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는 오래전에 나타났고 어떤 시점부터는 걷잡을 수 없었다. 두세 차례 문단속을 꼼꼼히 하는 게 대수는 아니다. 두세번이 네다섯 번이 되고, 열두 번이 되고, 새로운 의심과 그 크기 의심을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형식, 반드시 문에 정면으로 서서 확인해야 한다거나, 확인중에 현관 센서등이 꺼지면 무효라거나, 나조차 의미를 알 수 없는 조건들이 생겼다. 현관문만 문제였던 게 아니다. 닫힘과 열림, 잠김과 풀림, 있음과 없음, 연결됨과 끊김의 개념이 적용되는 모든 사물이 신경쓰였다. 창문, 냉장고 문, 수도꼭지, 가스 밸브, 병뚜껑, 신분증, 비상금, 배터리, 전화기, 각종 가전제품, 특히 광열 기구의 전원코드•••••• 말하자면 전부. 아니다. ‘거의 전부‘는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거의 전부는 전부를 재촉한다. - P271
그래서 지금, 콘크리트 평야 위에서 검은 연기를 뿜는 초대형 기계, 소방차와 구급차의 사이렌소리. 거침없이 부는 초겨울의 바람, 좌석도 가방도 시간도 잃은 채 어리둥절해하고 화를 내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여러 언어로 웅성거리는, 오와 열따위는 없이 털썩 앉거나 서성거리거나 제각각이지만 아주 흩어지지는 않는 사람들.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위태로운 우애를 담아 말한다.
"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
이것은 아무 결심도 아니지만 한번 더 말한다.
"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
앞뒤로 줄을 서서 대피한 아까의 일본 청년이 곁에 있다가뜻밖에 한국어로 대답했다.
"확실히 그렇네요."
- P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