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가능성의 모든 것

8년 뒤 어느 날 오후ㅡ 학교를 떠나 호비 아저씨를 도와서 일을 하게 된 후ㅡ내가 뉴욕 은행에서 막 나와서 기분이 상해 생각에 잠긴 채 매디슨가를 걷고 있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돌아섰다. 목소리는 친숙했지만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남자는 삼십 대 정도로 나보다 키가 컸고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회색 눈에 빛바랜 금발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다. 그의 옷-거칠고 보풀이 인 숄칼라 트위드 스웨터 -은 도시의 거리보다는 진흙투성이 시골길에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리고 부당한 특권을 누리는 사람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 친구집 소파에서 자고 약을 하고 부모의 돈을 상당히 낭비한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 P9

나는 머리를 식히려고 택시를 타는 대신 걸었다. 깨끗하고 촉촉한 봄날이었다. 햇살이 비구름을 뚫고 나왔고 수많은 회사원들이 횡단보도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나에게 뉴욕의 봄은 항상 독을 품은 계절이어서, 수선화와잎이 돋는 나무에 핏방울과 옅은 물보라 같은 공포와 환영이 뒤섞여서 엄마의 죽음을 상기시켰다(샌드라라면 굉장해! 재밌어!라고 했을 것이다. 앤디의 소식을 들으니 누군가가 엑스레이 스위치를 켜서 모든 것을 네거티브필름으로 바꾼 것 같아서, 수선화와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과 모퉁이에서 호루라기를 부는 교통경찰들 사이에서도 내 눈에는 죽음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죽은 자들로 가득했고 시체들이 버스에서 쏟아져 내려 일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백 년 후에는 치아 충전재와 심박 조절기와 아마도 천 몇 조각과 뼈밖에 남지 않으리라. - P32

그리고 이상한 점은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피파를 내가 보는 것처럼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피파의 비정상적인 걸음걸이와 강렬한 빨강 머리, 창백한 얼굴 때문에 이상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어떤 멍청한 이유가 됐든 간에 나는 이 세상에서 피파의 진가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항상 자부했었다. 내가 피파를 얼마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알면 그녀는놀라고 감동받을 것이고, 어쩌면 자신을 아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분노를느끼며 피파의 결점에 생각을 집중하면서 볼품없던 시기에 덜 예뻐 보이는각도에서 찍은 사진을 일부러 열심히 관찰했다. 긴 코, 홀쭉한 뺨, 눈동자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색이었지만) 옅은 속눈썹 때문에 발가벗은 듯한 눈. 허클베리 핀처럼 평범했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면이 나에게는 너무나 감미롭고 특별해서 나는 절망에 빠졌다. 피파가 아름다웠다면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피파 평범한 외모에도 사로잡히고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불길하게도 육체적인 애정보다 더욱 구속적인 사랑, 몇 년 동안이나 퍼덕거리면서 앓아누울지도 모르는 영혼의 구렁텅이를 암시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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