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가을 케네디와 톨런이 뉴욕시 브롱크스에서 민주당 시장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을 하던 중에는 한 소년이 케네디의 PT109 넥타이핀을 가져가려고 했다. 소년의 손을 잡은 케네디는 소년의 눈을 똑바로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건 형한테 받은 거니까 안 가져갔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 뒤로 케네디는 형 케네디가 준 넥타이핀이아닌 또 다른 PT109 넥타이핀을 달았고, 유세장에서 분실할 때를 대비해 여유분으로 넥타이핀 한 상자를 갖고 다녔다. 하지만 이날 오후시애틀에서 케네디는 어분의 넥타이핀을 전부 호텔방에 두고 왔다. 케네디와 톨런이 강당 입구에 도착했을 때, 케네디는 톨런이 달고있는PT109 넥타이핀을 빌려달라고 했다. 톨런이 말했다. "안돼요, 바비" 케네디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톨런이 마지못해 말했다. "좋아요, 빌려줄게요. 하지만 돌려줘야 해요." 케네디는 몇 초간 멍하니 톨런을 쳐다보았고 마침내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아, 알겠어요. 이거 형이 준 거죠? 그쵸?" "아뇨" 톨런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덧붙였다. "의원님이 제게 준 겁니다." 케네디는 천천히 몇 번을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짓다가 활짝웃었다. - P111
이 나흘간 케네디가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아무도 알지 못했다. 케네디는 존슨의 불출마로) 사라져버린 베트남 전쟁과 존슨의 직무 수행이라는 두 이슈가 사실 자신에게도 난감한 문제였음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정치인이었다. 케네디가 아무리 진심으로 ‘내탓‘이라는 말을 자주 했어도 미국이 애초에 전쟁에 관여하게 만든 데에대한 책임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슨의 대통령 직무 수행도 마찬가지였다. 존슨을 부통령으로 지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 케네디였다. 하지만 동시에 케네디는 존슨의 불출마로 자신이 출마 선언을 할 때 "(존슨) 한 사람에 반대" 하기보다 "새로운 정책을 제안" 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 영리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 P124
"누군가가 인종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 미국의 관용 정신에 호소할수 있다면, 다음번 대통령 선거운동은 그걸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제 존슨의 재선과 전쟁 문제가 더 이상 이슈가 되지 않는 상황이된 만큼 케네디는 자신이 말했던 것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4월 4일 다시 시작된 케네디의 선거운동은 드디어 존슨과 베트남 문제에서 해방되어 인종, 빈곤 문제, 희생에 집중할 수 있게 된, 또 다른 ‘마침내 얻은 자유 유세‘가 될 것이었다. 케네디가 상원에서 주장한 이런 이슈들은 현직 대통령의 실패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전쟁 같은 이슈보다 더 중요했다. 케네디는 보고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고,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꼈으며, 그래서 이 문제들에 더 관심을 가졌다. 케네디는 상원의원으로서 외딴 인디언 보호구역을 방문했다가 그곳 학교의 도서관에 인디언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이 없는 걸 알게 된뒤로 인디언들을 옹호하게 되었다. 상원 소위원회가 개최한 치카노의노조 결성에 관한 청문회에 참석한 뒤로는 치카노 농부들의 영웅이 되었다. 뉴욕의 할렙과 베드퍼드 스타이베선트에 있는 공동주택을 돌아보고 할렘 갱단의 조직원에게 질문했고, 쥐에 물려 얼굴이 상한 어린푸에르토리코 소녀와 만난 후에는 도시 빈민의 대변인이 되었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수돗물이나 화장실도 없는 버려진 버스에서 살고 있던 뉴욕주의 로체스터 교외 수용소를 다녀온 뒤에는 이주 농민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의 한 버스에서는 영양실조로 배가 부풀어 오른 아이들 십여 명이 더러운 매트리스에 누워있었다. 현장을 떠나기 전 케네디는 그런 수용소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는 보좌관인 제리 브루노에게 "이런 게 정치를 하는 이유예요. 자리를 이용해서 힘든 사람을 도울 수 있으니까 말이죠"라고 말했다. 브루노는 케네디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는것을 보았다. - P125
미시시피주 클리블랜드에서 굶주리는 아이들은 형 케네디 암살이후 바비 케네디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케네디가 1964년 상원의원에 출마한 이유는 형 케네디를 기리고 케네디 대통령의 유산을이어나가기 위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196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이유는 베트남 전쟁과 미시시피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고통을 끝내기위한 것이었다. 상원의원이 된 바비 케네디는 과거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제거하는 데 집착했을 때 만큼이나 적극적으로 빈곤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빈곤 문제를 이념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꼈고, 그래서그가 낸 법안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했다. 케네디는 복지정책으로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는데, 그렇게 하면 혜택받는 사람의 자존심이 상하고 공동체 내에서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해서였다. 케네디는 주민의 참여 없이 정부가 도시에 있는 가난한 동네를 개선할수 없으며, 빈곤퇴치 정책은 공동체 조직이 구상하고 시행해야 한다고생각했다. 또한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중요한데, 가난한동네에서 일자리를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지역 주민과 기업이 협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28
또 다른 제안은 전미운수노조에서 해왔다. 노조 간부 한 명이 테드케네디에게 바비 케네디를 지지하는 대가로 전임 노조 위원장인 지미 호파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물었다. 지미 호파는 바비 케네디가 법무부 장관으로 일하던 시절에 다수의 중범죄 혐의로 기소된 뒤 연방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었다. 노조 간부는 현직 법무부 장관인 랩지클라크에게 부탁해 교도소 내 매트리스 공장에서 노역하는 호파를 농장 노역장으로 옮겨서 실외에서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했고, 테드 케네디와 데이비드 버크는 그 제안을 바비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호파가 형의 암살에 관여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던 바비 케네디는 이렇게 답했다. "노조 간부에게 돌아가 내가 램지 클라크에게 (노조의 지지를) 부탁할일은 없을 거라고 전해. 지미 호파가 영원히 매트리스 공장에 있었으면하고,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호파가 출소할 가능성은 눈곱만치도 없을 거야." (1971년 닉슨 대통령은 지미 호파를 감형하고 풀어주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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