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이었다. 아니, 절망적인 것 이상이었다. 모욕적이었다. 피파가 오면 나는 항상 내 방문을 조금 열어두었는데, 그다지 교묘하다고 할 수 없는 초대였다. (너무 연약해서 땅 위를 잘 걷지 못하는 작은 인어공주처럼) 발을 끄는 사랑스러운 발걸음조차도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피파는 모든 것에 엮여 있는 황금실, 아름다움을 확대해 온 세상을 오직 그녀와 관련된것으로 바꾸는 렌즈였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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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는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동물종이므로 우리의 질병또한 새로운 것들이다. 우리는 다른 동물로부터 질병을 빌려왔다. 헨드라나 에볼라 등 일부 감염병은 가끔씩 찾아오며 유행이 발생해도 곧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독감이나 에이즈 같은 질병은 일단 뿌리를 내린 후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파되며 인간이라는 서식 환경 내에서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인간이 아닌 영장류에서 유래한열대열원충과 삼일열원충 또한 비슷한 성공을 거두었다.
플라스모듐 놀레시는 어쩌면 갈림길에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로서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며 장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놈들은 원생생물이므로 계획 같은 건 없을 것이다. 그저 상황에 맞춰 반응할 뿐이다. 다른 말라리아 원충 사촌들이 기나긴 세월에 걸쳐매우 효과적으로 적응했듯이 놈들도 적응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인수공통감염병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킬것이다. 질병이 어디에서 왔는지뿐만 아니라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말이다. - P205

슈퍼전파자superspreader란 전형적인 감염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직접 감염시킨 환자를 가리킨다. 보통 유행병이 시작될 때 각각의 일차감염자에 의해 감염되는 이차감염자의 평균 숫자를 Ro (조지 맥도널드가 수리역학에 도입했던 중요한 변수)라 하는데 슈퍼전파자는 이런 평균치를 훨씬 넘어서는 일차감염자다. 어떤 집단에 슈퍼전파자가 존재하면 일상적인 계산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대유행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로이드-스미스 J. O. Lloyd-Smith와 공저자들은 <네이치>에 이렇게 썼다. ‘어떤 집단에서 Ro를 예측하면 감염력의 개인차가 상당하다는 사실이 가려질 수 있다. 중증급성호흡증후군(사스)의 전 세계적 유행 시 수많은 ‘슈퍼전파사건‘을 통해 어떤 환자들은 이례적으로 많은 이차감염자를냈다.‘ ‘장티푸스 메리‘는 전설적인 슈퍼전파자였다. 로이드-스미스와 공동저자들은 이 개념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질병이 유행할 때 슈퍼전파자가 발견된다면 전 인구를 대상으로 한 폭넓은 통제 조치보다도 슈퍼전파자를 격리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49명의 감염 환자를 격리시킨다고 해도 단 한 명의 슈퍼전파자를 놓치면 통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유행병이 확산된다는 것이다.  - P214

그들이 옳았다. 이 바이러스는 사스-코로나바이러스로 명명되었으며 SARS-CoV라는 우아하지 못한 약자로 표기되었다. 인간에게심각한 질병을 일으키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발견되기는 처음이었다. (몇몇 코로나바이러스는 다른 수많은 바이러스와 함께 감기의 원인이다. 마우스의 간염이나 돼지의 위장관염, 칠면조의 호흡기 감염을 일으키는 것들도 있다.) SARS-CoV라고 표기하면 전혀 불길한 느낌이들지 않는다. 한때는 새로운 병원체가 발견되면 포산 바이러스, 광저우 바이러스하는 식으로 지역명을 따서 훨씬 생생한 이름을 붙이곤 했다. 사람들은 ‘조심해! 저 친구는 광저우에 걸렸어!‘라고 수군댔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그런 명명법을 부당하고, 달갑지 않으며, 관광산업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 P229

중국 남부 사람들은 항상 지구 상 다른 어떤 민족보다 다양한 동물을 음식으로 즐겼다. ‘야생의 맛을 추구하는 시대‘를 맞아 야생동물 요리의 범위와 형태와 소비량은 계속 늘어  사실상 땅과 바다와 하늘에 사는 모든 동물이 포함되었다.

야생의 맛(광둥어로 예웨이 Lyeweil]라고 한다)은 ‘체면‘을 세우고 부를 과시하며 행운을 기원하는 방식으로 간주된다. 그린펠드는 야생동물을 먹는 행위가 새로운 과시적 소비성향뿐 아니라 수많은 여성이 유리 진열장뒤에서 손님을 유혹하는 매춘산업과 연관돼 있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이런 유행은 희한한 요리와 천연약재와 이국적인 최음제(호랑이 음경 같은)를 추구하는 전통과 맞물려 빠른 속도로 정착되고 퍼져갔다. 어떤 관리는 그린펠드에게 광저우 시내에만도 야생동물 요리를 내는 음식점이 2천 개가 넘는다고 알려주었다. 그린펠드가 그의 사무실에 있는 동안만도 4개 업소에 허가증이 발급되었다. - P232

시벳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바이러스 항체가 관박쥐에서 흔히 검출된다는 사실은 중요한 발견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리의 연구팀은 분변 검체에서 추출한 바이러스 게놈 절편들의 염기서열을 분석했다. 비교분석 결과 사스 유사 바이러스는 검체마다상당한 유전학적 다양성을 나타냈다. 인간에서 분리된 모든 SARS-CoV 사이의 다양성보다도 높은 수준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일정 기간박쥐 군집 속에 머물면서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변화하고 다양성을 늘려가는 것 같았다. 사실 인간 사스 바이러스에서 알려진 다양성의 총합이 박쥐 바이러스의 다양성 속에 포함되었다. 이런 내포관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가계도에 표시하는 것이다. 리와 동료들은 실제로 가계도를 작성하여 <사이언스> 지에 발표한 논문에도실었다. 그 속에서 인간 사스 바이러스는 관박쥐 속에 사는 바이러스를 나타내는 굵은 가지에서 뻗어나온 가늘고 작은 잔가지에 불과하다.
이건 무슨 뜻일까? 관박쥐가 사스의 유일한 보유숙주가 아니라 보유숙주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또한 2003년 유행 시 시벳은 보유숙주가 아니라 증식숙주 역할을 한 것이 틀림없다는 뜻이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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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가능성의 모든 것

8년 뒤 어느 날 오후ㅡ 학교를 떠나 호비 아저씨를 도와서 일을 하게 된 후ㅡ내가 뉴욕 은행에서 막 나와서 기분이 상해 생각에 잠긴 채 매디슨가를 걷고 있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돌아섰다. 목소리는 친숙했지만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남자는 삼십 대 정도로 나보다 키가 컸고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회색 눈에 빛바랜 금발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다. 그의 옷-거칠고 보풀이 인 숄칼라 트위드 스웨터 -은 도시의 거리보다는 진흙투성이 시골길에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리고 부당한 특권을 누리는 사람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 친구집 소파에서 자고 약을 하고 부모의 돈을 상당히 낭비한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 P9

나는 머리를 식히려고 택시를 타는 대신 걸었다. 깨끗하고 촉촉한 봄날이었다. 햇살이 비구름을 뚫고 나왔고 수많은 회사원들이 횡단보도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나에게 뉴욕의 봄은 항상 독을 품은 계절이어서, 수선화와잎이 돋는 나무에 핏방울과 옅은 물보라 같은 공포와 환영이 뒤섞여서 엄마의 죽음을 상기시켰다(샌드라라면 굉장해! 재밌어!라고 했을 것이다. 앤디의 소식을 들으니 누군가가 엑스레이 스위치를 켜서 모든 것을 네거티브필름으로 바꾼 것 같아서, 수선화와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과 모퉁이에서 호루라기를 부는 교통경찰들 사이에서도 내 눈에는 죽음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죽은 자들로 가득했고 시체들이 버스에서 쏟아져 내려 일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백 년 후에는 치아 충전재와 심박 조절기와 아마도 천 몇 조각과 뼈밖에 남지 않으리라. - P32

그리고 이상한 점은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피파를 내가 보는 것처럼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피파의 비정상적인 걸음걸이와 강렬한 빨강 머리, 창백한 얼굴 때문에 이상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어떤 멍청한 이유가 됐든 간에 나는 이 세상에서 피파의 진가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항상 자부했었다. 내가 피파를 얼마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알면 그녀는놀라고 감동받을 것이고, 어쩌면 자신을 아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분노를느끼며 피파의 결점에 생각을 집중하면서 볼품없던 시기에 덜 예뻐 보이는각도에서 찍은 사진을 일부러 열심히 관찰했다. 긴 코, 홀쭉한 뺨, 눈동자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색이었지만) 옅은 속눈썹 때문에 발가벗은 듯한 눈. 허클베리 핀처럼 평범했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면이 나에게는 너무나 감미롭고 특별해서 나는 절망에 빠졌다. 피파가 아름다웠다면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피파 평범한 외모에도 사로잡히고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불길하게도 육체적인 애정보다 더욱 구속적인 사랑, 몇 년 동안이나 퍼덕거리면서 앓아누울지도 모르는 영혼의 구렁텅이를 암시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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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시간은 하루 중 내가 유일하게 기대하는 시간이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특히 보리스가 코트쿠와 사귀고 난 뒤부터 나는 밤에 직접 음식을 해 먹으려고 부스럭거리는 것에 감자 칩 한 봉지나 아빠가 포장해 왔다가 남긴 밥이 말라붙은 포장 용기를 들고 침대에 걸터앉는 그 슬픔에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행복하게도 여기서는 정반대였고, 호비 아저씨의 하루는 저녁 식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어디서 먹을까? 누가 올까? 내가 요리를 할까? 포토푀 좋아하니? 아니라고? 먹어본 적 없어? 레몬 라이스나 사프란은? 무화과 통조림이나 살구는? 나랑 제퍼슨 마켓까지 걸어갈래?  - P536

멀리 걸어갈수록 걸으면 걸을수록 내가 당연하게 여기던 이 세상에 몇안 되는 안정적이고 변함없는 정박지 중 하나를 잃었다는 생각에 기분이더 나빠졌다. 익숙한 얼굴들과 반가운 인사. 어이, 마니토! 나는 적어도 과거의 마지막 시금석인 이 건물은 내가 떠난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줄 알았다. 호세와 골디에게 그때 준 돈은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절대 할 수 없다고생각하니 이상했다. 아니, 더 이상한 것은 두 사람에게 아빠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아빠를 아는 사람이, 또는 신경 쓸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보도마저도 발밑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고 나는 57번가에서 끝없는 구덩이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2권에서 계속 - P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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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멍한 침묵이 흐른 뒤 내가 말했다. 낮이고 밤이고 나의 혼미한 의식은 피파가 이 집에 있다는 인식, 복도에서 울리는 피파의 목소리와 발소리가 거듭 주는 행복과 에너지로 채색되어 있었다. 우리는 같이 담요로 텐트를 칠 것이었고, 피파는 아이스링크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었고, 내가 낫고나서 우리가 같이 할 모든 일들에 밝고 신나는 콧노래가 따라다녔다. 사실 나는 우리가 라디오에서 벨 앤 세바스찬의 노래가 나오는 동안 무지개색 사탕으로 목걸이를 만들고, 그런 다음 워싱턴스퀘어의 존재하지도 않는 카지노 아케이드를 돌아다니고, 여러 가지를 한 것만 같았다. - 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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