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세대적인 배회transgenerational haunting‘에 관한 아브라함과 토록의 연구가 시사하듯, 발화 불가능한 트라우마는 그것을 처음 경험한 사람과 함께 사멸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것은 자체적인 생명력을 얻어서 비밀이 감춰진 그 장소에 출현한다. "되돌아와 배회하는 유령은 타인 안에 매장된 망자의 존재를 증언한다." 한국 위안부들이 성 노예로 살았던 자신의 과거에관해 침묵을 유지하려고 애쓴 그 50년 동안 그들의 비밀은 이미 그다음 세대로 전달되었고, 이 가운데 일부는 똑같은 성적예속의 길을 따르게 된다(또는 그에 이끌린다). 일부 연구는 초기세대의 기지촌 성노동자들이 강요된 성노동을 했던 다른 가족의 역사에 관한 비밀을 물려받은 위안부의 딸들임을 시사한다. 위안부는 양공주의 유령이다. - P30
디아스포라의 조건 한국전쟁 생존자와 그 자녀들이 참여한 램지 림 Ramsay Liem의획기적인 구술사 프로젝트 <어제 안에 오늘>은 아동기와 초기청년기에 직접 전쟁을 경험한 1세대에게 전쟁의 기억은 여전히 너무나도 생생하지만, 미국에서 살아가는 내내 그 기억을 침묵속에 묻어두었다는 것을 드러냈다. 하지만 부모가 이야기를들려주지도 않고 한국전쟁에 관한 공적인 담론 역시 부재한 상황하에 미국에서 자라난 2세대들은 그들이 어떤 불분명한존재감에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자신들의 평범해 보이는 일상생활에 또렷한 각인을 남겼다고 입을 모았다. 한 남성은 부모가 인생 경험을 이야기하기를 거부한 탓에 부모의 과거가 자신의 현재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그는 말했다. "나에게 그건 과거가 아니었어요. 그게 내 삶 속으로 밀려 들어오거든요. 그게 내 누이들의 삶 속으로 (...) 구멍처럼 밀려 들어와요." 한국전쟁 생존자들의 자녀가 말하는 이런 경험- "불운한바람" "구멍, 또는 어떤 손에 잡히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힘의 형태를 하고 있는 침묵이 배회하는 것 같은-은 해소되지않은 트라우마가 무의식을 통해 한 세대에서 그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개념을 뒷받침한다. 초세대적인 배회에 관한 아브라함과 토록의 이론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성인 자녀, 그리고 집단 차원에서 트라우마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는 여러사람들을 대상으로 1960년대에 실시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이들의 내담자들이 가족 내의 침묵에 집착하거나 직접적으로 경험한 적 없는 트라우마를 터트리는 모습은 그들 주위에 타인들의 무의식이 배회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여기서 짚고넘어가야 할 부분은 그 배회의 효과는 원래의 트라우마가아니라 그것이 감춰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생성된다는점이다. 비밀은 가족의 역사에 관한 의식적인 앎의 틈 안에서 유령으로 몸을 바꾼다. - P36
전쟁은 민간인들에게 어쩔 수 없는 이주의 조건이 되었을뿐만 아니라, 미군과 한인 여성이 갈수록 빈번하게 성적 만남을가질 조건을 낳았고, 이 가운데 일부는 1945년의 전쟁신부법 WarBrides Act에 힘입어 결혼과 미국 이민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이런 만남의 동기는 단순히 개인의 욕망과 로맨스에 있지만은 않았다. 그런 만남 속에는 미군 지배라는 권력의 역학, 전쟁의 물질적인 파괴, 그리고 한국 안에서 미국이 자애로운 역할을 수행한다는 서사를 통한 폭력의 미화가 철저하게 뒤얽혀있었다. 예컨대 1950년대 초 미국은 자신이 한국의 친절한 보호자라는 미디어 이미지를 구축하는 한편, 미군이 민간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학살했다는 증거를 삭제했다. 규범적인 (백인)미국 가정의 서사에 새롭게 삽입된 이인종 부부의 행복한그림-한인 전쟁 신부와 그의 미군 남편-은 미국의 자애로움과 우호적인 한미 관계라는 관념을 더욱 강화했다. - P40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새 가정과 나라에 고마움을 표하는 한인 전쟁 신부, 나중에는 자신의 다른 한인 가족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그들 역시 미국이 주는 선물을 만끽할 수있게 해주는 이 신부의 이야기는 강제 이주민과 자발적인 이주민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그을 때만, 전쟁 신부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결국 쫓겨난 백성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문제삼지 않을 때만, 그리고 우리가 전쟁의 참혹함을 깡그리 망각할때만 성립된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가 배제를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가족에 높은 가치를 둠으로써 성공을 거두는, 감사해 하는 이민자 서사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국가적인 담론 속에 편입된다. 물론 그 이면에서 이제 국민으로 간신히 통합된 한인 이민자들은 자신의 새로운 국가를 배반하지 않기위해 비밀을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자신의 사적인 비밀역시 연루되어 있을 때 이 의무는 쉽게 충족된다. - P41
한켠에는 미국을 자애로운 보호자로 바라보는 서사의줄기를 따라가는 민족주의, 밸러리 워커딘Valerie Walkerdine의 표현에따르면 "그 허구를 살아 있게 만들고 싶어 하는, 그래서 그것을 구성하는 타자의 시선에 흠뻑 취하고자 하는" 민족주의가있다. 다른 한편에는 양공주를 미국에게 강간당한 민족의 상징으로 상정하는 반미 민족주의가 있다. 양 진영 모두 이인물을 각자의 정치적 의제를 위해 사용해왔다. 한쪽은 국가안보에 종사하는 몸으로, 다른 한쪽은 구출해야 하는 몸으로. 두 경우 모두에서 양공주는 통일과 해방을 맞이한 고국을 향한 환영에 가까운 갈망이 과잉 투여된 인물이며, 이 갈망이면에는 화해와 통일로 가는 방안에 관한 내적인 분열뿐만아니라 분단이 야기한 커다란 상처가 있다. 하지만 이는고국에서 밀려난 사람들에 의해 디아스포라적인 렌즈로 전달된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이들 역시 양공주를 가시화하는 데, 그러므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행위에 판타지의 층을 하나 더 덧씌우는 데 일조한다. 이런 욕망들이 양공주에게 투사되고, 이로써 양공주는 어떻게 한국의 민족 정체성이 민족의 반복적인 균열 위에서 구축되었는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차학경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그 자신이 경계가 될 것"이다." 이제더 이상 미군 기지촌의 어두운 골목이나 미군 클럽의 뒤편칸막이로 쫓겨나지 않게 된 양공주는 트라우마로 얼룩진한국사의 다른 유령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스크린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가시성 안팎을 드나들며 국내외의 현장에서 중앙무대를 차지하는 인물이 된다. - P52
한인의 미국 이주 역사는 명예 백인이라는 사회학적판타지에 혼란을 일으키며 한국인을 다른 아시아 집단과 차별화한다. 사회학적 기준에 따르면 한인들은 모든 아시아계가운데 가장 동화가 잘 된 집단으로 분류되고, 이는 더일반적인 범주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따라붙는 ‘명예백인‘이라는 꼬리표를 강화한다. 군인 신부로서의 양공주와그 자녀들은 미국 내 한민족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데, 이는이주 집단으로서의 한인이 주로 미군 지배라는 수단을 통해 미국에 도착했다는 의미이다." 물론 유사한 군사적 개입 때문에 미국으로 오게 된 베트남인, 캄보디아인, 라오스인, 몽족 같은 다른 집단들도 있지만 이들이 겪은 폭력의 역사는 우리처럼 인종을 뛰어넘는 로맨스와 국제적 협력이라는 환상에 의해 50년 넘는 세월 동안 가려지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한미 관계를통해 탄생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차이의 선을 뛰어넘는 화합의 산 증거라기보다 군사화의 표지를 달고 있는 몸들에 더 가깝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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