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1627) 때 조선은 위기를 모면하고자 후금(1616~1636)과 형제 관계를 맺었다. 여기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는일이었다. 그러나 홍타이지 Hong Taiji(皇太極, 1592~1643)가 대청大淸을 천명한 뒤 새롭게 요구한 군신 관계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패륜 그 자체였다. 위기에 처한 아버지(명)를 돕기 위해 자식(조선)이 바로 달려가기는커녕 아버지를 죽이려는 원수(청)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린 것이 삼전도 항복 (1637)의 핵심 본질이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조선의 엘리트들은 삼전도 항복을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로 치부할 수 없었다. 국가의 수치 차원을 넘어,
소중화小中華라는 조선왕조의 레종데트르raison d‘étre (존재 이유)를 스스로 파기한 데 따른 이념적 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개념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조선왕조의 존망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적잖이 존재하였다. 대표적인 예가바로 중세적 ‘보편 문명‘, 곧 중화였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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