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이들은 ‘서로 돕는 인간을 구별·평가하는기준을 명확화하기‘와 ‘상호부조의 기준 • 규칙을 명확화하기‘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합 운영과 조합내 상호 부조 면에서, 엄밀한 기준과 약속에 의해 ‘서로 무리하거나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것‘을 되도록 회피하기를 규칙으로 삼고 있다고 보인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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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늘 "아무도 믿지 않아"라고 단언한다. 이는 ‘본성‘,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사업‘
을 몰라서 그런다기보다 누구나 처한 상황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인다. 카라마와 동료들은 "저사람은 지금 잘나가니까 돈을 빌려줘도 괜찮아", "저 사람은 지금 수입한 천연석 품질이 나빠서 크게 손해를 보고있으니까 조금 주의하는 게 좋아", "저 사람의 연인도 함께한다면 그는 좋은 녀석이니까 놀러가"라고 ‘지금‘의 상황에 한정하는 형태로만 타자를 평가한다. 언뜻 냉정하게도 보이지만 이는 일종의 관용과도 표리일체다. 즉, ‘페르소나‘와 그 뒷면에는 ‘민낯‘이 있는데 ‘민낯‘을 모르니까 신뢰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돌릴 수있는 일관된 불변의 자기自己 같은 건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세 번째 배경은 난민으로 거주하지 않는 조합원들은 유동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오가기 때문에 구성원 사이의 엄밀한 호수성을 고려/계산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점이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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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홍콩조합 집회에서 한 여성이 발언했듯이 기본적으로 이들은 조언을 요청받지 않는 이상 타자의 비즈니스와 행위에 끼어들지 않기에 그 사람의 ‘사정‘을 자신이 속속들이 알 수 없음을 이해하고 있다. 나는 연구자로서 이들의 생활사나 비즈니스에 대해 묻거나 들으면서 조사를 해왔는데, 대상자가 어떤 일을 태연히 설명해주더라도 주위사람들이 내게 "그에게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지 모르니 놔둬"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라는 조언도 받곤했다. 타자의 복잡한 사정은 알 수 없는/알고 싶지 않은 것이기에 타자의 ‘자기 책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란 어렵다.
두 번째 배경으로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인간관 · 주체관이 있다. 어디까지가 ‘자기 책임‘이고 어디부터가 ‘불운‘의 영역인지를 묻는 것은 원래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 이들은 애초에 개별적인 실천 · 행위의 귀결을 타인에 대한 인물 평가 -‘노력이 부족하다‘, ‘생각이 안이하다‘,
‘별로 착하지 않다‘ 등 - 와 연결 지어 말하는 것 자체를거의 하지 않는다. 물론 사정을 아는 개개인에게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사태가 되어 안타깝다고 말하긴 하지만, 완전히 당사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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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조합원들의 조합 활동 공헌도에도 차이가 있다. 탄자니아 홍콩조합의 조합원들은 ‘법‘을 다소간 위반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마약을 판매하거나 절도와 성매매를 병행하는 사람인지 중개업을 하거나 의류, 전자제품등의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인지에 따라 ‘교도소와의 거리‘, 또는 일어나는 문제의 성격이나 빈도에 차이가 있다.
한편 종교적인 신앙 때문인지, 개인의 신조인지, 아니면냉정하게 위험 부담을 계산해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밀수는 하지만 마약에는 손대지 않는다‘, ‘성매매를 하지만절도는 하지 않는다‘라고 굳게 결심한 사람도 많다. 이들은 ‘범죄‘에 손을 댄 동포를 부정/거부하지는 않는다. 범죄로 벌어들인 큰돈을 펑펑 쓰는 화려한 파티에 초대받으면 역시 좋아하면서 참가한다. 하지만 내가 짊어지지않기로 한, 타자의 리스크를 지게 된다.
호수성을 기반으로 조합이 운영된다고 가정했을 때,
조합 활동에 공헌하지 않는 사람도 지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험도가 높은 범죄 행위에 손댄 동료가 어려움에빠졌다고 도울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자업자득 아닌가?
카라마를 비롯한 조합원들과 생활하다 보면 조합 활동에 대한 실질적인 공헌도, 특정한 어려움, 궁지에 빠지게 된 ‘원인‘을 거의 불문하고, 마침 홍콩에 있는 그 타자가 처한 상황(결과)에만 응답하여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지원해주는 태도가 폭넓게 관찰된다. 이는 죽음이라는 특별한 사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또한 조합 활동과 타자에 대한 세세한 규칙이나 규범을 가능한 한 만들지 않는다/애매한 채로 둔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얘기한 사례가 보여주듯이 이들의 집회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데, 최종적으로는 ‘여러 사정이 있으니 세세하게 따지지 말자‘는 결론에 도달한다 - 무임승차자 문제도, 기부금을 상황에 따라 달리 받자는 제안도 다시 문제삼지 않았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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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칠층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로자 아줌마는 육중한 몸뚱이를 오로지 두 다리로 지탱하여 매일 칠층까지 오르내려야 했다. 그녀는 유태인이라서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불평할 처지가 못되지만, 그래도 칠층을 오르내리는 일만은 정말 힘에 부친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그녀는 다른 일들로 심신이 괴로운데다가 건강도 별로 좋지 않았다. 또하나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그녀가 엘리베이터 하나쯤은 갖추어진 아파트에서 살 만한 자격이 있는 여자라는 점이다. - P9

"그것이 이 아이의 첫 발작인가요?" 
로자 아줌마는 대답을 못 하고 나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슬펐다. 나는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철학자다. 카츠 선생님의 뒤쪽 벽난로 위에는 새하얀 돛이 여럿 달린 돛배가 한 척 놓여 있었다. 나는 불행했기 때문에 다른 곳, 아주 먼 곳, 그래서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그런곳으로 가버리고 싶었다. 나는 그 배를 허공에 띄워 몸을 싣고는 대양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도, 카츠 선생님의 돛배에 올라탄 채 난생 처음 먼 곳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때 그 순간, 비로소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지금도 원하기만 하면 나는 카츠 선생님의 돛배에 올라타고 혼자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아무에게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다.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그냥 얌전히 그 자리에 있는 척했다. - P33

로자 아줌마는 그 문으로 들어갔다. 불빛은 그곳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한복판에 밑이 푹 꺼지고 다리도 다 망가진, 더럽기 그지없는 붉은색 소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줌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사방 벽은 이빨처럼 돌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어서 마치허리가 끊어질 듯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랍장위에는 가지가 여러 개 달린 유태식 촛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침대였다. 당장 버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낡아빠진 고물침대에 매트리스와 이불, 베개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또 감자자루가 몇 개 있었고, 버너 하나, 양철통들, 그리고 정어리 깡통이 잔뜩 든 상자가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이제 겁도 나지 않았다. 다만, 아랫도리를 벗고 있었기 때문에 추워지기 시작했다.
로자 아줌마는 그 낡은 소파에 한참을 앉아 있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교활한, 심지어는 정복자 같은 미소였다. 마치, 아주 치밀하면서도 대단히 힘든 일을 해낸 사람 같았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한쪽 구석에 있는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기시작했다. 그것은 할 짓이 못 되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고, 그녀의 천식에 먼지처럼 나쁜 건 없었으니까. 금세 호흡곤란을 일으켰는지 그녀의 목에서 쌕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그녀는계속해서 비질을 했다. 말릴 사람은 나뿐이었다. 세상 사람들은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까. 물론 나를 돌봐주는대가로 누군가가 돈을 지불하고 있긴 했지만, 로자 아줌마와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둘 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는••••••  아무튼 천식에 먼지만큼 해로운 것은 없었다. 한참후 그녀는 빗자루를 놓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 촛불을 끄려 했다. 그러나 그 뚱뚱한 몸에는 촛불 하나 끌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촛불을 껐다. 나는 재빨리 그곳을빠져나왔다. 할 일을 마쳤으니 이제 그녀가 다시 위로 올라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더 늘었다는 사실 외에는 로자 아줌마는 왜 한밤중에 지하실까지 기어내려가 먼지를 풀썩이며 비질을 하고 교활한 표정으로 그곳에 앉아 있어야 했을까.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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