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07년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자고 있던 여자는 어느새 일어나 등에 베개를 받치고 앉아 있다. 침대 옆에 있던 여행 안내서를 대충대충 넘겨 보면서 자기 티셔츠를 걸친 여자의 흐트러진 긴 머리칼을 보자 반사적으로 간밤의 일이 떠올랐다. 그대로 가만히 서서 순간 머릿속에 스쳐가는 장면들을 음미하며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턴다.
여행 안내서에서 눈길을 든 여자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비죽내민다. 삐죽거리는 입술이 어울리는 나이는 살짝 지났지만, 이제갓 사귀기 시작한 사이니 예뻐 보일 따름이다.
"우리 정말로 산을 기어오르거나 협곡에 매달리는 뭐 그런 걸 해야 해? 우리 둘이 처음 제대로 된 휴가를 같이 보내는 건데, 이건말 그대로 어디서 몸을 던지거나…" 그녀는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치는 척한다. "플리스로 된 기능성 옷을 입어야 되는 일정뿐이잖아." - P9

잠시 무서운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피마저 얼어붙을 듯 소름끼치는신음이 들렸다. 남자는 입가를 씰룩거리더니 한 번 더 이 세상 소리같지 않은 비명을 질렀다.
트레이너 부인이 그대로 굳어버리는 게 느껴졌다.
"월. 그만두지 못해!‘
그는 어머니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또 한 번 원시적인 소리가 명치 근처 어딘가에서 흘러나왔다. 끔찍하고 듣기 괴로운 소음이었다. 나는 움찔거리지 않으려 애썼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모로 꼬아 어깨에 처박고 온통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기괴하고, 모호한 분노가 서린 얼굴이었다. 가방을 꾹 움켜쥔 내 손등뼈에 핏기가 가셔 새하였다. 
"월! 제발 이러지 마!" 부인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신경질이 희미하게 배어들어 있었다. "제발 부탁이야. 이러지 마."
‘아. 하나님.‘ 나는 생각했다. ‘저 이 일 못 해요. 못 하겠어요. 꿀꺽. 침을 크게 삼켰다. 남자는 아직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도 하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저, 저는 루라고 해요." 어울리지 않게 부들부들 떨리는 내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손을 내밀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어차피 잡지도 못한다는 생각이 나서 그냥 힘없이 흔들기만 했다. "루이자를 줄인 애칭이죠."
그러자 놀랍게도 남자의 생김새가 말끔하게 정리되더니. 머리도 어깨 위에 반듯이 자리를 잡았다.
윌 트레이너는 찬찬히 나를 바라보았다. 희미해서 잘 보이지도않는 미소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클라크씨." 그가 말했다. "제 간병인을 새로 맡으셨다고요."
네이선이 발판 조정을 마쳤다. 그러고는 일어서면서 고개를 저었다. "당신 나쁜 사람이에요, 트레이너 씨. 아주 나빠요." 네이선은 씩 웃더니 내게 두툼한 손을 내밀었고 나는 비실비실하게 그 손을 잡고서 흔들었다. 네이선은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안 할 듯싶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방금 보신 건 윌이 제일 잘하는 크리스티브라운 흉내랍니다.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으르렁거리기만 하지 물지는 않거든요."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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