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일 혁명은 세계 석유 시장을 완전히 뒤바꿔놓았고 에너지 안보의 개념 자체를 변화시켰다. 수십 년 동안 석유 시장을 지배해왔던 ‘OPEC과 비(非)OPEC 국가들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사라지고 새로운 개념과 구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빅 3‘의 시대가 그것이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사태에 따른 석유 시장의 커다란 위기 속에서 우리는 이들 세 나라 사이의 전례 없는 상호 작용을 통해 그 시대를 똑똑히 목도할 수 있었다. - P113
러시아의 부활을 이끌고 경제 발전을 뒷받침한 건 바로 석유와 천연가스다. 또한 러시아는 이 두 천연 자원을 이용해 국방력 이외의 다른방법으로 자국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푸틴은 "석유가 국제 정치 상황과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라 말했는가 하면 러시아가 에너지 초강대국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과거의 관점에서 벗어나고 싶다. 초강대국이란 냉전 시절에나 사용되던 용어다. 나는 한 번도 러시아를 에너지 초강대국이라 한 적이 없지만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들과 비교해봤을때 우리 러시아는 더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푸틴이 애기한 분명한 사실은 러시아가 보유 중인 천연 자원의 규모 자체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러시아는 미국, 사우디아라비아와 더불어 석유 생산국 빅3 중 하나이며 세계 2위의 천연가스 생산국 및 세계최대의 천연가스 수출국이라는 지위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석유와천연가스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러시아의 국력을 뒷받침하는 재정적 기반이다. 러시아는 국가 예산의 40~50퍼센트, 전체 수출 수익의55~60퍼센트, 그리고 GDP의 대략 30퍼센트 이상을 석유와 천연가스수출에 의지하며, 무엇보다 이런 천연 자원들을 통해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 P118
1991년 말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우크라이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 국가로서 독립하게 되었다. 이제 우크라이나는 더 이상 지리적 개념에 불과한 지역이나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는 한 지역도, 또 변경 지대도 아니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당시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보유했던 1,900여 개의 핵탄두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 태생부터가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 3위의 핵무기 군사대국이었다. 하지만 1994년 이른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Budapest Memorandum)가 만들어지면서 우크라이나는 갖고 있던 핵무기 모두를 러시아에게 넘겼고 그 대신 러시아와 영국, 그리고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현재 국경‘을 ‘존중 및 인정‘ 하기로 약속한다. - P130
천연가스와 가스관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하나로 이어줌과 동시에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 들여오는 천연가스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에너지 자원이며 경제와 산업을 뒷받침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에 더해 서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천연가스관이 자국 영토를 지나가게끔 해주며 받는 수수료 명목의 관세 역시 우크라이나 정부의 주요한 수입원이다. 그렇지만 러시아 역시 이런 입장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유럽은 가즈프롬에게 있어 천연가스의 주요 시장인 만큼 그 통로를 안전하게확보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시 말해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의사정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2005년 말 기준 서유럽으로 수출되는 러시아의 천연가스 중 80퍼센트가 우크라이나 가스관을 지나갔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같은 연방 소속이고 또 ‘형제 국가‘로서 가스관을 서로 연결해 사용하던 시절이라면 이런 관계에는 당연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과거의 소비에트 연방은 사라졌고 상황도 크게 달라졌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이제 더 이상 형제국가가 아닌 것이다. - P132
유럽연합의 에너지 정책은 또한 한 번 맺은 계약이 20년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거나 유가와 연동해 천연가스 가격을 정하는 오래된 계약방식을 폐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유럽의천연가스 거래는 이렇듯 장기적 예측 가능성 및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장기 계약을 통해 이루어져왔지만 이제 유럽연합은 투명성과 경쟁을새로운 원칙으로 내세운 것이다. 필요한 건 ‘관계‘가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로 이루어진 세상인 ‘시장‘ 이었다. 그렇다 해서 장기 계약을 반드시 피하자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시장 원리에 따라 가격이 움직이길바랐던 것뿐이었다. 결국 이상적인 방법은 천연가스관과 LNG 수송 시설, 그리고 거래소가 한곳에 모여 있는 영국과 네덜란드 등 주요 거래 거점을 중심으로단기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유럽연합은 또한 ‘반경쟁적 행위‘로 정의될 만한 일들을 막기 위해 가즈프롬이 자사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운반하는 가스관들을 소유하지 못하게끔 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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