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번거롭고 때로 굴욕스러운 일을 겪다 보니 푸드 스탬프를 신청하거나 복지 혜택을 받을 때 수혜자가 마주하는 관료주의적 장벽이 떠올랐다. 혜택을 받기 위해 자신의 나약함을 서류로 증명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결함이 매우 현실적이며 해결하기 어렵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치심 앞에 우리는 납작 엎드려야 한다. 나는 이 과정에서 모욕감을 느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이런 고통을 통해 수치심 머신이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수치심을 건드려 이윤을 챙기는 이들 앞에 기죽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다. - P273
남아공 국민은 이 역사를 공개적으로 논의했다. 피해자들이 다시 목소리를 얻었고 추악한 진실이 드러났다. 사실을 확인하고이에 합의하면서 자기본위적 신화도 증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학습 과정이 있어야 사회는 불의와 불공정을 바로잡을 수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고칠 수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공의 현실이 보여주듯이, 진실과 마주한다고 해서 수 세기에 걸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첫발을 내디뎌야만, 국민이 수치심의 첫 두 단계(상처받고 부인하는 단계)를 지나 현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받아들이는 단계로 나아가도록 이끌 수 있다. 어떤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이해하려면 우리는 냉정하게 초당파적 진실을 수용하면서 나름의 화해 절차를 거쳐야 한다. 미투운동이 이러한 흐름을 보여준다. 여성들은 수치심과 피해자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증언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 경찰의 조지 플로이드 살해 후 터져 나온 시위는 인종과 정의에 관한 토론을 미국 전역으로, 나아가 전 세계로 확대했다. 이는 희망찬 시작이지만, 인종차별기제에 관한 철저하고편향 없는 분석이 아직 부족하다. 그 실상을 가감 없이 밝혀야 수치심 머신의 청사진이 뚜렷이 드러날 것이다. 그럴 때만 우리는이 기계의 엔진을 멈추게 할 전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 P284
수치심 자체를 이용해 권력자에게 대항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미 이런 사례들이 있다. 사회운동가들은 미국인 수백만 명을 아편성 진통제에 중독시킨 퍼듀 파마와 그 소유주인 새클러 일가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시위와 법정 소송에 압박을 느낀 퍼듀는 파산보호 신청을 했고 소유주 일가는 수십억 달러의 손해배상금을지급해야 했다.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새클러 가문의 이름은 퍼듀가 부정하게 번 돈으로 후원해온 박물관과 대학에서 지워지고 있다. 이는 시작일 뿐이다. 탐사보도와 법정 소송 덕분에 대중은 새클러 가문을 비판하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안다. - P285
이는 상당한 진전이었다. 그러나 2020년 대선 이후, 페이스북은 더 수익성 있는 유해 콘텐츠로 서서히 돌아갔다. 어쨌거나 트래픽을 끌어올리는 건 거짓말과 조롱이었다. 이러한 냉소적 태도는 불법화하거나 엄청난 벌금을 물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미국 정부가 기업에 책임을 묻기 전까지 의심스러운 정보가 계속불어날 것이다. 이를 막는 한 가지 방법은 거짓 정보를 유포하는 소셜 미디어회사에 망신을 주고, 동시에 거짓 메시지로 이익을 얻거나 그런 메시지와 연관된 곳에서 정치기부금을 받는 정치인에게 모욕을주는 것이다. 미국 정부보다 소셜 미디어에 덜 휘둘리는 유럽연합은 허위 정보를 제공할 경우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벌금을 물린다. 거액의 벌금과 극적인 규제 조치가 있어야 현실은 바뀔 수 있다. - P290
사람들의 인생이 읽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남들에게 불필요한 수치심을 주지 않을까?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독소를 제거할 수 있다면,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보람 있고 평화로울 것이다. 이는 큰 과제이지만 작은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더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수치심 렌즈를 끼고 일상을 구석구석 살피는 것이다. 언제 수치심이 생기는지, 어떤 소통방식이 수치심을 낳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난민을 무시하는 이민국 직원의 태도, 열두 살 난 딸에게 뚱뚱하다고 무안 주는 엄마의 행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 P292
다음 과제는 수치심을 낳는 행동을 포착한 다음 이를 분석하는 것이다. 신앙심을 비웃는 행동이 사회에서 자주 본 모습을 따라 한 것인지, 개인의 상처나 불만에서 나온 행동인지, 아니면 일종의 개종 전략인지 살펴본다(내 친구는 자기 친구들을 ‘무신론 전도사‘라고 부른다). 또 이들이 사제에게 학대당한 피해자를 비난하는지 아니면 교회를 향해 비판하는 것인지, 또 그런 비난으로 누가 어떤 이득을 보는지, 그 이득이 돈인지 지위인지 관계의 우위인지를 따져본다. 답은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그런 질문을 머릿속에 인지해야 우리의 행동도 달라진다. 머릿속에 수치심 항목을 만들어놓아야 무례한 댓글, 추잡한 비교행위, 남을 폄하하려는 리트윗, 불가능한 기대치 등 자존감을 꺾는 행동을 자제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행동은 남들이 약자를 놀릴 때이에 동참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것이다. 상당수의 조롱 행위가 온라인에서 일어난다. 온종일 운이 따라주지 않는 유명인부터 이상한 디자인의 수영복을 입은 사람, 아메리카 원주민 노인과 험악한 눈싸움을 한 우익 고등학생까지, 모두가 온라인에서놀림당한다. 조롱은 직장이나 동네, 어린이 야구장에서도 일어날수 있다. 누가 잘못이라도 하면 다들 한마디씩 해도 되는 줄 안다. 저널리스트 에즈라 클라인은 이렇게 지적했다. "평범한 사람을 떼 지어 공격할 목적으로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면 안 된다." 타격 대상에게 실행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고 경로를 바꿀 만한 힘이 있더라도,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조롱하는지 따져봐야한다. 그 사람의 행동을 고치려는 걸까? 나의 정의감을 친구들에게 과시하려는 걸까? 새로 뜬 캐런 영상은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나? 이 여성이 직장을 잃고 다시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길 바라는 걸까? 공공연한 인종차별 행위를 인종차별이라고 외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시야를 넓혀 인종차별의 원인을 짚어야 하지 않을까? 경찰이 애초에 백인에게 관대하게 공권력을 행사하고 백인의 경비대 역할을 자처하는 이유가 뭘까? 우리가 할 일은 리트윗이 아니라 경찰 개혁이 아닐까? 분노하지 말자. 무의식적으로 약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에는 분노할 일이 차고 넘친다. 분노는 중독성이 있다. 교도소 개혁에 힘쓰거나 유권자 억압에 저항하고 싶다면 뛰어들라. 그러나 종종 우리는 분노로써 행동을 대신하는데, 분노하면 속이 후련해지고 돈도 안 들기 때문이다. 분노는 모욕 행위를 부추길 뿐이다. 화가 치밀어오를 때, 내가 자기만족을 위해 화를 내는 건 아닌지 돌이켜보자. - P295
오늘날 수치심 체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사람들 스스로가 모두 실수하는 존재라는 점 그리고 우리 주변에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한 행동에 책임을 지고 속죄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잘못 때문에 영원히 수치심의 늪에 갇혀야 하는가에 대해선 재고할 필요가 있다. 본질적으로 수치심을 없애는 것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는저녁 식사 자리부터 복지사무소, 기업 이사회실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영역이든 개인적 영역이든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을 신뢰하고 존엄하게 대우하자고 요구하는 일이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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