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1780년의 열하를 가다

이 책의 제목 ‘1780 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에서
‘1780 년‘과 ‘열하는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시·공간을 나타내고자 쓴 말이다. 역사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독자라도 1780 년에 도대체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다는 거지?‘
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다. 1780년은 지금까지 한국사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해‘로 여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열하라는 지명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열하 하면 금방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책 제목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 P11

명 황제와 조선 국왕이 이와 같은 관계를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기제는 1년에 몇 차례씩이나 있었던 사신의 왕래였다. 아무리 옛날이라 해도 사신의 왕래가 명과 조선의 관계에만 나타난 현상은 물론 아니었다. 오늘날의 대사관과 같은 외교관의 상주 제도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국교를 맺은 나라끼리 사신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꾸로, 정식으로 국교를 맺지 않은 관계에서라면 기껏해야 단발성의 사신 파견 정도가 가능할 뿐 사신의 잦은 왕래란 불가능하였다. 사신 왕래의 빈도가 곧 양국 관계의 친밀도를 반영하는 지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 측면에서 명과 조선은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한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보통 ‘사대자소事大字小‘ 관계의 전형이라고 한다. 사대자소란 ‘약소국은 강대국을 지성으로 섬기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자애롭게 보살핀다‘는 의미이다. 대국과 소국의 관계를 마치 부모와 자식 사이 같은 따뜻한 관계에 빗댄 것이다. 관계의 실상이 정말 그러했다면, 약육강식의 냉혹한 국제 관계에 비하자면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물론 주권 평등의 원칙을 무시한 것이므로 오늘날에는 절대 통할 수 없는 말이지만, 적어도 옛날 사람들한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야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강대국이 되고, 어느 쪽이 약소국의 입장에 설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문제였다. 청과 조선의 경우는 이게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입장이 순식간에 뒤집혔기 때문이다.
조선은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기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마찬가지로 여진인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 또한 당연하게 여겼다. 훗날 청나라의 핵심을 형성하는 만주인들은 여진인들의 후예였고, 여진인들은 원래 조선 땅 동북쪽에 빌붙어 지내는 ‘오랑캐‘에 불과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조선 초기의 실록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보면 여진의 추장들이 때마다 예물을 바치러 찾아오고, 조선의 왕들이 선물을 하사하면서 그들을 다독이는 모습을 금세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여진은 조선을 섬기고 조선은 명을 섬기는 위계hierarchy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16세기 말까지는 그랬다. - P22

임조14년 병자년(1636) 이 월에 후금의 사신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자는 취지의 요구를 들이밀었다. 이는 기존의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전환하자는 의미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론斥和論이 들끓었고, 후금의 사신은 거의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곧바로 단절되지는 않았다. 조선 조정은 매년 봄마다 보내던 춘신사春信使를 그대로 파견하였다.
같은 해 사월,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이 선양에서 거행되었다. 이제 홍타이지는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만주어로는 ‘고신 온초 후왈리야순 언두렁거 한Gosin Onco Hawaliyasun EndringgeHan)로 불리게 되었고, 이에 맞추어 국호는 대청국大淸國(만주어로는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으로, 연호는 천총에서 숭덕崇德으로 바뀌었다.
즉위식에서 홍타이지는 자신의 ‘칭제稱帝‘를 정당화하는 명분의 첫 번째로 ‘조선 정복‘의 업적을 내걸었는데, 이는 정묘호란의 성과를 과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선양에 머물던 중 즉위식 현장으로 끌려간 조선의 사신들이 홍타이지에 대한 삼궤구고두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황제 즉위식 현장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홍타이지는 아마도 조선의 사신들이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자신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례를 고분고분 수행하리라 기대했던 것 같은데, 사신들은 자신들의 삼궤구고두 수행이 곧 조선 또한 홍타이지의 칭제에 동참했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목숨을 걸고 저항한 것이다. 조선 사신들의 삼궤구고두 거부는 홍타이지가 칭제의 첫 번째 명분으로 내건 ‘조선 정복‘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홍타이지는 자신의 칭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짜로 조선을 정복하는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조선 사신들이 흙탕물을 끼얹었다고 할 수 있는 즉위식으로부터 여덟 달이 지난 병자년 십이월 초, 홍타이지가 마침내 청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오늘날 우리가 병자호란이라고 부르는 전면전을 개시했다.  - P31

조선은 국왕과 조정은 강화도로 건너가고, 각 지역의 군민은 평지의 성을 떠나 산성으로 들어가서 전쟁을 지구전으로 끌고 간다는 방어 전략을 세우고 청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전략을 미리 간파한 홍타이지는 개전 초기 서울을 곧바로 기습 타격하는 작전과 조선군의 산성 방어 거점들을 그대로 지나치는 작전을 구사했다. 홍타이지의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청군의 선봉대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남하하였고, 전방 지역의 조선군은 그들의 초고속 진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 P32

인조 15년 정축년(1637) 정월 중순, 남한산성 포위망을 완성한 청군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남한산성의 식량이 바닥나기를 기다리는 고사枯死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아무리 일러도 이월 말은 되어야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 홍타이지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청군 진영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홍타이지는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귀국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홍타이지를 포함한 청군 지휘부는 대다수가 어려서 천연두를 앓은 적이 없기 때문에 평소에도 늘 천연두, 즉 마마의 공포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마 환자가 발발하면 감염을 피하고자 ‘자가격리‘를 위한 칩거에 들어가곤 했다. 전쟁에 나가더라도 감염의 위험이 높은 지역에서의 작전 참가는 기피하였다.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청군 진영의 천연두 발발은 홍타이지가 전쟁의 조기 종결을 추진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 P33

 오랑캐의 신변 안전 보장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성 대신에 홍타이지가 원래 원했던 군신 관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사실상의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인조의 출성을 고집했다.
인조의 출성 여부를 둘러싸고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청군은 인조의 출성을 압박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남한산성을 공격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래 예정보다 한 달가량을 앞당겨 강화도 점령 작전을 감행했다. 당시 강화도에는 종묘사직의 신주와 왕실 및 신료들의 가족이 피난을 가 있었던 터라, 청군의 강화도 점령은 남한산성의 농성 의지를 일거에 꺾고 인조의 출성을 이끄는 최후의 결정타가 될 수 있었다. - P35

 병자호란 무렵의 조선은 명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국력도 크게 쇠퇴하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겨우 10년도 지나지 않아 멸망의 길에 들어서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는 명은 두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심지어 청도 마찬가지였다. 1644년에 시작된 급변 사태는 그야말로 ‘천붕지열‘天崩地裂, 즉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당시의 조선이 보기에 명의 멸망과 청의 중국 정복이라는 사건은 한바탕의 비극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나중에 조선에서는 거의 입에 올리지 않은, 어찌 보면 더 비극적인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청의 동맹 세력에 편입되어 명과 싸웠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병자호란 직후 청이 눈엣가시와 같던 조선 연해 가도錦州주둔의 명군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수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명과 청이 요서초의 진저우 일대에서 운명을 걸고 벌인 한판 대결에서도 조선은 청을 위해 병력과 군량을 댔다. 1644년 섭정왕政王 도르곤(1612~1650) 이 이끄는 청군이 명의 수도 베이징에 입성할 때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가 그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의 비극적인 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명의 멸망 이후 조선인들이 명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 마음이 아마 조선을 이러한 비극적인 처지로 몰아넣은 청나라 오랑캐에 대한 원망으로 변환되어 삼전도의 치욕으로 생긴 원한을 증폭시키지 않았을까? - P40

영조는 긴 치세의 전반기 동안 ‘오랑캐의 운수는 100년을 가지 못한다‘는 역사의 가르침을 간직하며 청이 머지않아 멸망하리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청은 멸망하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세력과 판도를 키우더니 1760년경에 이르러서는 숙적 준가르를 절멸시키는 데 성공하여 공전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제 청의 멸망은 황하가 맑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기다려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에 영조는 한편으로 황하가 맑아지는 기적의 날을 여전히 기다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중화 문명의 보존을 자임하였다. 앞의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중원의 문물을 보존하면서 명 황제들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 조선의 도덕적 의무라고 여겼다. 영조는 1757년에도 "만약 황하가 맑아진다면, (중국은) 반드시 와서 우리나라를 본받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중화의 보존은 영조에세 도덕적 의무이자 문화적 자존감의 원천인 동시에 조선의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였다. - P58

1644년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이자성李自成(1606~1645)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게 떨어지고 숭정제가 자결하는 돌발 사태가 일어났다. 청나라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베이징을 점령하고는 아예 자신들의 수도마저 그곳으로 옮겨버렸다. 이 사건은 보통 청의 입관이라고 불린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하는 만리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 안쪽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입관 전 시기 서울과 선양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의 입장에서 청나라의 베이징 천도는 여행 거리와 기간, 그리고 여행으로 인한 노고가 대폭 증가함을 의미했다. 압록강을 건너 선양까지는 옛날 거리 단위로 540리에 불과했다. 대략 일주일 조금 넘게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베이징까지는 무려 2,000리가 넘는 길이었다.  - P68

「이처럼 구월 · 시월 · 십일월에 잇따라 사신을 출발시켜야 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동지사겸 연공사 일행이 베이징에 도착한 음력 십일월에 청나라가 삼절, 즉 동지 · 정조·성절의 병공과 동시에 연공 방물의 감축을 발표하였다. 베이징 천도로 인해 조선 사신의 여정이 길어지면서 부담이 너무 커졌다는 것을 주된 이유로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이듬해인 1645년부터 ‘1년 4행‘의무를 단 한 차례의 사신 파견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세 차례의 절사와 연공사를 합한 사행이었으므로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어떤 명절에 맞추어 보낼 것인지가 문제였다. 청나라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제시하였다. 그들은 정월 초하루, 즉 설날을 선택하였다. - P70

인조가 삼궤구고두를 올림으로써 홍타이지의 신하가 된 직후에 열린 연회에서 홍타이지는 인조를 그의 세 아들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함께 단상에 올라와 자리를 잡도록 했다. 당시 단상의 자리 배치를 보면, 남쪽을 향해 앉은 홍타이지를 중심으로 왼쪽의 가장 상석에 인조가 앉았고, 그다음에 청의 공세 명과 소현세자가 순서대로 자리를 잡았다. 오른쪽에는 청의 왕공 네 명 다음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앉았다. 삼전도 의례가 사실상 항복 의식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자면, 이날의 연석에서 인조 부자를 단상으로 올라와 앉게 한 것도 뜻밖의 일인 터에 인조의 석차가 홍타이지 바로 다음이었다는 점은 더더욱 의외라고 하겠다.
인조를 제2위의 자리에 앉힌 것은 홍타이지의 결정이었다.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에 따르면, 그가 이런 뜻밖의 결정을 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비록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하긴 했지만 인조는 그래도 "역시 한 나라의 왕"이라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구절은 만주어 기록에서 "다른 나라의왕"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니, 홍타이지는 인조를 엄연한 외국의 군주로 대우했다는 말이다. 조선의 기록도 이날의 잔치에서 홍타이지가 인조에 대한 존경과 우대의 뜻을 표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아마도 자신이 아는 범위의 세계에서 조선이 명나라 다음가는 대국이라는 인식의 발로였을 터이지만, 그 동기야 어쨌든 간에 이날 홍타이지의 인조에 대한 우대는 훗날 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조선이 높은 위상을 점하게 되는 역사적 연원이 되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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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의 열하를 가다

이 책의 제목 ‘1780 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에서 ‘1780 년‘과 ‘열하‘는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시·공간을 나타내고자 쓴 말이다. 역사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독자라도 ‘1780 년에 도대체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다는 거지?‘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다. 1780년은 지금까지 한국사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해‘로 여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열하라는 지명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열하 하면 금방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책 제목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 P11

이러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보통‘사대자소事大字小‘ 관계의 전형이라고 한다. 사대자소란 ‘약소국은 강대국을 지성으로 섬기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자애롭게 보살핀다‘는 의미이다. 대국과 소국의 관계를 마치 부모와 자식 사이 같은 따뜻한 관계에 빗댄 것이다. 관계의 실상이 정말 그러했다면, 약육강식의 냉혹한 국제 관계에 비하자면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물론 주권 평등의 원칙을 무시한 것이므로 오늘날에는 절대 통할 수 없는 말이지만, 적어도 옛날 사람들한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야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강대국이 되고, 어느 쪽이 약소국의 입장에 설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문제였다. 청과 조선의 경우는 이게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입장이 순식간에 뒤집혔기 때문이다.
조선은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기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마찬가지로 여진인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 또한 당연하게 여겼다. 훗날 청나라의 핵심을 형성하는 만주인들은 여진인들의 후예였고, 여진인들은 원래 조선 땅 동북쪽에 빌붙어 지내는 ‘오랑캐‘에 불과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조선 초기의 실록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보면 여진의 추장들이 때마다 예물을 바치러 찾아오고, 조선의 왕들이 선물을 하사하면서 그들을 다독이는 모습을 금세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여진은 조선을 섬기고 조선은 명을 섬기는 위계hierarchy 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16세기 말까지는 그랬다. - P23

인조 14년 병자년(1636) 이월에 후금의 사신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자는 취지의 요구를 들이밀었다. 이는 기존의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전환하자는 의미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론이 들끓었고, 후금의 사신은 거의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곧바로 단절되지는 않았다. 조선 조정은 매년 봄마다 보내던 춘신사春信使를 그대로 파견하였다.
같은 해 사월,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이 선양에서 거행되었다. 이제 홍타이지는 ‘관온인성 황제 寬溫仁聖皇帝(만주어로는 ‘고신 온초 후왈리야 언두링거 한Gosin Onco Hüwaliyasun EndringgeHan)로 불리게 되었고, 이에 맞추어 국호는 대청국大淸國(만주어로는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으로, 연호는 천총天聰에서 숭덕崇德으로 바뀌었다.
즉위식에서 홍타이지는 자신의 ‘칭제‘稱帝를 정당화하는 명분의 첫 번째로 ‘조선 정복‘의 업적을 내걸었는데, 이는 정묘호란의 성과를 과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선양에 머물던 중 즉위식 현장으로 끌려간 조선의 사신들이 홍타이지에 대한 삼궤구고두三궤九叩頭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황제 즉위식 현장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홍타이지는 아마도 조선의 사신들이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자신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례儀禮를 고분고분 수행하리라 기대했던 것 같은데, 사신들은 자신들의 삼궤구고두 수행이 곧 조선 또한 홍타이지의 칭제에 동참했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목숨을 걸고 저항한 것이다. 조선 사신들의 삼궤구고두 거부는 홍타이지가 칭제의 첫 번째 명분으로 내건 ‘조선 정복‘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홍타이지는 자신의 칭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짜로 조선을 정복하는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조선 사신들이 흙탕물을 끼얹었다고 할 수 있는 즉위식으로부터 여덟 달이 지난 병자년 십이월 초, 홍타이지가 마침내 청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오늘날 우리가 병자호란이라고 부르는 전면전을 개시했다.  - P31

조선은 국왕과 조정은 강화도로 건너가고, 각 지역의 군·민은 평지의 성을 떠나 산성으로 들어가서 전쟁을 지구전으로 끌고 간다는 방어 전략을 세우고 청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전략을 미리 간파한 홍타이지는 개전 초기 서울을 곧바로 기습 타격하는 작전과 조선군의 산성 방어 거점들을 그대로 지나치는 작전을 구사했다. 홍타이지의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청군의 선봉대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남하하였고, 전방 지역의 조선군은 그들의 초고속 진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 P33

인조 15년 정축년(1637) 정월 중순, 남한산성 포위망을 완성한 청군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남한산성의 식량이 바닥나기를 기다리는 고사枯死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아무리 일러도 이월 말은 되어야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 홍타이지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청군 진영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홍타이지는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귀국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홍타이지를 포함한 청군 지휘부는 대다수가 어려서 천연두를 앓은 적이 없기 때문에 평소에도 늘 천연두, 즉 마마의 공포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마 환자가 발발하면 감염을 피하고자 ‘자가격리‘를 위한 칩거에 들어가곤 했다. 전쟁에 나가더라도 감염의 위험이 높은 지역에서의 작전 참가는 기피하였다.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청군 진영의 천연두 발발은 홍타이지가 전쟁의 조기 종결을 추진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 P33

 인조는 출성 대신에 홍타이지가 원래 원했던 군신 관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사실상의 항복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인조의 출성을 고집했다.
인조의 출성 여부를 둘러싸고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청군은 인조의 출성을 압박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남한산성을 공격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래 예정보다 한 달가량을 앞당겨 강화도 점령 작전을 감행했다. 당시 강화도에는 종묘사직의 신주와 왕실 및 신료들의 가족이 피난을 가 있었던 터라, 청군의 강화도 점령은 남한산성의 농성 의지를 일거에 꺾고 인조의 출성을 이끄는 최후의 결정타가 될 수 있었다. - P35

병자호란 무렵의 조선은 명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국력도 크게 쇠퇴하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겨우 10년도 지나지 않아 멸망의 길에 들어서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는 명은 두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심지어 청도 마찬가지였다. 1644년에 시작된 급변 사태는 그야말로 ‘천붕지열, 즉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당시의 조선이 보기에 명의 멸망과 청의 중국 정복이라는 사건은 한바탕의 비극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나중에 조선에서는 거의 입에 올리지 않은, 어찌 보면 더 비극적인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청의 동맹 세력에 편입되어 명과 싸웠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병자호란 직후 청이 눈엣가시와 같던 조선 연해 가도 주둔의 명군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수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명과 청이 요서遼西의 진저우 일대에서 운명을 걸고 벌인 한판 대결에서도 조선은 청을 위해 병력과 군량을 댔다. 1644년 섭정왕攝政王 도르곤(1612~1650) 이 이끄는 청군이 명의 수도 베이징에 입성할 때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가 그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의 비극적인 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명의 멸망 이후 조선인들이 명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 마음이 아마 조선을 이러한 비극적인 처지로 몰아넣은 청나라 오랑캐에 대한 원망으로 변환되어 삼전도의 치욕으로 생긴 원한을 증폭시키지 않았을까? - P40

영조는 긴 치세의 전반기 동안 ‘오랑캐의 운수는 100년을 가지 못한다‘는 역사의 가르침을 간직하며 청이 머지않아 멸망하리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청은 멸망하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세력과 판도를 키우더니 1760년경에 이르러서는 숙적 준가르를 절멸시키는 데 성공하여 공전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제 청의 멸망은 황하가 맑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기다려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에 영조는 한편으로 황하가 맑아지는 기적의 날을 여전히 기다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중화 문명의 보존을 자임하였다. 앞의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중원의 문물을 보존하면서 명 황제들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가는 것(대보단大報壇)이 조선의 도덕적 의무라고 여겼다. 영조는 1757년에도 "만약 황하가 맑아진다면, (중국은 반드시 와서 우리나라를 본받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중화의 보존은 영조에게 도덕적 의무이자 문화적 자존감의 원천인 동시에 조선의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였다. - P58

1644년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이자성李自⅔成(1606~1645)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게 떨어지고 숭정제가 자결하는 돌발 사태가 일어났다. 청나라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베이징을 점령하고는 아예 자신들의 수도마저 그곳으로 옮겨버렸다. 이 사건은 보통 청의 입관이라고 불린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하는 만리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 안쪽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입관 전 시기 서울과 선양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의 입장에서 청나라의 베이징 천도는 여행 거리와 기간, 그리고 여행으로 인한 노고가 대폭 증가함을 의미했다. 압록강을 건너 선양까지는 옛날 거리 단위로 540리에 불과했다. 대략 일주일 조금 넘게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베이징까지는 무려 2,000 리가 넘는 길이었다.  - P68

이처럼 구월·시월 · 십일월에 잇따라 사신을 출발시켜야 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동지사겸연공사 일행이 베이징에 도착한 음력 십일월에 청나라가 삼절 三節즉 동지 · 정조·성절의 병공과 동시에 연공 방물의 감축을 발표하였다. 베이징 천도로 인해 조선 사신의 여정이 길어지면서 부담이 너무 커졌다는 것을 주된 이유로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이듬해인 1645년부터 ‘1년 4행‘ 의무를 단 한 차례의 사신 파견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세 차례의 절사와 연공사를 합한 사행이었으므로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어떤 명절에 맞추어 보낼 것인지가 문제였다. 청나라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제시하였다. 그들은 정월 초하루, 즉 설날을 선택하였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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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승복은 오전에 흠잡을 데 없는 자격을 갖춘 교육자들의 강력한 증언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소위 지체 아동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발달을 연구하고, 혁신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온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아이들이 배우고, 성장하고 행복해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그 아이들을 교육하지 않는 것은 잠재력을 묻어버리는 행위로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으며, 소위 지체 아동도 배울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했다고 모든 증인이 입을 모았다. 생생한 경험적 증거는 설득력이 넘쳤다. 판사들이 보기에 주정부의 승복은 "압도적인 중거에 대한 영리한 반응"일 뿐이었다.
길홀은 승리를 거두었다. PARC의 부모들을 대신해 쟁취한 승리였다. 그는 소위 ‘법원 조정서‘ 초안을 작성할 권리를 위임받았다. 조정서란 법정다툼을 벌이던 양자가 합의에 도달했을 때 상세한 합의내용을 적은 문서다. 펜실베이니아주 정신장애인들을 위해 보다 나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2개월간 용어 하나하나를 심사숙고하며 주 정부와 13개 교육청이 취해야 할조치들을 문서화했다. 과거와 깨끗이 결별하고 신속하게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우선 펜실베이니아주의 모든 가정, 펜헐스트를 비롯한 모든 수용시설, 모든 학교에서 "정신지체" 어린이를 찾아내라고 요구했다. 기한은 이듬해 6월까지였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제 자녀가 무료로 공교육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부모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 후 각급 학교는 어린이 각자의 학습 능력에 맞는 교육과 훈련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해야 했다. 길훌은 이 말이무슨 뜻인지 분명히 했다. 모든 어린이에게 최대한 "정상적인" 환경에서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규 공립학교 교실이 특수 공립학교 교실보다 바람직하며, 특수 공립학교 교실이 기타 모든 교육훈련 프로그램보다 바람직하다." - P240

남은 것은 주지사의 서명뿐이었다. 법안이 그의 책상에 놓인 날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주지사에게는 12일이 주어졌다. 그사이에 법안을 거부하거나, 서명하거나,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을수 있었다. 그런 경우 법안은 자동 통과되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주지사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건드는 말할 것도 없고 자폐공동체 전체가 걱정에 휩싸였다. 1974년은 로널드 레이건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주지사 임기가 끝나는 해였다. 그는 주 정부의 방만한 재정지출에 확실히 제동을 걸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당선되었고, 예산을 가장 방만하게 낭비하는 분야가 교육이라고 여러 차례 지적한바 있었다. 자폐교육법에는 좋지 않은 징조였다. 법안이 통과되면 매년 학교에 입학하는 자폐 어린이 한 명당 3,000달러씩의 비용이들어갈 것이었다.
••••••
1974년 9월30일, 임기 마지막날 레이건은 법안에 서명했다. 그날레이건은 직무실 책상에 앉아 기념촬영을 했다. 그의 뒤로 몇몇 주의원들 사이에 절친한 친구인 로이드 놀란의 모습이 보인다. 버나드 림랜드도 있었다. 킴벌리 건드와 함께였다. 그날 하비는 진료실에서환자를 보았다. 코니는 평소처럼 집에서 아들 셋을 돌보았다.
주지사가 법안에 서명한 후 레이핀 부부는 바로 소를 취하했다. 이제 막 레이건이 서명하여 발효된 그 법은 눈물어린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제 숀은 물론, 캘리포니아의 모든 자폐 어린이가 공립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이었다. - P261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며칠간 같은 과정을 반복하자 개들은 실험이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반응을 보였다. 고기 분말을 입에 넣어주기 전부터 침을 흘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개들은 실험용 가운을 입은 파블로프의 조수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을 흘렸다. 소화관 연구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침 분비량을 측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때 파블로프의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통찰이 떠올랐다. 파블로프와 개가 영원히 역사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개들은 환경으로부터 뭔가를 학습한 것이었다! 혀에 음식이 닿았다는 자연적 자극이아니라 이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모습, 흰 가운을 입은 실험보조원의 모습을 고기 분말의 맛과 연관시켰다. 이런 행동은 조건반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파블로프는 조건반사를 이해하기 위해 몇 년간 연구에 깊이 빠져 종을 울리는 등 다른 자극을 이용해 개의 소화 관련 반응들을 조절할 수 있는지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다. 1904년 그는 소화과정을 규명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수락 연설에서 열띤 어조로 자신이 개척한 심리학 분야에 관해 설명했다. 환경을 조작하여 개의 행동을 통제하는 데 관련된 몇 가지 법칙이 인간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연설을 마치면서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자신을 포함한 과학자들이 "우리의 심리적구조, 그리고 베일에 싸여 있었고 현재도 베일에 싸여 있는 그 작동기전"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밝혀내는 모습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축하를 보냈다.
파블로프가 노벨상을 수상한 뒤로 행동주의 심리학 분야에서 가장 혁명적인 명제는 동물과 인간의 심리가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갖고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1913년 이후 "행동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은 미국의 존 왓슨 John Watson-Ison은 장차 "행동주의 선언"이라고 불리게 될 연설을 통해 기염을 토했다. "행동주의자는 인간과 야수를구분하는 경계선을 인식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입장은 그 대담한 의미는 물론, 인간이 특별하다는 관념에 모욕적이란 면에 있어서도 다윈의 진화론에 비견할 만했다. - P296

그들은 디키의 분노발작을 없애기 위해 당시 발표된 자폐증과 무관한 두 건의 연구에 착안하여 가벼운 처벌과 "소거"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첫 번째 연구에서 워싱턴 대학 연구진은 다루기힘든 유치원 아이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행동 변화를 목록으로 열거하고 그래프로 요약했다. 그들은 교사에게 아이들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지나치게 운다든지, 혼자 논다든지, 도저히 어떻게 할 수없을 정도로 심하게 몸을 긁는 것 등)을 나타내면 완전히 무시하라고 했다. 선생님의 주목을 끌지 못하자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은 이내 "소거" 과정을 거쳐 빠른 시일 내에 완전히 사라졌다.
반대로 사이좋게 노는 등 보다 적절한 행동으로 바뀌면 교사는 즉시 주목했다. 교사의 주목은 강화에 효과적이었다. 적절한 행동의 빈도가 급속히 늘어났던 것이다. "주목"이란 반드시 칭찬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미묘한 개념이었다. 어린이 곁에 더 가까이 다가서 미소를 짓고, 도와주는 일이 모두 주목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니까 오늘날 육아상식처럼 여겨지는 일이 1962년 워싱턴 대학 실험실에서는 놀라운 발견이었던 셈이다. 그전까지 성인의 주목 행동이 어린이에게 강력한 강화 효과를 일으킨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디키를 지켜본 연구팀은 이런 지식을 근거로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아이가 분노발작을 일으키는 동안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는 것은 행동을 더욱 강화하고, 심지어 더 자주 그런 행동을 유도한다는것이었다. 실제로 직원들은 분노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정성을 다해 디키를 달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엄마 역시 똑같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엄마의 본능이나 모성애라고 할 만한 그런 충동이 행동분석가들의 눈에는 문제의 근원인 것 같았다. 엄마는 의도와 전혀 달리 보상을 통해 아이가 더 많은 분노발작을 일으키도록 유도한 셈이었다. - P300

1980년대 중반 혐오치료에 대한 대중의 반발은 장애인권리옹호단체, 부모 단체, 몇몇 유명 교육 전문가들과 힘을 합쳤다. 반대운동은 정확히 목표로 하던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사회적 담론에큰 영향을 미쳤다. 정서적 호소력이 강력했던 데다, 논리 또한 당시거대한 정신병원들을 닫게 만들었던 설득력 있는 주장들 중 하나와일치했던 것이다. 그 주장은 매우 단순했다. 장애인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단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커다란 건물을 지어 가두어 놓는 것이 잘못된 처사인 것처럼, 단지 교육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체험을 강요하는 것도 잘못되었다는 논리였다.
논쟁은 다양한 계층에서 불타올랐다. 1988년 미국자폐협회 AutismSociety of America 는 "혐오치료 기법"에 반대 입장을 채택했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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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내게는 그들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기이한 품격이 상당한 수준의 교양에서 나온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내가 줄리언 모로 교수에게서 발견한 것도 그런 품격이었다. 그가 풍기는 인상이 참신하다거나소박하다거나 하는 것과는 정반대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품격은 타고난 것이 아닌,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고도의 세련된 기술이었다). 공부가 제대로 되든 말든, 나는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들의 품격이 과연 학문적 정진을 통해 획득된 것인지, 나 역시 그들로부터 배우면 그러한 품격에도 도달할 수 있을지 궁금했으나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 내 머리는 너무나 어지러웠다.
결국 나는 머나먼 플래노에서, 아버지의 주유소에서, 그곳에 이르기 위해 달려온 셈이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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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산에 쌓여 있던 눈이 녹고 있었다. 우리는 버니가 죽은 지 몇 주가 지나고나서야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버니는 죽은 지 열흘 만에 발견되었다. 주(州) 경찰, 연방수사국 요원들, 심지어 주 경찰 헬리콥터까지 동원된 버몬트 주 사상 최대의 수색작전이 펼쳐졌다. 대학이 휴교하고, 햄든의 염색공장이 문을 닫았으며, 뉴햄프셔는 물론, 뉴욕 주 북부와 보스턴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정도였다. - P11

1장

인생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암흑의 균열 같은 ‘치명적인 결함‘이 과연 문학 밖에도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내 삶의 치명적인 결함이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 삶을 다채롭게만들어야 한다는 병적인 집착, 바로 그것인 듯하다.
내 이야기다. 내가 가진 광기에 관한 이야기 하나.(A moi. L‘histoire d‘unede mes folies)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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