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공주, 양키 갈보. 서양 공주. 미군 색시. 양갈보. 양색시. 미군 노리개. UN 숙녀. 술집 여자. 유흥업소 여자, 위안부, 신세망친 여자. 위안부였던 여자. 한때 위안부라고 불렸던 여자. 위안부의 딸. 기지촌 매춘부. 군인 신부.
니콜라 아브라함과 마리아 토록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종종 한 가족 전체의 역사를 지배하는 단어들" "유령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언급 불가능한 단어들이다.‘ 문자 그대로
‘서양공주‘를 의미하는 양공주는 미국인과 성적인 관계를맺는 한국 여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대개의 경우 이는미군을 상대하는 매춘 여성을 일컫는 멸칭으로 사용된다.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특정한 역사적·정치적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해왔다. 너무 많은 의미로 가득한이 단어는 그와 동시에 한인 디아스포라에게는 발화할 수 없는 ‘유령 같은phantomogenic 단어다." 수치심과 비밀을 통해 유령을 길러내는 그 과정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안에서 양공주를 중심적이면서도 동시에 예속적인 상태로 만들었다.
미군에게 성노동을 제공하는 여성은 반도의 한국인들에게 혐오와 욕망을 자아내는 과잉 가시적인 대상인 동시에 한인 디아스포라의 집단 정서 안에 감춰진 그늘진 인물이다. 미군기지 근처의 술집에서 일하는 이 서구화된 여성은 공식적으로는 한국과 미국 정부 모두에게 멸시당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미군에게 휴식과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한국 경제에는 달러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격려받는다. 그들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묶어둠으로써 자국을 위해 봉사하는 애국자인 동시에 반미정치의 화염에 기름을 끼얹는 미 제국주의의 비극적인 피해자다. 이 여성들은 한국의 예속 상태에 공모한다는 이유로 동포들의 증오를 자아내는 동시에 아메리칸 드림의 손길이 닿는곳에 있다는 이유로 동포들의 질투를 유발한다. 그들은 자신을 피하는 바로 그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노동하는 착실한 딸이자, 가족의 희망찬 미래를 짊어진 군인의 아내이며, 자신의 과거를 자식들에게 숨기며 자식을 보호하려는 어머니이다.
그들은 미군을 상대로 매춘 일을 했던 100만여 한인 여성의, 그리고 미군과 결혼한 10만여 한인 여성의 상징이다. 그들은 이처럼 실재하는 한인 여성의 상징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집단트라우마와 판타지에 겹겹이 둘러싸여 탄생한 인물이다. 결혼을 통해서든 매춘을 통해서든, 미국인에게 성노동을 제공하는 한인 여성은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삭제된 유령 같은 인물로 출현한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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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법원은 한국 정부가 미군의 포주 역할을하며 여성들을 성병 ‘치료 시설‘에 가두고 강제로 고용량의페니실린을 주사하여 때로는 쇼크,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게함으로써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주장한 전직 기지촌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성들은 짐승처럼 수용되었고소위 치료를 받고 나면 두 팔이 원숭이처럼 옆으로 늘어졌기때문에 이 장소는 사람들 사이에서 ‘몽키 하우스‘라는 이름으로통했다. 2024년 여름, 활동가들은 한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몽키하우스‘를 한미 동맹이라는 미명하에 학대당한 여성들을 기리는기념물로 보존하기 위해 동두천에서 천막 농성에 들어갔다. 나는 천막농성이 78일째 되던 날과 313일째 되던 날 그곳을방문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을 기준으로 활동가들은 343일째 최전선에서 몸을 던지고 있다. 이는 한국전쟁과 그후과가 20~30년 전만큼이나 오늘날에도 건재함을 상기시킨다.
트라우마로 얼룩진 자신들의 역사를 용기 있게 이야기한 옛기지촌 여성들에게, 동두천의 활동가들에게, 그리고 배회당하는 우리의 과거를 기리기 위해 연대하는 모든 공동체에 이 책을 바친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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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2023년 말 도서출판 동녘이 이 책을 한국어로 출간하는데 관심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이 책이 출간된 건 15년 전이었고, 내가 사회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이 책의 모태가 된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한건 25년 전인 시점이었다. 25년이 흐르는 동안 많은 변화가있었을 텐데 한국에서 이 책이 여전히 유의미할까 싶었다. - P9

나는 새로운 서사 쓰기라는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건 절대적인 진실이라기보다는 불확실하지만 진실에 가까운역사다. 고통스럽고 추잡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감추기보다는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불확실성 속에는 모든 버전의 과거가 현재 속에 살아 있게 하는, 그리하여 다른 종류의 진실에 가까운역사-침묵당한 자들이 목소리를 찾고 지워진 자들이 가시성을획득하게 되는 역사로 이어지는 급진적인 개방성이 있다. 우리가 인정하는 인정하지 않든, 사회 세계 social world는 유령에의해 세대를 가로질러 대물림되는 말해지지 않은 강력한 기억을통해 움직임을 얻는다.
내가 대학원생이던 시절 주류 사회학자들은 "경험적 근거가 전무하다"며 내 프로젝트를 일축했지만, 그로부터수십 년이 흘러 과학자들은 후성유전학 연구를 통해 트라우마는 우리의 DNA 안에 부호화되어 있다는 말로 내 주장을 뒷받침했다. 우리의 몸은 부모와 조부모들이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물려받는다. 과거는 물질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빚어낸다. 대학원생 시절 나는 가족의 트라우마가 정확히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트라우마가 내 몸의 모든 세포속에 살아 있다는 것은 확신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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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작고 예쁜 풍경 속으로 걸어가 그의 아내와 아기의 곁에 앉았다. 아기가 무언가를 붙잡으려 허공에 팔을 뻗어 휘두르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뭐가 재밌니. 응?" 하고 덩달아 웃었다. 그는 어떤 것들은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담대해졌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는 촛불을끄고 어둠 속에서 손뼉을 쳤다. - P107

그리고 서울 동북부의 한 중학교로부터 서로를 기억하는 두사람이 있다.
교문에 들어서서 걷는 길에는 흰 꽃이 피는 나무들이 있었다. 나무의 이름은 몰랐으나 때가 되면 바람에 흩날리는 희고 풍성한 꽃잎들은 기억에 남았다. 그런 따뜻한 봄날의 오후였다. 두 사람은 교무실에 나란히 섰다. 3학년이 되어 처음 같은 반에 배정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담임교사는 두 사람에게 각자의 이름이 적힌 흰 봉투를 줬다. 그 교사는 세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행정실에서 준 건데 뭔지는 나도 몰라. 부모님께 그대로 전해드려."
대개의 애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런 봉투를 받을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매년 한두 번은 받았다. 보통은 담임으로부터 은밀하게 일대일로, "요즘 학교생활 어떠니" 같은 부담스러운 친절과 함께 전해지는 봉투였다. 늘 밀봉되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떤 것이 들어 있을지 잘 알았다. 대개는 내야 할 어떤 돈을 내지 않았다는 안내문이었다.
그날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그 교무실에서 한 번은 눈이 마주쳤다는 기억.
‘너도 봉투 받는 애구나.‘
여자애라거나 남자애라거나, 귀엽다거나 못생겼다거나, 공부를 잘한다거나 못한다거나 이전에 권진주와 김니콜라이는서로를 그렇게 알아봤다. 그리고 교무실 창밖의 햇살. 창문 너머에서 빗자루로 꽃잎을 쓸던 애들이 저희끼리 장난을 치며웃는 소리. 담임이 회전의자를 빙글 돌리며 덧붙인 말.
"둘이 친하게 지내."
가나다순에 따라 앞뒤로 앉을 때가 많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친해지지 않았다. - P113

진주는 여전히 마트를 걸으며 다른 사람이 주문한 물건들을담았다.
라면 다섯 봉지와 계란 여섯 알, 조미김 한 팩과 인스턴트건조 미역국을 주문하는 사람. 그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비싼 캐나다산 개 사료를 한 번에 다섯 봉지씩 주문하는 사람. 오만이천원짜리 스페인산 올리브유 아홉 병을 한 번에 사는사람은 무엇을 요리해서 먹는지, 십삼만구천원짜리 이탈리아산 소가죽 벨트를 쏜살배송으로 주문하는 사람의 생활은 어떤지 궁금했다. 진주 자신도 즉석밥이나 생수 따위를 종종 주문했는데, 그 점에 비춰보면 그들도 단지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일 거라고, 그래서 자기가 시급을 받고 시간을 팔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들은 아낀 시간으로 무엇을 할까. 마트에와서 물건을 담는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고 오직 그 물건들이주는 행복의 알맹이만을 누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 물건들을 사기 위해 자기처럼 또다른 누군가에게 시간을 팔고 있을까. - P127

침대에 누워서가 아니라 일어서서 안은 건 처음이었다. 낯설고 새롭고 따뜻했다. 두 사람은 오래 미뤄둔 질문을 떠올렸다.
때로는 시시하고 때로는 끔찍했으며 결국에는 죄다 망해버린 연애들이 있었다. 초라하게 사라진 나라들조차 폐허 어딘가에는 영광을 남기는 것처럼 그 연애들에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은 있었다. 연애가 망하더라도 사랑은 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어차피 첫 단추부터 이상했으니까.
차라리 이것은...... 딩동. 음식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렸다. 두 사람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
그 말은 두 사람만의 농담이 되었다. 즉석밥과 계란, 반창고와 감기약, 섬유유연제와 블루투스 스피커 등을 ‘친한 사이‘ 해버렸고, ‘도망가면 안 친한 사이‘라며 대청소 날을 정해 손가락을 걸었다. 니콜라이는 누구도 근황을 모르는 앙맨에게 ‘맥주 가즈아아앙‘으로 끝나는 메시지를 남겼고, 진주는 일년 넘게 업데이트가 없는 힝구의 채널에 ‘힝구야 안녕‘으로 시작하는 댓글을 달았다. 둘 다 답장은 받지 못했지만 ‘좋은 친한사이 시도였다며 서로 칭찬했다. 공장과 마트 입구에서 붉은 조끼를 입은 아주머니 아저씨가 나누어주는 전단지를 받아와 함께 읽다가 사전을 검색했다. 정전을 계기로 앞집 부부와 배드민턴을 쳤다. 부부가 대접한 더운 나라의 음식이 입에 맞진 않았지만 접시를 비웠고, 그 집 꼬마가 리코더 연주를 뽐냈을 때 박수를 쳤다. 집에 돌아와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버림‘이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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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하트의 재판이 5월 말에 시작되자 화이트는 자신의 위기가 한층 더 깊어졌음을 깨달았다. 헤일이 증언대에 서서, 화이트와 스미스 등 수사팀이 심문 중에 자신에게서 억지로 자백을 얻어내려고잔혹하게 굴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헤일은 수사팀이 사람들의 입을 여는 여러 방법을 알고 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고 증언했다. "저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뒤에서 권총의 공이치기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 스미스가 맞은편에서 확 달려들어제 한쪽 어깨를 붙잡고 얼굴에 커다란 권충을 들이댔습니다.
헤일은 스미스가 뇌가 곤죽이 될 때까지 패주겠다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화이트가 자신에게 했다는 말도 증언했다. "당신을 전기의자에 앉혀야겠군." 이 말이 끝난 뒤 요원들이 그를 특수한 의자에 밀어서 앉히고, 몸에 전선을 연결하고, 머리에 검은 두건을 씌우고, 얼굴에는 포수의 마스크 같은 도구를 씌웠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계속 제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면서, 전기충격 이야기를 하더니 정말로 전기충격을 주었습니다." 헤일이 말했다.
버크하트와 램지도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순전히 그 때문에 자백했다는 것이었다. 헤일은 증언대에서 손짓을 크게 하면서, 전기충격으로 몸이 펄쩍 뛰던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또한 요원 한 명이 허공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으면서 이렇게소리쳤다고 말했다. "사람살이 타는 냄새가 나지 않아?" - P291

판사와 검사와 변호인이 배심원들에게 한 번도 묻지 않았지만 재판 진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질문이 하나 있었다. 백인 남성 열두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미국 인디언을 죽인 백인 남성에게 벌을줄 것인가? 한 기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개척지의 목부들이 순혈 인디언을 대하는 태도는 (...) 상당히 잘 알려져 있다. 오세이지 부족의 한 유력인사는 이보다 노골적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배심원단이 이번 사건을 살인사건으로 생각하는지 아닌지가문제다. 그들은 백인이 오세이지족 인디언을 죽인 사건이 살인인지, 아니면 단순히 동물학대 행위인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 - P304

모두들 숨을 죽인 가운데 몰리는 계속 지켜보았다. 이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겨우 여드레 동안 증언을 들은 뒤, 양측 모두 휴식을 취했다. 검사 한 명이 최종논고에서 다음과 같이말했다. "이제 여러분이 법과 질서와 품위를 지켜 왕의 왕관을 벗겨낼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은 용기 있고 품위 있는 사람으로서, 저들을 교수형에 처한다는 평결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재판관은 배심원들에게 양측에 대한 동정이나 편견을 반드시 잊어버려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 지구상의 모든 나라는 어떤 지점에 도달했을 때 멸망했습니다. (...) 시민들이 ‘법정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말할 때가 바로 그 지점입니다." 재판관이 배심원들에게 경고했다. 10월 28일 저녁부터 배심원들은 협의에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배심원들이 벌써 결정을 내렸다는 소문이 퍼졌고, 친숙한 얼굴들이 법정을 채웠다.
재판관이 배심장에게 평결이 내려졌느냐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배심장은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종이 한 장을 재판관에게 건넸다. 재판관은 잠시 그것을 본 뒤 서기에게 넘겼다. 법정 안이 어찌나 조용한지 벽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나중에 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헤일의 얼굴에는 조심스러운 열망이 드러났고, 램지의 얼굴은 가면 같았다. 서기는 고요한 방청석 앞에 서서 배심원들이 존 램지와 윌리엄 K. 헤일의 일급살인 혐의에 대해 유죄평결을 내렸다는 종이의 내용을 소리 내어 읽었다.
헤일과 램지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재판관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배심원들이 오세이지족 인디언의 살해혐의에 대해 유죄평결을 내렸습니다. 헤일 씨, 램지 씨. 따라서 선고를 내리는 것이 나의 의무입니다. 법에 따라 배심원들은 유죄를 인정했고, 일급살인의 경우 사형이 선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 배심원들은 종신형으로 형량을 제한했습니다. 배심원들은 미국 인디언을 죽인두 남자를 기꺼이 처벌할 생각이었지만, 교수형까지는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재판관은 헤일과 램지에게 말했다. "앞으로 나와서 서세요." 헤일은 재빨리 일어섰고, 램지는 머뭇거렸다. 재판관은 두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징역을 선고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질문을 던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헤일 씨?"
헤일은 텅 빈 눈으로 똑바로 앞만 바라보았다. "없습니다."
"램지 씨는 있습니까?"
램지는 고개만 저었다. - P311

후버에게 오세이지 살인사건 수사는 현대적인 수사국을 선전해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가 바란 대로, 이 사건은 전문적이고 과학적이며 전국을 무대로 하는 수사기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많은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는 이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보안관들은 수사했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클라호마주의 검사들이 수사했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법무부 장관이 수사했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정부가 법무부 소속 요원들을 오세이지족의 땅으로 보냈을 때에야 비로소 법이 위엄을 얻었다. 후버는 수사국이 처음에 저지른 실수들이 드러나지 않게 신중을 기했다. 블래키 톰슨이 수사국의 감시를 받다가 탈옥해서 경찰관을 죽인 일, 처음에 방향을 잘못 잡고 헤맨 적이 너무 많아서 계속 살인사건이 발생한 사실 등을 밝히지 않았다. 그 대신 후버는 깨끗한 창조설화를 만들어냈다. 이 신화 속에서 수사국은 그의 지휘를 받아 무법적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마지막으로 남은 거친 변경지대를 제압했다. 새로운 홍보방법들을 이용하면 관료로서 자신의 힘을 더욱 키우고 개인숭배를 주입할 수 있음을 깨달은 후버는 화이트에게 언론에 공개할 수 있는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아시다시피, 법적인 측면과 인간적으로 관심이 가는 측면은 서로 다릅니다. 언론의 대표자들은 인간적으로 관심이 가는 측면에 관심을 보일 터이니, 그런 부분을 강조해주기 바랍니다." - P314

후버는 헤일 일당을 잡은 화이트의 수사팀을 은밀히 칭찬하며 봉급을 조금 인상해주었다("그들의 능력과 근면함을 조금이라도 인정해주기 위한 소소한 보상). 하지만 이 사건을 홍보에 이용할 때는 수사를맡은 요원들의 이름을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후버의 신화 중 일부가 된 대학 출신 신참 요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후버는 부하들이 자신을 가릴 정도로 커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오세이지 부족위원회는 비밀요원들까지 포함해서 화이트의 수사팀 전원을 공개적으로 지목하며 찬사를 보낸 유일한 단체였다. 부족위원회는 결의안에서 수사팀 전원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혐의를 받는 자들을 수사해서 그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오세이지족은 또한 앞으로 또 다른 음모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서 의회를 설득해 새로운 법을 제정하게 했다. 오세이지족의 피가 적어도 절반 이상 섞이지 않은 사람은 균등 수익권을 부족원으로부터 상속받지 못한다고 규정한 법이었다. - P316

화이트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수사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교도소장이 된다면 봉급이 올라갈 뿐 아니라, 아내와 어린 아들들이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었다. 또한 아버지에 비해 규모가 훨씬크기는 해도, 어쨌든 아버지처럼 감옥을 관장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1926년 11월 17일, 화이트가 아직 새로운 일자리에 적응 중일때, 연방보안관들이 새로운 죄수 두 명을 차에 태워 말굽 모양의 진입로로 들어왔다. 죄수들은 자기들의 이 우울한 종착지를 둘러보았다. 리븐워스는 3만 4,000제곱미터 규모의 요새였다. 예전에 한 죄수는 옥수수밭 가운데에 서 있는 이 건물이 "넓고 넓은 무無의 바다를 떠다니는 거대한 영묘" 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화이트는 족쇄를 차고 입구로 다가오는 두 죄수에게 걸어갔다. 둘 다 햇빛을 보지 못해서 얼굴이 창백했지만 화이트는 그들을 알아보았다. 헤일과 램지였다.
"이런, 안녕하시오, 톰." 헤일이 화이트에게 말했다. 
"안녕하시오, 빌." 화이트가 대답했다.
램지도 화이트에게 말했다. "안녕하슈."
두 사람은 화이트와 악수를 나눈 뒤, 교도관들에게 이끌려 각자 감방으로 향했다. - P317

한편 오세이지 카운티의 사람들은 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 헤일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몰리버크하트는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성당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백인과 크리크족의 피가 섞인 존 콥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친척들은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1928년에 결혼했다.
몰리의 인생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녀와 오세이지족은 부패한 후견인 제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줄곧 투쟁한 끝에 1931년 4월 21일 법원으로부터 몰리가 더 이상 주정부의 피후견인이 아니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법원은 또한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판결한다. 오세이지 분할 토지 285번 소유주인 상기 몰리버크하트는 (…) 이로써 법적인 능력을 회복할 것이며, 따라서 그녀에게 법적인 능력이 없다고 판결한 명령은 철회된다. ‘‘몰리는 마흔네 살에야 비로소 자신의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온전한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 P323

오세이지 살인사건 수사가 J. 에드거 후버에게 수사국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였다면, 1930년대에 엄청난 화제가 되었던 일련의 범죄들은 사람들의 두려움에 불을 지펴서 후버가 수사국을 오늘날과같은 강력한 기관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 찰스 린드버그의 아이가 납치된 사건, 앨 스펜서 갱단의 조직원인 프랭크 ‘젤리‘ 내시를 이송하던 중에 충격이 벌어져 여러 경찰관이 목숨을 잃은 캔자스시티 학살극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화이트의 옛 동료인프랭크 스미스 요원도 내시의 호송대에 속해 있었지만 살아남았다. (언론인인 로버트 엉거는 스미스 요원과 또 다른 요원이 처음에는 총을 쏜 범인들이 누군지 모른다고 주장하다가, 사건을 해결하라는 후배의 압력을 받은뒤 갑자기 생생하게 기억을 되살리게 된 경위를 나중에 기록으로 남겼다. 이런 사건의 여파로 의회는 일련의 개혁 법안들을 통과시켜, 연방정부에 처음으로 포괄적인 형사법을 안겨주었으며, 수사국에도 관할구역을 광범위하게 인정해주었다. 요원들이 범인을 체포하는 것도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것도 가능해졌다. 수사국의 이름 또한 곧 연방수사국 FBI으로 바뀌었다. "작은 수사국의 시대가 끝났다." 후버의 전기를 쓴 커트 젠트리는 이렇게 썼다. "특수요원들이 단순히 수사만 하던 시절 또한 끝났다.  화이트의 동생인 박사는 이 기간중에 수사국이 다룬 최대의 사건들 중 존 딜린저 같은 공공의 적을추적하는 임무에서부터 마 바커와 그녀의 아들 프레드가 목숨을 잃은 총격사건(마 바커는 네 아들이 모두 범죄자가 되었으며, 본인도 사악한범죄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녀를 개인적으로 알던 사람들은 FBI와의 충격전에서 그녀가 목숨을 잃은 것을 무마하기 위해 후버가 그녀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옮긴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에 관련되어 있었다. 톰 화이트의 아들도 수사국에 입사해, 화이트 집안 3대가 치안관이 되었다. - P328

후버는 곧 수사국과 동의어가 되었다. 대통령이 몇 번이나 바뀌었어도 그는 예전과 달리 허리가 굵어지고 불도그처럼 턱살이 늘어진 모습으로 계속 자리를 지켰다. "시선을 들어 보니 저 멀리 높고 조용한 발코니에 J. 에드거 후버가 있었다. 그는 대통령이 바뀌어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그의 안개 왕국을 등 뒤에 두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잡지 <라이프>의 기자가 쓴 글이다. 후버의 권력남용 실태는 1972년에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밝혀졌다. 화이트는 눈치가 빠른 편인데도 보스의 과대망상증, 수사국의 정치화, 그가 공공의 적으로 점찍은 사람들에 대한 편집증 환자 같은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점점 늘어나기만하던 후버의 공공의 적 명단에는 미국 인디언 활동가들도 포함되었다. - P330

해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할 무렵, 잠시 휴식시간이 있었다. 마지는 그레이호스를 내게 구경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그녀의차에 올랐다. 그녀는 흙먼지가 날리는 좁은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정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제 그레이호스에 몇 채 남지 않은주택 중 한 채가 검은 떡갈나무 사이에 거의 숨겨져 있었다. "여기가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이에요." 마지가 말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작고 검소한 목조주택이었다. 저택이라기보다는 오두막에 더 가까웠다. 그렇지 않아도 후견인들과 도둑들 때문에 줄어들고 있던재산을 대공황으로 완전히 잃어버린 오세이지족이 많았다. 마지는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경제가 호황일 때 배럴당 3달러넘게 올랐던 석유 값이 1931년에는 65센트로 곤두박질쳤다. 따라서 오세이지족 인디언 한 사람에게 매년 지급되는 액수도 800달러이하로 떨어졌다. 그다음 해에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석유로일군 오세이지의 재산이 사라지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인디언들은 화려하고 편안한 생활에 익숙하다. 하지만 지금은 (…) 석유로 들어오는 수입이 급속히사라지고 있는데, 그들의 재산은 사실상 그것이 전부다." 설상가상으로 유전에 매장돼 있던 석유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했다. 1929년, 아직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전에 한 전국지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 석유 매장량 지도가 계속 이렇게 바뀐다면, 앞으로 5년 뒤 오세이지족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 P354

그녀가 다시 차를 몰고 중앙대로에서 방향을 꺾어 작은 주택가로들어섰다. 옛날 저택들이 아직 몇 채 남아 있었지만, 폐가가 되어 허물어지는 중이었다. 덩굴에 완전히 갇혀버린 집들도 있었다. 마지가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속도를 늦췄다.
"뭘 찾아?" 그녀의 남편이 물었다.
"그 집이 폭파된 곳."
"그건 저쪽 길 아니야?"
"아냐, 그건... 아, 여기다." 마지가 차를 세우며 말했다. 폭파사건이 있은 뒤로 새로 지은 집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마지가 FBI의 기록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폭파사건이 있던 날 밤, 그녀의 아버지와 고모와 몰리가 스미스의 집에서 밤을 보낼 계획이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우보이의 귀가 심하게 아파와서 그들은 그냥 집에 있었다. "그래서 그 세 사람은 무사할 수 있었어요. 운명이죠." 마지가 말했다. 나는 한순간 멈칫한 뒤에야 이 말의 의미를제대로 이해했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평생 알고 있었어요." 마지가 말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한동안 차 안에 앉아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고 애써보았다. 마침내 마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자, 이제 다시 춤을 보러 갈까요?" - P360

루이스의 살인사건을 기록한 이 원고를 다 읽은 뒤 내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녀가 석유가 매장된 땅에대한 균등 수익권 때문에 1918년에 살해되었다는 것. 대부분의 역사기록에 따르면, 오세이지족의 공포시대는 헤일이 애나 브라운을살해한 1921년 봄에 시작해서 헤일이 체포된 1926년 1월에 끝났다. 하지만 루이스의 살인사건은 석유의 수익금을 노린 살인사건이 그보다 적어도 3년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레드 콘의 할아버지가 1931년에 정말로 독살된 것이라면, 헤일이 체포된 뒤에도 살인이 계속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사건들은 석유 수익금을 노리고 오세이지족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 사람이 헤일뿐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헤일이 가장 오랫동안 가장 잔혹하게 피해자들을 살해한 인물일 수는 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살인사건들이 존재했다. 그 사건들은 공식적인 추정치에 포함되지도 않았으며, 몰리 버크하트의 살해된 가족들이나 루이스의 경우처럼 조사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중 일부는 아예 살인사건으로 분류되지도 않았다. - P392

웹이 정면 포치까지 나를 배웅해주었다. 저물녘이라서 하늘가장자리가 이미 어두웠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도시 풍경 너머의초원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이 땅에는 피가 가득해요." 웹이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했다. 떡갈나무 이파리들이 바람 속에서 계속 바스락거렸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뒤, 하느님이 카인에게 했던 말을 웹이 되풀이했다.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다."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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