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1년 1~3월에 후금이 요동遼東지역을 장악함으로써, 명과 조선의 육상교통로가 끊어졌다. 이에 따라 명과 후금 사이에서 한쪽을 분명히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조선을 옥죄었다. 눈치를 보거나 절충안으로 상황을 타개할 여지가 거의 사라지면서 논쟁은 극단적 대립을 거쳐 파경으로 치달았다. 이를테면, 광해군은 명 황제의 추가 징병 칙서를 공개적으로 거절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신료들은 그런 광해군의 왕명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수시로 파업을일삼았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이 취할 행보를 놓고 벌어진 이때의 논쟁 양상과 그 성격은 약 5년 후 정묘호란 이후로 명과 청 사이에서 조선의 처신을 두고 격렬하게 벌어진 척화斥和 대 주화主和로 논쟁의 예고편이자 판박이였다. - P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