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1년 1~3월에 후금이 요동遼東지역을 장악함으로써, 명과 조선의 육상교통로가 끊어졌다. 이에 따라 명과 후금 사이에서 한쪽을 분명히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조선을 옥죄었다. 눈치를 보거나 절충안으로 상황을 타개할 여지가 거의 사라지면서 논쟁은 극단적 대립을 거쳐 파경으로 치달았다. 이를테면, 광해군은 명 황제의 추가 징병 칙서를 공개적으로 거절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신료들은 그런 광해군의 왕명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수시로 파업을일삼았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이 취할 행보를 놓고 벌어진 이때의 논쟁 양상과 그 성격은 약 5년 후 정묘호란 이후로 명과 청 사이에서 조선의 처신을 두고 격렬하게 벌어진 척화斥和 대 주화主和로 논쟁의 예고편이자 판박이였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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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1627) 때 조선은 위기를 모면하고자 후금(1616~1636)과 형제 관계를 맺었다. 여기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는일이었다. 그러나 홍타이지 Hong Taiji(皇太極, 1592~1643)가 대청大淸을 천명한 뒤 새롭게 요구한 군신 관계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패륜 그 자체였다. 위기에 처한 아버지(명)를 돕기 위해 자식(조선)이 바로 달려가기는커녕 아버지를 죽이려는 원수(청)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린 것이 삼전도 항복 (1637)의 핵심 본질이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조선의 엘리트들은 삼전도 항복을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로 치부할 수 없었다. 국가의 수치 차원을 넘어,
소중화小中華라는 조선왕조의 레종데트르raison d‘étre (존재 이유)를 스스로 파기한 데 따른 이념적 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개념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조선왕조의 존망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적잖이 존재하였다. 대표적인 예가바로 중세적 ‘보편 문명‘, 곧 중화였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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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군신 관계(충)와 부자 관계(효)에는 근본적 차이가있었다. 군신 관계는 군주의 태도 여하에 따라 가변적이었다. 군주가 왕도를 떠나 악을 행하고 간쟁을 듣지 않으면 신하 스스로 군신관계를 끊고 떠날 수 있었다. 심지어 반정이나 역성혁명易姓革命도 가능했다. 곧 충은 영원불변의 절대적 가치가 아닌, 상대적 가치였다. 이에 비해 부자 관계는 부모가 아무리 패악하더라도 자식으로서는 관계를 스스로 끊을 길이 유교적 테두리 안에서는 없었다. 이렇게 효는 상상을 초월하는 영원불변의 절대적 가치였다. 바로 이 점이 조선이 고려 때와 달리 황제(천자)를 바꾸는 데에 심각한 이념적 부담을 가진 이유였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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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중화의 요건으로 공간(중원). 종족(한인漢人)·문화(유교) 세 가지를 거론하는데, 고려 선배들은 종족 요인을 별로 개의치않았다. 중원의 패자가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서는 굳이 종족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중원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르면, 종족과 무관하게 (한인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천명에 따른 결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조선은 달랐다. 조선인이 보기에 명은 단순히 강대국 차원을 넘어, 하-은-주-한-당-송-명으로 이어지는 유교적 중화문명의 주인공, 곧 중화문명국이자 천자국이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종족 변수를 중시한 주자학적 화이관華夷觀이 매우 강고하였다. 그 결과 16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명·조선 관계의 본질을 이전의 군신 관계에 부자 관계를 추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충忠과 효孝에 동시에 기초한 이른바 군부君父 신자臣子관계로 이념화한 것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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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에서 제국이 바뀔 때면 고려는 그것을 천명天命으로 간주하여 새로운 제국 질서에 동참하였다. 때로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새로운 패권국의 질서에 순응하는 현실적 결정을 내리곤 하였다. 고려가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은 중원의 제국은 무려 아홉 나라였다. 5대에 속하는 후당-후진-후한-후주 등은 차치하더라도, 송(960~1279)에서 요로, 요에서 금으로, 금에서 원으로, 원에서 명으로 황제국(책봉국)을 수시로 바꾸는 등 고려는 형세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갈아타기 선수‘였다. 한 예로,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궤멸한 후에 고려 조정이 취한 외교 노선이 거란제국을 새로운 황제국으로 인정하고 책봉·조공 관계를 맺은 사실을 들수 있다. 몽골과는 40년을 싸웠어도, 결국에는 원이 주도하는 새로운국제 질서에 순응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선배‘들은 황제국을 수시로 바꾸면서도 윤리적·이념적 부담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약 300년 후 조선 ‘후배‘들은 명의 쇠락과 청의 흉기를 천명이 바뀐 결과로 인정하기를 단연코 거부하였다. 심지어 남한산성에 고립된 극한 상황에서조차 차라리 여기서 함께 죽자는 극단적 척화론이 수그러들 줄 몰랐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조선 전기 (15~16세기) 200여 년 사이에 한반도의 지배 엘리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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