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짓기 행동의 기원

이 세상 어딘가에 자연과 인간이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이루며 살아가는 곳이 있고, 우리 역시 타락한 서구문화의 폐해만 없다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막연한 기대를 우린 아직까지 떨쳐 버리지 못했다.
- 멜빈 코너, [왜 무모한 자들이 살아남는가]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하는 행위는 참으로 기쁘고 즐거울 뿐 아니라 일상의 대화를 풍성하게 하지만, 그만큼 우리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사의 여러 단면들 가운데 문화를 초월해서 이보다 더 우리로하여금 열띤 격론을 벌이게 하고 법률을 제정케 하며 정교한 예식을 행하게 하는 요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짝짓기는 이해하기 힘든점투성이다.  - P17

 생존상의 이득이 아니라 번식상의 이득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어떤 형질이 선택되어 진화하는 현상을 다윈은 성선택(sexual selection)이라 이름 붙였다.
다윈에 따르면 성선택은 두 가지 형태를 띤다. 우선 동성의 개체들이 이성 배우자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할 기회를 놓고 경쟁을 벌여서 경쟁에서 이긴 개체가 더 많은 기회를 얻는 형태가 있다. 두 마리 산양이 서로뿔을 부딪치며 싸우는 모습은 이러한 성내 경쟁 (intrasexual competition)을생생하게 보여 주는 예이다. 성 내 경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 주는 특질들인 강한 힘, 지능, 동료들과의 친화력 등은 경쟁의 승자가 더자주 짝짓기를 해서 더 많은 후손들에게 유전자를 전해 주게끔 도와주었기 때문에 진화하였다. 성선택의 또 다른 형태에서는 하나의 성(性)에 속하는 개체들이 특정한 특질을 지닌 이성 배우자를 다른 배우자보다 더 선호한다. 이렇게 배우자로 더 자주 선택받는 개체들은 유전자를 후대에 보다 많이 남길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러한 특질들이 진화하게 된다. 선호받는 특질이 없는 동물들은 짝짓기의 향연에 초대받지못하고 그들의 유전자는 종착점에 다다른다. 공작 암컷들이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깃털을 내보이는 수컷들을 선호했기 때문에, 변변찮은 깃털을 지닌 수컷들은 진화의 먼지 속으로 내동댕이쳐 잊혀졌다. 오늘날 공작 수컷들이 모두 눈부신 깃털을 뽐내는 까닭은 진화의 역사를 통해 공작 암컷들이 아름답고 현란한 수컷들과 짝짓기하는 것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 P20

부정에 대처하기 위해 진화한 심리 전략의 하나가 바로 질투이다. 자기 배우자가배신했을지 모른다는 신호에 불같이 반응해서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위한 행동에 나선 조상들은 그렇지 않았던 조상들을 제치고 자연선택되었다. 즉 배우자의 부정을 방지하는 데 실패한 조상들은 낮은 번식성공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질투라는 감정은 애정 관계에 대한 위협적 요인들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여러 가지 행동을 유발시킨다. 예컨대 성적 질투는 두 가지 판이하게 다른 행동, 즉 경계(vigilance)와 폭력(violence)을 낳는다. 어떤 경우에는 질투심을 느낀 남편이 아내가 외출할 때 몰래 뒤를 밟는다거나, 아내가 간다고 한 곳에 실제로 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불시에 전화를건다거나, 파티에서 아내를 유심히 지켜본다거나, 아내의 우편물을 몰래 읽어 볼 수 있다. 이러한 행동들은 경계 행동에 속한다. 다른 경우에는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 포착된 바깥 남자를 질투에 빠진 남편이 위협하거나, 이 경쟁자를 주먹으로 때리거나, 친구들을 동원해서 흠씬 두들겨 패주거나, 아니면 경쟁자의 창문에다 벽돌을 집어던질 수 있다.
이러한 행동들은 폭력 행동에 속한다. 이 두 가지 범주의 행동들, 즉 경계와 폭력은 질투라는 동일한 심리 전략이 서로 다르게 표출된 결과이다. 이들은 배우자가 배신할지 모른다는 적응적 문제를 이렇게도 해결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 P36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 대량 소비되는 음식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가 맥도널드를 좋아하는 유전자를 진화시킨 것은 아니다. 맥도널드에서 사 먹는 음식들로부터 과거의 환경에 맞추어 진화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쓰이고 있는 생존 전략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엄청난 양의 지방, 당분, 단백질과 염분을 햄버거, 밀크셰이크, 감자튀김, 피자 등을 통해 소비한다. 패스트푸드 체인점이 인기를끄는 이유는 바로 대단히 농축된 영양분을 다량으로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영양분 결핍에 시달렸던 과거 환경에서 진화한 음식 선호가 잘드러나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양분을 진화 역사를 통틀어 유례없이 어디서나 많이 구할 수 있는 오늘날 우리는 영양분을 과다 섭취하고 있다. 과거의 생존 전략이 현재의 우리의 건강을 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과 다른 과거의 환경 조건에서 진화한 음식에 대한 선호를 떨쳐 버릴 수 없다. 이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지난 수백 년간의 급격한 변화를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느린 시간 척도상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환경이 어땠는지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뱀에 대한 공포나 아이들에 대한 애정 같은 현재의 선호 양상으로부터 과거의 환경을 추측해볼 수는 있다. 우리는 태곳적 세상에 맞춰 설계된 장비들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생존 전략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진화된 짝짓기 전략도 생존과 번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현대에는 부적응적일 수 있다. 예컨대 에이즈(AIDS)의 등장은 조상 환경 때에 비하여 일시적 성 관계가 생존에 훨씬 더 위험한 손실을 끼치게끔 만들었다. 우리의 진화된 성 전략을 이해함으로써만이, 곧 그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조건하에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는지 인식함으로써만이 우리의 현재 행동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생긴다. - P43

변화에 대해 진화심리학이 암시하는 바를 잘못 추론하는 데서 또다른 저항이 생긴다. 어떤 짝짓기 전략이 진화생물학에 근거하고 있다면 이 전략은 바꿀 수 없고, 고칠 수 없고, 불변하다고 흔히 간주된다.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맹목적인 로봇처럼 우리는 생물학적 명령이 지시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의 행동을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과 환경적으로 결정되는 것, 두 가지 서로 독립적인 범주로 잘못 구분하는 데서 출발한다. 사실 인간 행동은 둘의 상호 작용의 산물이다. DNA의 가닥 모두는 특정한 환경적, 문화적 맥락에서 풀린다. 사람의 일생을 통해 그 사람만의 고유한 사회적, 물리적 자극들이 진화된 심리 기제에 입력되며 모든 행동은 예외없이 이러한 심리 기제와 그에 대한 환경적 영향의 합작물이다. 진화심리학은 상호 작용을 대단히 강조하는 관점이며, 다시 말해 인간 심리를만들어 냈으며 오늘날에도 그 심리를 이끌고 있는 역사적, 발달적, 문화적, 상황적 특질들을 규명하려는 흐름이다. - P49

진화심리학에 대한 또 다른 저항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나온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진화적 설명은 남녀의 불평등을 암시하고, 남성과여성이 맡을 수 있는 역할에 제한을 가하고,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을부추기고, 여성을 권력과 자원으로부터 영원히 배제시키려 하고, 현상태를 타파하기가 어렵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확산시킨다고 우려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은 때로 진화적 설명을 거부한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이 인간 짝짓기에 대하여 이처럼 두려운 함의를 내포하지는 않는다. 진화적으로 보면 남성과 여성은 상당수 혹은 대부분의 영역에서 동일하며, 인간의 진화 역사를 통해서 상이한 적응적문제를 지속적으로 맞닥뜨려 왔던 제한된 영역에서만 다르다. 예컨대 남녀는 특정한 성 전략을 각기 어느 정도 더 선호하느냐를 두고 달라질뿐, 구사할 수 있는 성 전략의 전체 목록은 동일하다.
진화심리학은 남녀의 진화된 짝짓기 행동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지, 남녀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규정하지 않는다. 또한 진화심리학은 적절한 성 역할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진화심리학은 어떠한 정치적 의제도 없다.  - P50

 예를 들면 일본 여성은 남성보다 약 150퍼센트 이상 경제적 전망을 중시한다. 네덜란드여성은 남성보다 약 36퍼센트 더 경제적 전망을 중시한다. 이는 다른어느 나라 여성들보다 낮은 수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차는 변하지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결혼 상대자의 경제적 자원을더원한다.
이 발견은 인간의 짝짓기 심리가 진화적 토대 위에 세워져 있음을보여 주는 최초의 상세한 비교문화적 증거이다. 우리의 조상 여성은 체내 수정, 9개월 동안의 임신, 그리고 수유라는 엄청난 짐을 짊어졌기 때문에 자원을 소유한 배우자를 선택함으로써 엄청난 혜택을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배우자 선호 덕분에 우리의 조상 여성들은 생존 및 번식상의 적응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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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짓기 행동의 기원

이 세상 어딘가에 자연과 인간이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이루며 살아가는 곳이 있고, 우리 역시 타락한 서구문화의 폐해만 없다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막연한 기대를 우린 아직까지 떨쳐 버리지 못했다.
- 멜빈 코너, [왜 무모한 자들이 살아남는가]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하는 행위는 참으로 기쁘고 즐거울 뿐 아니라 일상의 대화를 풍성하게 하지만, 그만큼 우리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사의 여러 단면들 가운데 문화를 초월해서 이보다 더 우리로하여금 열띤 격론을 벌이게 하고 법률을 제정케 하며 정교한 예식을 행하게 하는 요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짝짓기는 이해하기 힘든점투성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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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아빠와 아빠 유형의 사람은 엄마와 엄마 유형의 사람과 다르게 ‘홀로코스트도 있었으니 나도 힘을 내야지‘ 혹은 ‘나는 코에 종기가 생겼지만 길 아래쪽 저 사람은 코를 잃었으니까 나는 그 사람은 코를 잃었는데 나는 코를 안 잃었다고 기뻐해야 하고 그 사람은 홀로코스트를 안 겪었으니까 기뻐해야 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아빠에게는 ‘세상에 나보다 더 고통 받는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감사드려야지‘는 있을 수가 없었다. 나로서도 아빠 생각이 어디가 틀렸는지 알 수 없었다. 삶은 당연히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말이다. 삶이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야 할 테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하지 않다. 또 이 평범한 세상, 이 작은 인간 세상에 사는 우리는우리가 받은 축복을 헤아리지도 않고 상대적인 것 대신 영•원한 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 P134

 엄마와 엄마 유형, 그러니까 우울한사람도 비극 앞에 굴복하는 것도 참지 못하고 자신이 아니라 다른 불쌍한 사람이 끔찍한 운명을 겪도록 선택한 신의은총에 감사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조차도, 내내 속 편하게지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들 유형에 속하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들, 즉 마음이 편안해 보이는 사람이나 불안한 상황에서도 사람과 삶에 대한 선의와 신뢰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도 극히 드물게 있었지만, 엄마와 엄마 유형의 사람이거나 아빠와 아빠 유형의 사람이거나 나를 포함해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 P135

나는 어릴 때에도- 어찌면 어렸기 때문에- 빛을 왜곡하는 장막 같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문제와 다가오는 상처와 쌓여기는 고난과 잃어버린 희망과 사라진 신뢰와 아무도 극복하려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정신적 무력감과 관련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인간의 어두움과 결탁했거나 혹은그 어둠에서 나온 물리적 환경이 빛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이곳은 길고 우울한 이야기 속에 파묻혀 있어서 진정빛나는 사람이라 해도 이 어둠속으로 들어오면 어둠을 이겨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둠에 포섭될 위험이 있고 심지어는 (만약 그 사람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특별히 환하고 각별히 빛나는 사람이라면) 자기 목숨을 잃는 지경에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둠속에서 살아와서 안전한 어둠에 이미 오래전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도 살아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만약 우리가 이 빛을, 투명함을, 광휘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그걸 즐기게 되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익숙해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걸 믿게 되고 기대하게 되고 감명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희망을 갖게 되고 해묵은 전통을 버리고 빛에 물들고 빛을 흡수해서 우리 자신이 빛을 내기 시작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었는데 바로 그때 빛을 뺏기거나 빛이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두려움과 슬픔이 압도하는환경에는 빛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다. 나의 환경에는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 P137

그렇기 때문에 개가 필요한 것이다. 개들은 중요하다. 사람 사이, 부족 사이, 국가 사이, 성별 사이에서 순식간에터져나와 주변 모든 것에 돌이킬 수 없는 상해를 입히는혐오와 자기혐오의 감정이 순간 맞부딪쳐 치명적인 충돌을 일으키지 않게 막아주는 균형추, 가림막, 안전장치다. 이런 나쁜 기억, 고통, 역사, 인간성의 쇠락을 막고 피하고밀어내려면 개가 짖는 소리, 그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울음소리를 듣고 집 안으로 들어가 군인들이 지나갈 때까지 십오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군인들과 맞닥뜨릴 일이 없고 무기력함과 부당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최악의 상황, 정상이고 평범하고 좋은 사람인 내가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거나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생각하는 상황도 일어날 일이 없다. 만약에 전장이 되어버린 거리에 이미 나와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린다면, 개 짖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파악해 군인들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만약 이쪽으로 오고 있다면 얼른 샛길로 들어가 눈에 뜨이지 않는 곳으로 피하면 된다. 그런데 군인들이 개를 죽여버렸다. 중재자를 제거해버렸다. 그래서 새로 개가 태어나 우리 지역에 충성하도록 기르고 가르치기 전까지는 과거의 직접적이고 밀착된 증오 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밤새 개가 학살을 당하고 난 다음 날 아침, 엄청난 사체들을 마주했을 때에도 직접적인 감정이 솟았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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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우리 관습이었다. 세부적인 사항을 인정한다는 것은 선택을 의미하고 선택은책임을 뜻하는데 우리가 책임을 다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겠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본 탓에 추궁을 당하고무너지게 되면 어쩌겠는가?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만약 그게 좋다면, 그게 무엇이 되었건 간에 좋았고 마음에 들어그것에 익숙해지고 그것에서 위안을 얻고 의존하게 되었는데 그게 사라진다면, 그것을 빼앗긴다면, 다시는 되찾을수 없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하나? 애초에 없는 편이 낫다는 것이 중론이었고 그래서 우리 하늘의 색은 파란색이어야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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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패션과 건축에서 유사한 형태의 디자인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건축에서 영감을 얻어 옷을 디자인하기도 하고, 실제로 건축가들이 직접 패션 디자인을 하는 경우도 있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구두를 디자인하기도 하고, 심지어 ‘유나이티드 누드‘라는 브랜드는 브랜드 콘셉트 자체를 건축 분야와 협업하는 것으로 잡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분야와 접목하여 하이브리드를 만들어 내는 시대적패러다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이다. 지금은 분야가 달라도 각 분야의 디자이너들은 모두 유사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해 작업하기 때문에 다른 분야끼리의 디자인도 점점 닮아가고 있다. 지금의 모든 디자인 업계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윈도우 프로그램과 어도비 Adobe가 만든 각종 그래픽 소프트웨어, 그리고업종별로 사용하는 몇 가지 3D 소프트웨어들 위에 세워진 세상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마야‘를 할리우드의 특수 효과 장면을 만들 때도 사용하고 있으며, 건축 분야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래빗Revit‘으로 블록버스터영화 배경 속 건축물을 만든다. 반지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와 동대문 ‘DDP‘를 디자인한 건축가는 똑같이 ‘라이노‘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 동일한 소프트웨어를 쓰면 사용하는 명령어가 똑같다. 그렇게되면 비슷한 형태의 결과물이 나온다. 곡면을 만드는 방식도 소프트웨어에 따라 다른데, 같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 비슷한 모양의 곡면이만들어진다. 그런 이유에서 반지와 건축물의 모양이 비슷해지고 있다. - P351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의 효율성이 높아진 점은 장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다양성의 소멸‘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는 패션, 건축, 산업 디자인 등 각종 디자인 분야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건을 만들어 왔다. 패션은 옷감을 가위로 자르고, 바느질했으며, 건축에서는 돌을 쌓고, 나무를 깎고, 콘크리트를 부어서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이렇듯 각 분야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제작 방식에 근거해서 서로 전혀 다른, 다양한 결과물을 창조해 낼 수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컴퓨터에서 디자인하고, 스크린상에서컴퓨터로 만든 3차원 그림을 통해 시뮬레이션하고, 그 형태를 CADCAM(Computer Aided Design, Computer Aided Manufacturing)을 이용해서 제작하는 비슷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또한 매스 미디어의 과다한 노출로 인해 서로 점점 더 베껴 가는 과정을 통해 디자인 분야의 ‘다양성‘이 사라져 가는 추세다. 기술에만 의존하는 창조는시간이 지날수록 다양성이 사라진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20세기 중반국제주의 양식에서 경험했다. 기술이 이끄는 획일화를 어떠한 방식으로 피하느냐가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다.
기술로 인한 획일화를 피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은 사람의 신체에 집중하기도 하고 일부는 재료에 집중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몸과 재료는 현실 세계에서 없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P356

2020년 현대자동차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발표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쌍엽기가 날아다니는 도시를 꿈꾼 사람의 그림자를 엿보았다. 드론 교통수단은 딱 그 정도 수준의 미래상이다. 드론은 축소판 헬리콥터다. 프로펠러가 두 개면 헬기고, 여러 개가 달리면 하늘을 나는 자동차다. 수 톤 무게의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것은 헬기가 나는 것과 똑같다. 그런 비행체가 열 대만 날아다녀도 시끄러워서 살 수 없을 것이다.
드론 택배 역시 소음 민원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노이즈캔슬링 기술로 소음을 없앴다고 치자. 그래도 먼지를 일으키는 바람때문에라도 안 된다. 도시에서 프로펠러로 운송을 하겠다는 상상은 이쯤에서 접는 것이 낫다. 새롭지도 않다. 프로펠러로 이동하겠다는 것은 르네상스 시절 다빈치부터 시작된 수백 년 된 아이디어다. 반면 도•요타는 비슷한 시기에 우븐시티Woven City 계획을 발표했다. 이 도시의 여러 아이디어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지하에 만들어진 운송 전용 도로망이다. 도시의 지하 1층에 자율 주행 로봇들만 다니는 도로망을 만들었다. 이 로봇은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각 세대의 거실로 직접 물건을배달한다. 현재 자율 주행 자동차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운전하는자동차와 부딪치는 사고다. 이런 사고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반응때문에 발생한다. 자율 주행 자동차만 따로 다닌다면 교통사고는 발생하지 않는다. 자율 주행 운송 로봇용 지하 도로망이 해결책이 될 수있다. 운송 로봇만 다니면 천장고도 사람 키보다 낮게 만들 수 있다. 사람이 피자를 살 때에는 자동차를 타고 가서 피자 한 판을 사 와야 한다. 몇 그램짜리 피자를 사오기 위해 자동차 1톤과 사람 몸무게까지 운반되어야 한다. 배달앱으로 시키면 오토바이와 한 사람의 무게가 이동한다. 작고 가벼운 지하 운송 로봇으로 피자를 배달하면 배달원 몸무게와오토바이 무게 등 무게의 많은 부분을 줄일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탄소배출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물론 초기에 지하 운송 도로망을 만드는비용은 들겠지만 장기적으로 투자비를 회수하고도 남을 것이다. - P376

전염병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모이려는 곳은 종교 공간일 것이다. 모여야 권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의 최대 발병지가 신천지 집회 장소였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정상적인 종교 단체라면 전염병 기간 중 실내 공간에서 모이는 것은 자제했겠지만, 후발주자 신천지는 해산하기힘들었을 것이다. 한 공간에 모이지 못하면 종교는 집단 공간이 만드는 권력을 잃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전염병은 종교 단체 최고의 적이다. 역사적으로 중세 때 흑사병으로 천 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졌던 교회가 힘을 잃었고, 이후 르네상스라는 인문 개혁이 일어났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를 통해서 가장 영향을 받을 분야는 유통상업 분야와 더불어 종교 분야일 것이다. 코로나19를 통해서 라이프스타일 변화가 가속화될 전망이다. 라이프스타일 변화는 공간의 재구성을 만든다. 공간 구성의 변화는 우리 사회 내 권력의 재배치를 만든다. 코로나19는 진정되겠지만, 그 이후 우리는 공간과 권력의 재배치가 시작되는 변화의 시작을 볼 것이다. 인터넷이 보급되면 일부에 집중됐던 언론의 권력이 분산되면서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일부는 맞는 말이었지만 대형 언론사의 권력이 분산되자 가짜 뉴스가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기존 권력의 해체와 분산은 또 다른 종류의 문제를 만든다. 공간을 통한 권력의 재배치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지 잘 지켜봐야 한다. - P388

인간은 항상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인간성을 찾아 왔다. 이집트시대의 노예, 중세 시대의 농노, 근대 산업의 노동자, 현대 사회의 소비자들은 항상 나름의 가치와 존엄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큰 방향성에서 인간의 존엄은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고 더 커지는 추세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서 우리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치렀고 수차례의 피의 혁명과 노예와 식민지 시대를 겪기도 했다. 그런 과정들이 있었기에지금의 인간다움을 만들 수 있었다. 다음 시대의 인간다움은 이러한힘든 과정 없이 만들어 내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이다. 디지털과 융합될 시대는 기술이 너무 압도하기 때문에 개인이사라지고 획일화될 가능성은 더 높다. ‘과연 인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인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펴보려면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구별해 내는 눈이 필요하다. 앞으로사회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인간다움도 변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P403

짧은 글을 통해 건축가의 관점으로 역사 속 새로운 생각들은 어떻게만들어지는지 살펴보았다. 역사 속에서 새로운 생각은 위기와 다름에서 시작했다. 위기와 다름은 보통 갈등과 충돌을 야기한다. 그런데 갈등과 충돌이 있다고 자동적으로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생각은 갈등과 충돌을 화합시키려는 마음이 있을 때 만들어진다. 아인슈타인 이전에 물리학계에는 뉴턴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 사이에 갈등과 모순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물리학에 내재된 모순과 갈등을 찾아내서가 아니다. 그 갈등을 봉합할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서다. 아인슈타인은 역학과 전자기학의 모순을 화합시키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합치면서 이전에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인간과 기계의 융합,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 실제와 가상의 융합이 절실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의 차원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각이다. 그리고그런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창조적 영감은 갈등을 화합으로 이끌고자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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