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패션과 건축에서 유사한 형태의 디자인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건축에서 영감을 얻어 옷을 디자인하기도 하고, 실제로 건축가들이 직접 패션 디자인을 하는 경우도 있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구두를 디자인하기도 하고, 심지어 ‘유나이티드 누드‘라는 브랜드는 브랜드 콘셉트 자체를 건축 분야와 협업하는 것으로 잡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분야와 접목하여 하이브리드를 만들어 내는 시대적패러다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이다. 지금은 분야가 달라도 각 분야의 디자이너들은 모두 유사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해 작업하기 때문에 다른 분야끼리의 디자인도 점점 닮아가고 있다. 지금의 모든 디자인 업계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윈도우 프로그램과 어도비 Adobe가 만든 각종 그래픽 소프트웨어, 그리고업종별로 사용하는 몇 가지 3D 소프트웨어들 위에 세워진 세상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마야‘를 할리우드의 특수 효과 장면을 만들 때도 사용하고 있으며, 건축 분야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래빗Revit‘으로 블록버스터영화 배경 속 건축물을 만든다. 반지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와 동대문 ‘DDP‘를 디자인한 건축가는 똑같이 ‘라이노‘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 동일한 소프트웨어를 쓰면 사용하는 명령어가 똑같다. 그렇게되면 비슷한 형태의 결과물이 나온다. 곡면을 만드는 방식도 소프트웨어에 따라 다른데, 같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 비슷한 모양의 곡면이만들어진다. 그런 이유에서 반지와 건축물의 모양이 비슷해지고 있다. - P351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의 효율성이 높아진 점은 장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다양성의 소멸‘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는 패션, 건축, 산업 디자인 등 각종 디자인 분야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건을 만들어 왔다. 패션은 옷감을 가위로 자르고, 바느질했으며, 건축에서는 돌을 쌓고, 나무를 깎고, 콘크리트를 부어서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이렇듯 각 분야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제작 방식에 근거해서 서로 전혀 다른, 다양한 결과물을 창조해 낼 수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컴퓨터에서 디자인하고, 스크린상에서컴퓨터로 만든 3차원 그림을 통해 시뮬레이션하고, 그 형태를 CADCAM(Computer Aided Design, Computer Aided Manufacturing)을 이용해서 제작하는 비슷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또한 매스 미디어의 과다한 노출로 인해 서로 점점 더 베껴 가는 과정을 통해 디자인 분야의 ‘다양성‘이 사라져 가는 추세다. 기술에만 의존하는 창조는시간이 지날수록 다양성이 사라진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20세기 중반국제주의 양식에서 경험했다. 기술이 이끄는 획일화를 어떠한 방식으로 피하느냐가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다.
기술로 인한 획일화를 피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은 사람의 신체에 집중하기도 하고 일부는 재료에 집중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몸과 재료는 현실 세계에서 없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P356

2020년 현대자동차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발표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쌍엽기가 날아다니는 도시를 꿈꾼 사람의 그림자를 엿보았다. 드론 교통수단은 딱 그 정도 수준의 미래상이다. 드론은 축소판 헬리콥터다. 프로펠러가 두 개면 헬기고, 여러 개가 달리면 하늘을 나는 자동차다. 수 톤 무게의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것은 헬기가 나는 것과 똑같다. 그런 비행체가 열 대만 날아다녀도 시끄러워서 살 수 없을 것이다.
드론 택배 역시 소음 민원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노이즈캔슬링 기술로 소음을 없앴다고 치자. 그래도 먼지를 일으키는 바람때문에라도 안 된다. 도시에서 프로펠러로 운송을 하겠다는 상상은 이쯤에서 접는 것이 낫다. 새롭지도 않다. 프로펠러로 이동하겠다는 것은 르네상스 시절 다빈치부터 시작된 수백 년 된 아이디어다. 반면 도•요타는 비슷한 시기에 우븐시티Woven City 계획을 발표했다. 이 도시의 여러 아이디어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지하에 만들어진 운송 전용 도로망이다. 도시의 지하 1층에 자율 주행 로봇들만 다니는 도로망을 만들었다. 이 로봇은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각 세대의 거실로 직접 물건을배달한다. 현재 자율 주행 자동차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운전하는자동차와 부딪치는 사고다. 이런 사고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반응때문에 발생한다. 자율 주행 자동차만 따로 다닌다면 교통사고는 발생하지 않는다. 자율 주행 운송 로봇용 지하 도로망이 해결책이 될 수있다. 운송 로봇만 다니면 천장고도 사람 키보다 낮게 만들 수 있다. 사람이 피자를 살 때에는 자동차를 타고 가서 피자 한 판을 사 와야 한다. 몇 그램짜리 피자를 사오기 위해 자동차 1톤과 사람 몸무게까지 운반되어야 한다. 배달앱으로 시키면 오토바이와 한 사람의 무게가 이동한다. 작고 가벼운 지하 운송 로봇으로 피자를 배달하면 배달원 몸무게와오토바이 무게 등 무게의 많은 부분을 줄일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탄소배출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물론 초기에 지하 운송 도로망을 만드는비용은 들겠지만 장기적으로 투자비를 회수하고도 남을 것이다. - P376

전염병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모이려는 곳은 종교 공간일 것이다. 모여야 권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의 최대 발병지가 신천지 집회 장소였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정상적인 종교 단체라면 전염병 기간 중 실내 공간에서 모이는 것은 자제했겠지만, 후발주자 신천지는 해산하기힘들었을 것이다. 한 공간에 모이지 못하면 종교는 집단 공간이 만드는 권력을 잃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전염병은 종교 단체 최고의 적이다. 역사적으로 중세 때 흑사병으로 천 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졌던 교회가 힘을 잃었고, 이후 르네상스라는 인문 개혁이 일어났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를 통해서 가장 영향을 받을 분야는 유통상업 분야와 더불어 종교 분야일 것이다. 코로나19를 통해서 라이프스타일 변화가 가속화될 전망이다. 라이프스타일 변화는 공간의 재구성을 만든다. 공간 구성의 변화는 우리 사회 내 권력의 재배치를 만든다. 코로나19는 진정되겠지만, 그 이후 우리는 공간과 권력의 재배치가 시작되는 변화의 시작을 볼 것이다. 인터넷이 보급되면 일부에 집중됐던 언론의 권력이 분산되면서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일부는 맞는 말이었지만 대형 언론사의 권력이 분산되자 가짜 뉴스가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기존 권력의 해체와 분산은 또 다른 종류의 문제를 만든다. 공간을 통한 권력의 재배치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지 잘 지켜봐야 한다. - P388

인간은 항상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인간성을 찾아 왔다. 이집트시대의 노예, 중세 시대의 농노, 근대 산업의 노동자, 현대 사회의 소비자들은 항상 나름의 가치와 존엄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큰 방향성에서 인간의 존엄은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고 더 커지는 추세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서 우리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치렀고 수차례의 피의 혁명과 노예와 식민지 시대를 겪기도 했다. 그런 과정들이 있었기에지금의 인간다움을 만들 수 있었다. 다음 시대의 인간다움은 이러한힘든 과정 없이 만들어 내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이다. 디지털과 융합될 시대는 기술이 너무 압도하기 때문에 개인이사라지고 획일화될 가능성은 더 높다. ‘과연 인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인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펴보려면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구별해 내는 눈이 필요하다. 앞으로사회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인간다움도 변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P403

짧은 글을 통해 건축가의 관점으로 역사 속 새로운 생각들은 어떻게만들어지는지 살펴보았다. 역사 속에서 새로운 생각은 위기와 다름에서 시작했다. 위기와 다름은 보통 갈등과 충돌을 야기한다. 그런데 갈등과 충돌이 있다고 자동적으로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생각은 갈등과 충돌을 화합시키려는 마음이 있을 때 만들어진다. 아인슈타인 이전에 물리학계에는 뉴턴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 사이에 갈등과 모순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물리학에 내재된 모순과 갈등을 찾아내서가 아니다. 그 갈등을 봉합할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서다. 아인슈타인은 역학과 전자기학의 모순을 화합시키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합치면서 이전에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인간과 기계의 융합,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 실제와 가상의 융합이 절실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의 차원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각이다. 그리고그런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창조적 영감은 갈등을 화합으로 이끌고자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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