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진화에 가장 구체적인 작업가설을 제공한 것은 흥미롭게도 ‘기생충 또는 병원균-숙주 공진화 가설‘이다. 대부분의 기생 생물들은 세대가 짧고 무성 생식을 하기 때문에 매우 빠른 속도로 새로운 ‘공격 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 유성 생식을 하는 숙주 생물이 이에 맞서는 방법으로 진화한 것이 바로 성이라는 설명이 포괄 적합도 이론inclusive fitness theory으로 우리에게 유전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있게 해 준 윌리엄 해밀턴의 이른바 ‘기생충 가설 parasite hypothesis‘의핵심이다. 유전자 재조합을 통해 유전적으로 다양한 자손을 생산하면 기생 생물의 공격 무기를 무력화할 수 있다. 어느 기생 생물이 숙주 개체군에서 가장 흔한 유전형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 공격을 견뎌내는 새로운 유전자 조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성 생식이 보다 유리한 전략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면 기생 생물은 또다시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어느 특정한 유전형을 공격하고 숙주는 새로운 면역력을 갖춘 새로운 유전형을 만들어 내곤 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일어나게 된다. 기생생물과 숙주 생물은 일종의 진화적 군비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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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생도 있었지만 여학생도 있었다. 여학생의 깨끗한 운동화와 흰 목양말과 건강한 종아리가 눈부셨다.
그 나라에도 물론 도시에는 학교도 있고, 스쿨버스까지 다니고 있는 걸 보았지만, 두 다리 외의 교통수단이 없는 고지의 농촌에서 그런 대처의 학교까지 가려면 젊은 건각으로도 두세시간은 보통이라고 한다. 남존여비가 더 많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저개발국에서 아들도 아닌 딸을 저 정도로 가꾸어 학교에 보내려면 본인의 각오도 비상해야겠지만 그 어머니의 노고는 도대체 얼마만한 것일까. 그건 엄마들이 딸에게도 꿈을가지기 시작했다는 생생한 증거였다. 나는 엄마들이 아들에게거는 기대는 한 집안의 이익과 노후대책을 바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것인 데 비해 딸에게는 이 세상을 바꾸기를 바라는 더 원대한 꿈을 건다고 믿고 있다. 내 어머니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딸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면서 귀 따갑게 하신 말씀이 ‘너는 나 같은 세상 살지 마라‘였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세상을 바꾸라는 비원이 아니고 무엇이랴.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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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이 끝나는 마지막 날 점심시간 마침내 침묵의 계율이 풀렸다. 그동안 아무도 침묵을 갑갑해하거나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그리워하지 않았건만 혀가 풀리자 식당 안은 마치 폭죽이 터진 것 같았다.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고 포옹했다. 그건 말이 아니라 침묵이 터뜨린 폭죽이었다. 침묵이 피워낸 꽃이었다. 백화난만한 꽃밭. 침묵은 결코 우리를 가두지 않았건만 우리는 해방감을 느꼈다. 만약 갇혀 있었다면 결코 그런 해방감을 못 느꼈을 것이다. 침묵이란 지친 말, 헛된 말이 뉘우치고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게 아닐까.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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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장류 중에서 인간은 일부일처제의 성향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다. 침팬지를 비롯한 다른 영장류는 번식기가 되면 암컷의 체의 생식기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면서 번식할 준비가 되었다는 걸널리 광고한다. 그러나 인간 여성은 언제 배란을 하는지 본인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아무리 남편이라도 자기 아내가 언제 배란을 하는지를 알려면 날짜를 세는 수밖에 없다. 이른바 ‘은폐된 배란concealed ovulation‘이라고 불리는 이 독특한 진화 현상이 인간으로 하여금 일부일처제를 채택하도록 만들 수 있다. 침팬지를 비롯한 다른 영장류 수컷들처럼 여러 암컷에게 관심을 보이다 보면 이리저리 배란 시기를 놓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 남성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전략은 한 여인을 선정하여 되도록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되도록 자주 잠자리를 하는 방법이다. 그래야 그 여인의 배란기에맞춰 짝짓기를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만큼 자신이 그 여인이 낳는아이의 아버지일 확률이 높아진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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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무엇인가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유연성이라는 것이다.
나는 특이점 해소에 도달할 때까지 두 번이나 본격적으로 달려들었으며 두 번 다 실패했지만, 그때마다 구태여 문제에 집착하지 않았던 것이 결과적으로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해결 방법이 차단되면 장기에서 흔히 말하는 훈수 초단(訓手初段) 식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물러섰다. 그리고 아이디어와 이름의 준비가 스스로 성숙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만일 벽에 부딪쳤을 때 계속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나는 꼼짝하지 않는 그 벽에 억눌려서 틀림없이 숨도 못 쉬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유연하게 처신한 것은 정말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유연한 자세는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도 중요하다. 성장해 가는 아이는 아주 귀여울 때가 있는가 하면 한없이 얄미울 때도 있다. 그러나 얄밉다고 해서 부모가 아이와 이별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벽에 부딪쳤을 때 내가 그랬듯이 한 발 거리를 두고 아이를 지켜 보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
창조라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다고 전에도 말했지만, 이점에서도 양자가 비슷하다. - P172

둘째는, 욕망이 창조에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내부에서 생긴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기 자신의 욕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사회 풍조라든가,
유행이라든가, 혹은 매스컴이 제공하는 정보라든가 하는 것으로 형성된 경우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 P173

셋째는, 창조는 실제 만들어 보아야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는것이다. 프랭클린의 말을 되풀이하게 되는데, 그는 어떤 것이든 창조되고 나서야 비로소 의미가 생기고 스스로 걷기 시작한다고했다.
이미 말했듯이 특이점 해소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의 그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았다. 내가 직접적으로 "쓸모없다."는 말을 들은 일도 있다.
그러나 이 정리가 만들어지자 이것으로부터 여러 가지 응용이론이 생겨났다. 나 자신이 발표한 응용도 있지만 계속해서 훌륭한 응용을 생각해 낸 사람은 다름아닌 그로센딕이다. 나의 특이점 해소 이론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가, 이 정리가 생기기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롭고 참신한 응용이론을 잇따라 발표하였던 것이다.
내가 창조한 정리가 스스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나는 프랭클린이 한 말의 참뜻을 맛보고 있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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