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1780년의 열하를 가다 이 책의 제목 ‘1780 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에서 ‘1780 년‘과 ‘열하‘는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시·공간을 나타내고자 쓴 말이다. 역사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독자라도 ‘1780 년에 도대체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다는 거지?‘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다. 1780년은 지금까지 한국사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해‘로 여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열하라는 지명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열하 하면 금방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책 제목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 P11
이러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보통‘사대자소事大字小‘ 관계의 전형이라고 한다. 사대자소란 ‘약소국은 강대국을 지성으로 섬기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자애롭게 보살핀다‘는 의미이다. 대국과 소국의 관계를 마치 부모와 자식 사이 같은 따뜻한 관계에 빗댄 것이다. 관계의 실상이 정말 그러했다면, 약육강식의 냉혹한 국제 관계에 비하자면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물론 주권 평등의 원칙을 무시한 것이므로 오늘날에는 절대 통할 수 없는 말이지만, 적어도 옛날 사람들한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야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강대국이 되고, 어느 쪽이 약소국의 입장에 설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문제였다. 청과 조선의 경우는 이게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입장이 순식간에 뒤집혔기 때문이다. 조선은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기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마찬가지로 여진인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 또한 당연하게 여겼다. 훗날 청나라의 핵심을 형성하는 만주인들은 여진인들의 후예였고, 여진인들은 원래 조선 땅 동북쪽에 빌붙어 지내는 ‘오랑캐‘에 불과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조선 초기의 실록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보면 여진의 추장들이 때마다 예물을 바치러 찾아오고, 조선의 왕들이 선물을 하사하면서 그들을 다독이는 모습을 금세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여진은 조선을 섬기고 조선은 명을 섬기는 위계hierarchy 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16세기 말까지는 그랬다. - P23
인조 14년 병자년(1636) 이월에 후금의 사신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자는 취지의 요구를 들이밀었다. 이는 기존의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전환하자는 의미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론이 들끓었고, 후금의 사신은 거의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곧바로 단절되지는 않았다. 조선 조정은 매년 봄마다 보내던 춘신사春信使를 그대로 파견하였다. 같은 해 사월,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이 선양에서 거행되었다. 이제 홍타이지는 ‘관온인성 황제 寬溫仁聖皇帝(만주어로는 ‘고신 온초 후왈리야 언두링거 한Gosin Onco Hüwaliyasun EndringgeHan)로 불리게 되었고, 이에 맞추어 국호는 대청국大淸國(만주어로는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으로, 연호는 천총天聰에서 숭덕崇德으로 바뀌었다. 즉위식에서 홍타이지는 자신의 ‘칭제‘稱帝를 정당화하는 명분의 첫 번째로 ‘조선 정복‘의 업적을 내걸었는데, 이는 정묘호란의 성과를 과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선양에 머물던 중 즉위식 현장으로 끌려간 조선의 사신들이 홍타이지에 대한 삼궤구고두三궤九叩頭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황제 즉위식 현장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홍타이지는 아마도 조선의 사신들이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자신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례儀禮를 고분고분 수행하리라 기대했던 것 같은데, 사신들은 자신들의 삼궤구고두 수행이 곧 조선 또한 홍타이지의 칭제에 동참했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목숨을 걸고 저항한 것이다. 조선 사신들의 삼궤구고두 거부는 홍타이지가 칭제의 첫 번째 명분으로 내건 ‘조선 정복‘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홍타이지는 자신의 칭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짜로 조선을 정복하는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조선 사신들이 흙탕물을 끼얹었다고 할 수 있는 즉위식으로부터 여덟 달이 지난 병자년 십이월 초, 홍타이지가 마침내 청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오늘날 우리가 병자호란이라고 부르는 전면전을 개시했다. - P31
조선은 국왕과 조정은 강화도로 건너가고, 각 지역의 군·민은 평지의 성을 떠나 산성으로 들어가서 전쟁을 지구전으로 끌고 간다는 방어 전략을 세우고 청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전략을 미리 간파한 홍타이지는 개전 초기 서울을 곧바로 기습 타격하는 작전과 조선군의 산성 방어 거점들을 그대로 지나치는 작전을 구사했다. 홍타이지의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청군의 선봉대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남하하였고, 전방 지역의 조선군은 그들의 초고속 진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 P33
인조 15년 정축년(1637) 정월 중순, 남한산성 포위망을 완성한 청군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남한산성의 식량이 바닥나기를 기다리는 고사枯死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아무리 일러도 이월 말은 되어야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 홍타이지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청군 진영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홍타이지는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귀국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홍타이지를 포함한 청군 지휘부는 대다수가 어려서 천연두를 앓은 적이 없기 때문에 평소에도 늘 천연두, 즉 마마의 공포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마 환자가 발발하면 감염을 피하고자 ‘자가격리‘를 위한 칩거에 들어가곤 했다. 전쟁에 나가더라도 감염의 위험이 높은 지역에서의 작전 참가는 기피하였다.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청군 진영의 천연두 발발은 홍타이지가 전쟁의 조기 종결을 추진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 P33
인조는 출성 대신에 홍타이지가 원래 원했던 군신 관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사실상의 항복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인조의 출성을 고집했다. 인조의 출성 여부를 둘러싸고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청군은 인조의 출성을 압박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남한산성을 공격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래 예정보다 한 달가량을 앞당겨 강화도 점령 작전을 감행했다. 당시 강화도에는 종묘사직의 신주와 왕실 및 신료들의 가족이 피난을 가 있었던 터라, 청군의 강화도 점령은 남한산성의 농성 의지를 일거에 꺾고 인조의 출성을 이끄는 최후의 결정타가 될 수 있었다. - P35
병자호란 무렵의 조선은 명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국력도 크게 쇠퇴하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겨우 10년도 지나지 않아 멸망의 길에 들어서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는 명은 두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심지어 청도 마찬가지였다. 1644년에 시작된 급변 사태는 그야말로 ‘천붕지열, 즉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당시의 조선이 보기에 명의 멸망과 청의 중국 정복이라는 사건은 한바탕의 비극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나중에 조선에서는 거의 입에 올리지 않은, 어찌 보면 더 비극적인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청의 동맹 세력에 편입되어 명과 싸웠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병자호란 직후 청이 눈엣가시와 같던 조선 연해 가도 주둔의 명군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수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명과 청이 요서遼西의 진저우 일대에서 운명을 걸고 벌인 한판 대결에서도 조선은 청을 위해 병력과 군량을 댔다. 1644년 섭정왕攝政王 도르곤(1612~1650) 이 이끄는 청군이 명의 수도 베이징에 입성할 때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가 그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의 비극적인 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명의 멸망 이후 조선인들이 명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 마음이 아마 조선을 이러한 비극적인 처지로 몰아넣은 청나라 오랑캐에 대한 원망으로 변환되어 삼전도의 치욕으로 생긴 원한을 증폭시키지 않았을까? - P40
영조는 긴 치세의 전반기 동안 ‘오랑캐의 운수는 100년을 가지 못한다‘는 역사의 가르침을 간직하며 청이 머지않아 멸망하리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청은 멸망하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세력과 판도를 키우더니 1760년경에 이르러서는 숙적 준가르를 절멸시키는 데 성공하여 공전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제 청의 멸망은 황하가 맑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기다려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에 영조는 한편으로 황하가 맑아지는 기적의 날을 여전히 기다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중화 문명의 보존을 자임하였다. 앞의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중원의 문물을 보존하면서 명 황제들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가는 것(대보단大報壇)이 조선의 도덕적 의무라고 여겼다. 영조는 1757년에도 "만약 황하가 맑아진다면, (중국은 반드시 와서 우리나라를 본받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중화의 보존은 영조에게 도덕적 의무이자 문화적 자존감의 원천인 동시에 조선의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였다. - P58
1644년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이자성李自⅔成(1606~1645)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게 떨어지고 숭정제가 자결하는 돌발 사태가 일어났다. 청나라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베이징을 점령하고는 아예 자신들의 수도마저 그곳으로 옮겨버렸다. 이 사건은 보통 청의 입관이라고 불린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하는 만리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 안쪽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입관 전 시기 서울과 선양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의 입장에서 청나라의 베이징 천도는 여행 거리와 기간, 그리고 여행으로 인한 노고가 대폭 증가함을 의미했다. 압록강을 건너 선양까지는 옛날 거리 단위로 540리에 불과했다. 대략 일주일 조금 넘게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베이징까지는 무려 2,000 리가 넘는 길이었다. - P68
이처럼 구월·시월 · 십일월에 잇따라 사신을 출발시켜야 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동지사겸연공사 일행이 베이징에 도착한 음력 십일월에 청나라가 삼절 三節즉 동지 · 정조·성절의 병공과 동시에 연공 방물의 감축을 발표하였다. 베이징 천도로 인해 조선 사신의 여정이 길어지면서 부담이 너무 커졌다는 것을 주된 이유로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이듬해인 1645년부터 ‘1년 4행‘ 의무를 단 한 차례의 사신 파견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세 차례의 절사와 연공사를 합한 사행이었으므로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어떤 명절에 맞추어 보낼 것인지가 문제였다. 청나라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제시하였다. 그들은 정월 초하루, 즉 설날을 선택하였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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