리고 GDP의 대략 30퍼센트 이상을 석유와 천연가스수출에 의지하며, 무엇보다 이런 천연 자원들을 통해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 P118

1991년 말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우크라이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 국가로서 독립하게 되었다. 이제 우크라이나는 더 이상 지리적 개념에 불과한 지역이나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는 한 지역도, 또 변경 지대도 아니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당시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보유했던 1,900여 개의 핵탄두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 태생부터가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 3위의 핵무기 군사대국이었다. 하지만 1994년 이른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Budapest Memorandum)가 만들어지면서 우크라이나는 갖고 있던 핵무기 모두를 러시아에게 넘겼고 그 대신 러시아와 영국, 그리고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현재 국경‘을 ‘존중 및 인정‘ 하기로 약속한다.
- P130

천연가스와 가스관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하나로 이어줌과 동시에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 들여오는 천연가스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에너지 자원이며 경제와 산업을 뒷받침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에 더해 서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천연가스관이 자국 영토를 지나가게끔 해주며 받는 수수료 명목의 관세 역시 우크라이나 정부의 주요한 수입원이다.
그렇지만 러시아 역시 이런 입장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유럽은 가즈프롬에게 있어 천연가스의 주요 시장인 만큼 그 통로를 안전하게확보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시 말해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의사정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2005년 말 기준 서유럽으로 수출되는 러시아의 천연가스 중 80퍼센트가 우크라이나 가스관을 지나갔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같은 연방 소속이고 또 ‘형제 국가‘로서 가스관을 서로 연결해 사용하던 시절이라면 이런 관계에는 당연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과거의 소비에트 연방은 사라졌고 상황도 크게 달라졌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이제 더 이상 형제국가가 아닌 것이다. - P132

유럽연합의 에너지 정책은 또한 한 번 맺은 계약이 20년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거나 유가와 연동해 천연가스 가격을 정하는 오래된 계약방식을 폐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유럽의천연가스 거래는 이렇듯 장기적 예측 가능성 및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장기 계약을 통해 이루어져왔지만 이제 유럽연합은 투명성과 경쟁을새로운 원칙으로 내세운 것이다. 필요한 건 ‘관계‘가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로 이루어진 세상인 ‘시장‘ 이었다. 그렇다 해서 장기 계약을 반드시 피하자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시장 원리에 따라 가격이 움직이길바랐던 것뿐이었다.
결국 이상적인 방법은 천연가스관과 LNG 수송 시설, 그리고 거래소가 한곳에 모여 있는 영국과 네덜란드 등 주요 거래 거점을 중심으로단기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유럽연합은 또한 ‘반경쟁적 행위‘로 정의될 만한 일들을 막기 위해 가즈프롬이 자사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운반하는 가스관들을 소유하지 못하게끔 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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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대기가 주제로 다루는 기이한 사건들은 1947년 오랑에서 발생했다. 일반적인 의견에 따르면,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에서 좀 벗어나는 사건치고는, 그것이 일어난 장소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 오랑은 사실 하나의 ‘평범한 도시‘로서 알제리 해안에 면한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
- P11

바로 같은 날 저녁, 베르나르 리유는 건물 복도에 서서 자기집으로 올라가려고 열쇠를 찾다가, 복도의 어둠침침한 저 안쪽에서 털이 젖은 큰 쥐 한 마리가 불안정한 걸음으로 불쑥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 짐승은 멈춰 서서 몸의 균형을 잡는듯하더니 의사를 향해 달려오다가 또다시 멈추어 섰고 작게 소리를 내지르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다가 마침내는 빠끔히
벌린 주둥이에서 피를 토하면서 쓰러져 버렸다. 의사는 한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쥐가 아니었다. 쥐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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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임기 막바지에 이르러 법원과 공병대의 승인을 무시하고 이 문제에 개입해 마지막 1,320피트 구간의 건설 중단을 명령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된 도널드 트럼프는 그 중단 명령을 취소하는 행정 명령을 다시 내렸다. 그러는 사이 추워진 날씨, 그리고 녹은 눈으로 인한 강물 범람의 위험 때문에 주정부는 시위대들의 야영지를 폐쇄했다. 1,172 마일짜리 송유관의 마지막1,320피트 구간은 그렇게 마침내 완성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투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시위대와 활동가들, 그리고 법률 문제와 관련해 이들을 지원하는 동맹 세력은 새로 건설되는송유관이나 기존 송유관의 정비 작업 모두를 가로막고 싸울 것을 다짐했다. 한편 에너지 트랜스퍼는 부패 및 조직범죄 처벌법 (RackeleerInfluenced and Corrupl Organizations Act, RICO)에 따라 그린피스를 고소했다. 이 법은 원래 마피아를 겨냥한 것이었다). 노스다코타주에게 시위대가 남기고 간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비용을 포함한 4300만 달러의 비용 청구서가 남았다. 현장 수습을 맡은 한 공무원에따르면 "사람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많은 쓰레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백악관의 행정 명령이 떨어진 후 4개월이 지난 2017년 5월 말, 이제 완성된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을 따라 처음으로 석유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송유관 문제는 미국의 새로운 에너지 기반 시설을 둘러싼 셰일 혁명과 환경 운동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툼의 중심에 계속해서 자리하게 되었다.
- P93

미국은 여전히 석유 수입국이니 석유 수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
는 것이 어쩌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세일오일의 품질, 그리고 미국 정유 산업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미국의 정유 산업은대부분 매우 복잡하게 진행된다. 캐나다와 멕시코, 베네수엘라, 그리고 중동 지역에서 들여오는 저품질의 중질유를 대단히 복잡하고 튼튼한 설비를 통해 처리하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이후 멕시코 연안 지역과 중서부 지역에서는 이런 중질의 석유를 처리하기 위해 정유 시설정비 작업이 시작되었고 1,00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이 투입되었다.
그렇게 바뀐 정유 시설들은 고품질의 경질유인 세일오일을 처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때문에 셰일오일의 생산이 계속해서 늘어날수록 기존 정유 시설들의 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처리 비용 역시 그만큼 상승한다. 그러면 궁극적으로는 자동차 이용자와 다른 소비자들이 가격 측면에서 많은 부담을 지게 된다.
- P97

이제 미국의 석유 수출 금지는 지나간 역사가 되었다. 2008년 미국의 석유 수입량은 전체 국내 공급량의 6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였으나2019년에는 3퍼센트로 뚝 떨어졌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미국의 석유수입은 계속되었다.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에 들어갈 정도의 규모인 하루 3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하면서 한편으론 하루에 500만 배럴 이상의 석유 제품을 수입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석유 공급이 늘어났다는 것 이상의 문제였다. 세계 석유 산업과 경제, 그리고 역학 관계 모두에는 이제 역사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P99

푸틴 대통령이 이처럼 격하게 반응한 것은 당시 셰일가스가 지정학적 문제로 막 대두된 참이었기 때문이다. 세일가스의 개발은 천연가스의 세계 최대 생산국이자 유럽에 대한 주요 공급지인 러시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예상치 못한 특별한 혁명은 전 세계적으로 단순한 에너지 자원 개발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각 국가들 사이의 역학 관계가 미묘하게 바뀌어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지난 40년간 미국의 에너지 정책을 지배하고 외교 정책의 발목을잡아온 건 다름 아닌 에너지 자원의 부족 및 취약성에 대한 염려였다.
1973년 일어났던 석유 파동, 혹은 국왕을 폐위시키고 아야톨라 루홀라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가 권력을 잡았던 1979년 이란 혁명 등을 떠올려보자.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토머스 도닐런(Thomas Donilon)은 셰일 혁명이 "미국이 국제적 안정이라는 목표를 추구하고 수행하는 데 있어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하기도했다. 현 국무부 장관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는 나중에 조금 다른 식의 표현을 했다. 셰일 혁명을 통해 미국은 국제 문제에 대해 지난 수십 년 동안 갖추지 못했던 유연성을 갖게 되었다고 말이다.
- P103

그렇다면 세일 혁명은 지정학적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15년의 이란 핵협상이다. 2012년 미국은 이란의 석유 및 경제에 대한 제재를 시작했다. 이란의 석유 수출을 막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한 뒤 핵무기 개발의 철회를 종용하는 협상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런 제재 조치가 과연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석유 공급이 줄어들면 유가가 오를 것이고, 이로 인해 석유 수입국들이 타격을 입으면 분명 이란이 아닌 다른 곳에서 미국의 제재 조치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문제에 내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어쨌든 자국에 대한 새로운 제재 조치가 완전히 실패할 것"이라며 이란이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차 증가하는 미국의 셰일오일 생산량은 이란의 수출량 감소를 상쇄해주었고, 역시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경제 제재로 석유수출이 막히고 커다란 경제적 압박을 받게 된 이란은 마침내 오바마 행정부기 주도권을 잡고 있는 핵협상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재조치 철회의 대가로 이란은 핵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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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 P101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있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가게를 다니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 P169

•••••• 이건 말이야.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영혜에게 속삭인다. 덜컹, 도로가 파인 자리를 지나며 차체가 흔들린다. 그녀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영혜의 어깨를 붙든다.
••••••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짝 대고 한마디씩 말을 잇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그녀는 고개를 든다. 구급차는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잇길을 달려나가고 있다. 솔개로 보이는 검은 새가 먹구름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쏘는 듯한 여름햇살이 눈을 찔러, 그녀의 시선은 그 날갯짓을 더 따라가지 못한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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