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간 투쟁의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갈등 그 자체에는 어떤 진화적 목적도 없다. 개체가 이성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 그 자체를 목표로삼는 것은 적응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사람들의 성 전략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하는 달갑지 않은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남성과여성은 종종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각자의 목표를 동시에 이룰 수 없다. 짝짓기 목표를 각기 추구함으로써 일어나는 갈등은 인간의 진화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적응적 문제를 만들어 왔으며, 따라서 우리의 조상들은 이러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고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심리 기제를 진화시켰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로부터 갈등을 관리하는 이러한 심리적 해결책을 물려받은 것이다. - P287

 고통을 줄법한 다른 요인들, 예컨대 아내의 부정이나(6.0여점) 언어적 혹은 신체적학대(5.55점) 등이 여성에 의한 성폭력보다 훨씬 더 남성들에게 고통을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감스러운 결과 중 하나는 남성은 여성이 성폭력을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지를 흔히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남성에게 성폭력이 여성에게 가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짐작해 달라고 했더니, 남성은 그 영향을 7점 척도상에서 겨우 5.80점이라 답했다. 이는 여성 자신이 기록한 6.50점보다 유의미하게 낮은 수치였다. 성폭력이 실제로여성들에게 얼마나 고통을 가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몇몇 남성 때문에 줄기차게 성폭력이 시도되는 경향이 있으며, 결국 이러한 성차가 남녀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중대한 원인이라 추론할 수 있다. 여성이 성폭력으로 겪는 심리적 고통을 남성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은 이성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남성들이 강간 피해자에 대해 그다지 동정하지 않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된다." 여성이 만약 강간을 도저히 못 피하겠다면 그냥 드러누워서 즐기면 된다고냉담하게 지껄인 텍사스 어느 정치인의 발언은 성폭력에 희생당한 여성이 겪는 외상(外)의 크기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할 수있는 말이다.
반면에 여성은 여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성폭력이 남성에게 얼마나 고통을 안겨 줄지에 대해 과대평가한다. 여성은 이를 5.13점, 즉 중간 정도로 남성에게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답했는데 이는 남성 자신의평가가 겨우 3.02점인 것과 극히 대조를 이룬다. - P293

여성에게 성 관계 보류는 몇 가지 잠재적인 기능을 하는 것 같다. 하나는 정서적으로 헌신하고 물질적인 자원을 제공해 주는 우수한 남편감을 고를 권한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다. 여성은 어떤 남성과는 성 관계를 미루는 한편 자기 입맛에 맞는 남성에게는 선택적으로 성관계를 허락한다. 뿐만 아니라 성 관계를 보류함으로써 여성은 자신의배우자 가치를 높인다. 자신을 희귀한 자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희귀한 자원에 대해 남성이 지불하고자 하는 가격은 뛰게 마련이다. 만약 남성이 성적 접근을 얻을 유일한 통로가 막대한 투자를 하는 길밖에 없다면 그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성적 접근이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투자하지 않는 남성은 짝짓기를 할 수 없다. 이로부터 남녀 간에 또 다른갈등이 생겨난다. 여성의 성 관계 보류는 즉시 성적 접근을 이루려 하고 가능한 한 정서적인 끈을 가늘게 하려는 남성의 전략에 간섭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성관계 보류의 또 다른 기능은 여성의 배우자 가치에 대한 남성의 인식을 조종하는 것이다. 배우자 가치가 매우 높은 여성은 정의상평균적인 남성이 접근하기엔 어려운 상대기 때문에 여성은 성 관계를보류함으로써 그녀의 배우자 가치에 대한 남성의 인식을 변화시킨다. 마지막으로, 적어도 초기에는 남성으로 하여금 여성을 일시적인 상대가 아닌 장기적인 배우자감으로 여기게끔 유도할 수 있다. 처음부터 성관계를 허락하면 남성은 자칫 여성을 단순한 찰나적인 성 관계 상대로인식하기 쉽다. 남성은 그런 여성을 성적으로 난잡하거나 헤프다고 여기기 쉬우며, 이러한 자질은 아내감을 구하는 남성들에게 기피되는 것들이다. - P294

위와 같은 발견은 다음 두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를 판별해 주지 못한다. 즉 남성은 섹스하는 장면을 보면 흥분하는 일반적인 성향을 지닐 뿐이지 별개의 강간 적응을 진화시킨 것은 아닐수도 있다. 혹은 남성이 실제로 별개의 강간 적응을 진화시켰을 수도있다. 음식에 비유해 보자. 개와 다름없이 사람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보거나 냄새 맡으면 침을 흘리며, 특히 한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때 더더욱 그렇다. 어떤 과학자가 인간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음식물을 강제로 빼앗는 특수한 적응을 진화시켰다는 가설을 세웠다고 해보자. 그 과학자는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24시간 동안 음식을 못먹게 한 후, 다음 두 장면 가운데 하나만 보여 준다. 하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맛있는 음식을 강제로 빼앗는 장면이다." 만약 사람들이 두 장면 모두에서 동일한 양의 침을 흘렸다는 결과를 얻는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음식을 강제로 빼앗기‘ 위한 적응을 따로 진화시켰다고 결론 내릴 수 없다.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는 전부는 배고픈 사람들은 음식물을 어떻게 구하는가와는 관계없이 음식물을 보면 일단 침을 흘리는 듯하다는 것이다. 이 가상적인 예는 상호 합의된 섹스 장면이든, 강제된 섹스 장면이든 상관없이 남성들은 성적인 장면을 보면 성적으로 흥분한다는 위 실험 결과와 비견할 만하다. 그러한 결과는강간이 남성에서 별도로 진화된 전략의 하나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 P324

심리적 고통의 강도는 아마도 조상 여성들이 강간을 당한 결과로 감수해야 했던 번식적 손실과 함수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강간으로 인해 번식 연령의 여성은 자식의 아버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능력을 박탈당하는 셈이므로 결국 번식 이전 또는 번식이 끝난 연령의 여성보다 강간올 더 고통스럽게 경험할 것이다. 번식 연령의 여성들이 더 심한 심리적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여성이 스스로의 번식 상태에따라 민감하게 조율되는 심리 기제를 가졌으리라는 관점을 뒷받침한다. 여성이 지닌 이 심리 기제는 배우자를 자기 의사에 따라 선택하는전략이 크게 간섭당하고 있음을 일깨우는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그 사실은 또한 성적 강제가 인간이 진화해 온 사회 환경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특질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관점을 뒷받침한다. - P328

성 관계를 갖기 위해 강제력을 사용하는 남성들은 일련의 독특한 특질들을 지니고 있음이 알려져 있다. 그들은 대개 여성에게 적대적이며, 여성이 속마음으로는 강간당하길 바란다는 잘못된 신화를 신봉하며, 성적으로 매우 문란하며, 충동성, 호전성, 과도한 남성성 등이 두드러지는 인성적 특성을 보인다. 강간범을 조사한 연구들은 또한 그들의 자존심이 낮다는 점을 발견했다. 비록 남성으로 하여금 강간을 하게만드는 특질들이 어디서 유래하는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한 가지 가능성은 배우자 가치가 낮은 남성들이 성적으로 매우 강압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추측은 강간범들이 대개 수입이 적고 하류 계층에서더 많이 유래하는 경향이 있음과 일치한다." 강간범들을 면담한 결과들은 이 추측을 뒷받침한다. 예컨대 한 연쇄 강간범은 이렇게 말했다. "난 내 사회적 처지 때문에 그 여자가 날 거부한다고 느꼈어요. 그리고내가 번듯한 남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어떡하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 몰랐어요. 그녀가 날 두려워한다는 걸 이용해서 강간했어요." 여성을 유혹할 만한 지위나 돈, 혹은 기타 자원이없는 남성들에게 성적 강제는 아마도 절박한 대안이 될지 모른다. 우수한 배우자를 끌 만한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들에게 비웃음을 받는남성들이 여성에 대한 증오심을 발달시킬지 모른다. 이 증오심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정상적인 경로를 건너뛰게 하고 강압적인 성 행동을 촉진한다.
인성뿐만 아니라 문화와 맥락도 강간의 발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서서으나 - P329

불행히도 이러한 전투는 진화적인 시간상에서 나선형의 군비 확장 경쟁을 유발한다. 여성을 속이는 남성의 능력이 조금씩 향상될 때마다 여성은 속임수를 감지하는 능력을 그만큼 더 향상시킨다. 속임수를더 잘 감지하는 여성의 능력은 다시 남성으로 하여금 점점 더 정교한 형태의 속임수를 진화시키게 하는 진화적 조건을 마련한다. 여성이 남성의 헌신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남성에게 부과하는 점점 더 고난이도의 시험에 맞서서 남성은 헌신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는 더욱 더 정교한 전략을 발달시킨다. 이는 다시 여성이 헌신 사기꾼을 잘 가려내게끔 더욱더 정교하고 섬세한 시험을 개발하게 한다. 한편 한 성에게 가해지는 모든 형태의 학대에 대해 다른 성은 그 같은 학대를 피하는 수단을 진화시킨다. 여성이 자신의 짝짓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점점 더 우수하고 정교한 전략을 진화시킴에 따라 남성도 자신의 짝짓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점점 더 정교한 전략을 진화시킨다. 남녀의 짝짓기 목표가 서로 간섭을 일으키므로, 이 나선형의 군비 확장 경쟁에는 종착역이 없다.
하지만 분노나 심리적 고통 같은 적응적 감정은 타인이 남녀의 짝짓기 전략에 간섭을 일으켜서 받게 되는 손실을 일정 부분 줄여 주는 역할을 한다. 데이트나 결혼 상황에서 이러한 감정은 때때로 관계 자체를 끝내게 만들기도 한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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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세와 자신감을 과시하는 모든 행동이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과시 행동은 다른 남성들에게도 보란 듯이 행해져서 집단 내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위신을 높인다. 남자대학생들은 섹스 상대의 수를 과장하고,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타인에게 부풀려 이야기하고, 자신의 성적인 능란함과 여성 편력에 대해 허풍을 떨며, 실제보다 더 위압적으로, 더 확신에 차서, 더 용감한 양 행동한다.
지위에 대한 경쟁 때문에 남성은 그동안의 성적 편력을 뽐내고, 자신의 배우자 가치를 과장하고, 실제로는 본인도 동의하지 않을 허세를 늘어놓는다. 남성은 위치를 두고 경쟁한다. 희귀한 자원, 특히 성적자원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 어떤 남성이 성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위치를 끌어올림으로써 다른 남성들의 무릎을 꿇릴 수 있다면, 그의 높아진 지위는 더 많은 바람직한 여성들을 얻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남성이 이 전술을 주로 찰나적인 짝짓기 맥락에서 사용한다는 사실은 섹시한 아들 가설에 대한 부차적인 증거가 된다. 자신의 위세와 성적 편력을 과시하는 남성은 자신이 원래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라고 상대에게 광고하는 셈이다. 화려한 꼬리를 과시하는 숫공작처럼 호기를 부리는 남성들은 다음 세대에도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질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위세와 자신감을 과시하는 행동은 남성이 구사하는 여러 유혹 전술 중 핵심 요소이다. - P222

 그러므로 아름다움의 신화를 주장하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는 이야기는 여성들에게 별로 달갑게 들리지 않는다. 여성은 자신들을복속하려는 ‘권력 구조‘나 ‘신화‘와 같은 존재들의 강력한 힘에 의해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뇌당하며, 어떠한 주체성도 어떠한 선호도 없는수동적인 그릇이자 잘 속는 얼간이로 그려진다.
반면에 진화심리학적 접근은 여성이 어떤 유혹 전술을 구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아름다움의 신화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보다 여성이 훨씬 더 주체적이며 폭넓은 선택권을 갖는 존재임을보여 준다. 예컨대 장기적인 배우자를 찾는 여성은 정절을 과시하거나, 공통 관심사를 신호하거나, 지성적으로 행동하는 등 폭넓은 범위의 전술들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은 대중매체에 세뇌당해서 미용 제품을 구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힘을 증가시켜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미용 제품을 구입할 뿐이다. 여성은 매디슨 애비뉴의 사악한 힘에 속아 넘어간 얼간이가 아니라, 수십가지 제품들 가운데 어떤 것을 고를지 자신의 선호에 따라 스스로 결정한다. - P231

 정절신호는 상대와의 관계에 진정으로 헌신하리라는 의사를 전달한다. 남성에게 여성의 헌신 약속은 남성이 진화 역사를 통해서 계속 부딪혀 온 지극히 중대한 번식상의 문제인 부성 불확실성을 드디어 해결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 P233

쉽게 넘어오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는 전술은 높은 배우자 가치를신호하며, 자원을 투자할 남성의 의향을 검증하며, 자신의 정절을 남성에게 알려 준다. 만약 어떤 여성이 쉽게 넘어오지 않는다면, 남성은 일단 그녀를 얻기만 하면 다른 남성들이 그녀를 유혹하기란 몹시 어려우리라 확신할 수 있다. 장기적인 배우자 유혹 전술로서 쉽게 넘어오지않을 것처럼 행동하는 전술이 효과적인 까닭은 그것이 남성에게 두 가지 핵심적인 번식상의 이점을 주기 때문이다. 짝짓기 시장에서의 그녀의 높은 배우자 가치와 오직 그만이 그녀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리라는신호가 바로 그것이다. - P237

성적 질투는 두 사람의 성적인 관계에 대한 위협을 감지함으로써촉발되는 감정으로 이루어진다. 위협을 감지하면 이 위협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하도록 설계된 행동이 유발된다. 이러한 행동에는 배우자를감시하여 혼외정사의 흔적을 찾아내는 기능을 하는 경계로부터 외도한 흔적을 들킨 배우자나 연적에게 큰 손실을 입히는 폭력 등이 있다. 성적 질투는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배우자에게 관심이 있다는 낌새를 발견했을 때나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시시덕대는 것과 같이 외도의 낌새를 드러낼 때 촉발된다. 이러한 낌새에 의해 유발되는 분노, 슬픔, 굴욕감 등은 대개 연적이 더 이상 허튼 짓을 못하게 하거나 배우자의 외도를 막게끔 하는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적응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남성은 직접적인 번식상의손실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도 금이 가게 되며, 이는 나중에 다른 이성을 유혹할 때에도 커다란 지장을 준다.  - P257

뿐만 아니라 오쟁이 진 남편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평판에 큰 타격을 입을 우려가 있으며, 특히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았을 때 더더욱 그런 꼴을 당하기 쉽다. 예컨대 일부다처제 사회에서는 외도한 아내를 살해하는 행동이 남편의 체면을 지켜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아내들의 부정을 방지하는 효과적인 예방책이 될 수 있다. 오쟁이를지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남편은 나머지 다른 아내들도 마음•놓고 간통을 저지르는 일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진화적 과거의 특정한 상황에서는 아내를 살해하는 행동이 번식 자원의 출혈을 막게끔설계된 피해 예방책으로서 기능했을 수 있다.
살인에 따르는 서로 다른 이득과 손실을 고려하면, 진화적으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는 부정을 저질렀거나 남편을 버리려는 아내를 죽이는 편이 오쟁이를 순순히 지거나 아내로부터 버림 받는 편보다 번식적으로 더 유리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살인에 대한 생각과 이따금 실제로 저지르는 살해 행동은 인간의 진화 역사에서 적응적이었을 것이며, 어쩌면 인간의 진화된 기제의 일부였을 수 있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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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서서 그 유명한 <시모네티 양탄자 TheSimonert carpet) (이전 주인의 이름을 따서 시모네티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양탄자로 유명했던 이집트 맘루크왕조 시대에 생산된 가장 유명한 작품중 하나다-옮긴이)를 내려다본다. 섬세한 조명으로 밝혀져 있어 마치 마법처럼, 형형색색의 연못 위로 연기가 자욱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그 자체로 시각의 우주 같은 이 양탄자 속에서 길을잃고 싶은 기분이었다면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를 내버려두었을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다른 기분이다. 지금 내게 보이는것은 저물어간 거대한 세계가 남긴 작은 조각이다. - P215

카사트의 그림은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햇살에 흠뻑 젖은것처럼 아름답다. 대담하고, 편안하고, 다채롭고, 옳고, 뭐랄까, ‘순수 예술‘보다 더 탄탄하다. 카사트가 어렵게 얻은 거장의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동안 조심스럽고 끈질기게 모작을 완성 중인 저 딱한 사람에게는 불공평한 일이다. 이것이 카사트의 스타일이었고, 이것이 그녀의 주제였다. 그녀는 기민하고영감이 충만한 미적 지능으로 수천 가지의 선택을 해냈다. 그런그녀의 작품을 생명력 없이 흉내낼 수는 있지만 재현하기는 불가능하다. 정리하자면 나는 그녀의 그림이 얼마나 훌륭한지 믿을 수도, 견딜 수도 없어서, 아주 오랜만에 그저 깊이 흠모하며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이런 순간들은 예전만큼 자주 오지 않고 그 사실을 인정하며 슬퍼진다. 위대한 그림은 경외감, 사랑 그리고 고통 같은잠들어 있던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메자닌의 골동품들에 대한 호기심과는 다르다. 이상하게도 나는 내 격렬한 애도의 끝을 애도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내 삶의 중심에 구멍을냈던 상실감보다 그 구멍을 메운 잡다한 걱정거리들을 더 많이 생각한다. 아마도 그게 옳고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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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전시실 안의 낯선 사람들이 엄청나게 아름다워 보인다. 선한 얼굴, 매끄러운 걸음걸이, 감정의 높낮이, 생생한 표정들. 그들은 어머니의 과거를 닮은 딸이고, 아들의 미래를 닮은 아버지다. 그들은 어리고, 늙고, 청춘이고, 시들어가고, 모든 면에서 실존한다. 나는 눈을 관찰 도구로 삼기위해 부릅뜬다. 눈이 연필이고 마음은 공책이다. 이런 일에 그다지 능숙하지 않다는 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사람들이 입고 돌아다니는 옷과,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와 손을 잡거나 혹은 잡지 않는 몸짓에서, 머리를 다듬고, 면도를 하고, 내 눈을 마주하거나 피하고, 얼굴과 자세에서 기쁨이나 조급함, 지루함이나 산만함을 보이는 방식들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내가 보는 대부분의 것에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확실한 의미를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저 이 장면에 깃든 눈부심과 반짝임을 바라보며 기쁨을 만끽한다. - P152

하루가 끝난 후 86번가에서 지하철을 탄 나는 우물처럼 샘솟는 연민의 마음으로 동승자들을 둘러본다. 평범한 날이면 낯선 사람들을 힐끗 보며 그들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들이 나만큼이나 실존적이고 승리하고 또 고통받았으며 나처럼 힘들고 풍요롭고 짧은 삶에 몰두해 있다는 사실을 입원해 있는 톰을 방문한 후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던 때를 기억한다. 누구라도 심술을 부리거나, 실수로 부딪힌 다른승객에게 쏘아붙이면 그게 그렇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편협하고 무지해 보였다. 우리 모두 그럴 때가 있는데도 말이다. 오늘밤은 운이 좋다. 낯선 사람들의 피곤하거나 어떤 생각에 빠져 있는 얼굴들을 애정을 갖고 바라볼 수 있다.
반 시간이 지나고 유니언 스퀘어에서 환승한 후, 내가 탄 전철은 맨해튼 다리를 건너 브루클린으로 빨려 들어간다.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사람을 떠올리며, 더 큰 사랑을 느낀다. - P153

그로부터 불과 4개월 후, 타라와 나는 형이 누워 있는 침대곁을 번갈아 지키며 잠든 형을 깨우지 않기 위해 소리를 죽인 채텔레비전을 봤다.
그런 밤 중 하나였다. 늦은 밤, 크리스타 형수와 미아, 타라 그리고 내가 형을 돌보고 있었다. 형이 하는 말은 더 이상 앞뒤가 맞지 않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런 형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치킨 맥너깃을 먹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맨해튼의 밤거리로 뛰어나가 소스와 치킨 너깃 한 아름 사 들고 돌아오던 그때보다 더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침대를 둘러싼 채 우리는 우리가 아는 최선을 다해 사랑과 슬픔과 웃음이 가득한 소풍을 즐겼다. - P163

소위 비숙련직의 큰 장점은 엄청나게 다양한 기술과 배경을지닌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한다는 점이다. 화이트칼라 직종은 비슷한 교육을 받고 관심도 비슷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대부분의 동료들이 어느 정도 비슷한 재능과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경비원의 세계에는 이런 문제가 없다. 메트가 새로운경비를 고용할 때면 기본적으로 ‘와서 면접보세요‘라는 내용의짧고도 명료한 광고를 낸다(예전에는 《뉴욕타임스》, 요즘은 온라인에). 경비 담당 부서에서 찾는 사람은 이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강한 사람이고 그들은 이 일에 적합한 다양하고도 방대한 인력풀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 결과 외국 출생인 사람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경비팀은 인구학적으로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축에서 각양각색이다. 미술관 경비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출발하는 특별한부류는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수없이 많은 형태의 사람들이 이직업을 택하며 각자 서로 다른 동력을 가지고 일에 임한다. 《뉴요커》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일을 시작한 동료들은 엘리트 사립학교 출신이었고 대부분이 출판계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온 사람들이었다. 메트의 경비팀에서는 벵골만에서 구축함을 지휘했던 사람, 택시를 몰던 사람, 민간 항공사 파일럿으로 일한 사람, 목조 가옥을 짓던 사람, 농사를 짓던 사람, 유치원에서 아이들을가르치던 사람, 순찰을 돌던 경찰, 그런 경찰들의 활동을 신문에보도하던 기자, 백화점 마네킹의 얼굴을 그리던 사람들을 만날수 있다. 전 세계 오대양 육대주와 뉴욕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열의가 넘치는 사람도 있고 매사에 뾰로통한 사람도 있다.
경비 전문가들도 있고 어쩌다 보니 이 일을 하게 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포인트에 서서 그들 중 어느 누구와 이야기를 나눠도 혼란스럽지 않다.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화의 물꼬는 이미 튼 셈이다. - P183

동료 경비원들이나 관람객들과 나눈 짧은 소통에서 찾기 시작한 의미들은 나를 놀라게 한다. 부탁을 하고, 답을 하고, 감사 인사를 건네고, 환영의 뜻을 전하고... 그 모든 소통에는 내가 세상의 흐름에 다시 발맞출 수 있도록 돕는 격려의 리듬이 깃들어 있다. 비탄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리듬을 상실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잃고 나면 삶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한동안 그 구멍 안에 몸을 움츠리고 들어가 있게 된다.
여기서 일하면서 나는 메트라는 웅장한 대성당과 나의 구멍을 하나로 융합시켜 일상의 리듬과는 거리가 먼 곳에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상의 리듬은 다시 찾아왔고 그것은 꽤나 유혹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가 영원히 숨을 죽이고 외롭게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만들어지는 운율을 깨닫는 것은 내가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를 깨닫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삶에서 마주할 대부분의 커다란 도전은 일상 속에서 맞닥뜨리는 작은 도전들과 다르지 않다. 인내하기 위해 노력하고, 친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특이한 점들을 즐기고 나의 특이한점을 잘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관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상황이 좋지않더라도 적어도 인간적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 P191

 태양이 빛나고, 고층 아파트들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두왑가수들이 동전을 모을 모자를 돌리고, 샛노란 옐로캡 택시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서 민들레를 문지른 자국처럼 보일 때면 5번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가판대에서 겨자 소스를 바른 핫도그를 하나 사서(그는 경비원들한테는 1달러만 받는다) 외지인 무리 사이에 끼어 앉아 나 혼자 유일하게 이곳에 속한 사람이라는 기분을 즐긴다. 계단에 편히 자리를 잡은 나는 재킷 단추를열고, 클립으로 부착하는 넥타이를 떼고, 공중에서 이런 나를 내려다보면 얼마나 멋진 한 폭의 그림으로 보일까 생각한다. 이 위대한 도시의 심장부에 있는 위대한 미술관의 계단에 작은 경비원 하나가 앉아 있다. 작지만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존재는 아니다. 앉은 자리는 편안하고, 근무복은 몸에 잘 맞는다. - P193

"아테나는 특별한 유형의 지혜를 관장하는 여신이었어." 학생들에게 말한다. "오디세이」 읽어봤니? 읽어봤다고? 좋아. 『오디세이」에서 아테나는 오디세우스가 자신감과 영감을 회복해야할 때마다 나타나. 그런 느낌 있잖아... 상태가 별로인 채로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조금 전까지는 불가능하다고 느꼈던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와 용기가 생기면서 정신이 또렷해지는 느낌. 오늘날 우리는 그 변화가 인간의 내부에서 생겼다고 생각하겠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어. 그들에게 힘이란 모두 외부로부터 비롯한 것이었고, 그 힘은 강력하고, 예측 불가능하고, 운명을 좌지우지하듯 사람의 감정을 뒤흔드는 힘이었어. 아테나는 마음을 꿰뚫고 변화시키는 방식 때문에 ‘가까움의 여신‘이라고도 불렸어."
나는 여신의 얼굴을 가리킨다. "아마 마음을 좋은 쪽으로 바꿔놓는 경우가 많았겠지. 그녀를 좀 더 들여다봐. 그리스인들이 지혜가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너희도 아테나가 기분을 나아지게 해주는지 한번 보렴." - P205

그리고 어느 날,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를 받았던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독실한 무슬림 방문객 하나가 지금 우리가 동쪽을 향하고 있는지 물어온 것이다. 그와 나는 예배자들에게 메카의 방향을 안내하는 벽감인 미흐라브Mihrab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 그에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기도해도 되는지 묻는다. 나는 태연하게 답한다. "네, 물론이죠. 하지만 다른 관람객들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으니 엎드리는건 안 됩니다." 그는 나에게 감사를 표하고 두 손을 모으며 미흐라브를 뚫어지게 응시한다. 나도 그를 따라 하며 하나의 중심점, 이 경우에는 실제 위도와 경도상의 좌표를 향하도록 자신의 믿음을 맞춘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한다. 방문객에게 이 작품은 그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거룩함으로 통하는 관문인 셈이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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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시간이 끝나고 저녁 교대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게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몸도 마음도 지친 것을 느낀다. 남은시간은 꿈결처럼 신전 앞에 서서 시선을 이것에 두었다가 저것에 두었다가 하면서 그저 흘러가게 두리라 생각한다. 명랑한 관람객 하나가 내게 지루한지 묻는다. 내가 특별히 지루해 보여서 물었다기보다는 종종 받는 질문이다. 딱히 그렇지 않다고 답하자 그녀는 "좋네요!"라고 말하고는 가버린다. 나는 지루해하는법을 거의 잊어버렸다고 말할 기회를 놓친다.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나 피해자였던 사람들이 가해자들에게 공포나 증오가 아닌 애착이나 온정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심리적 현상-옮긴이)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거북이처럼 흐르는 파수꾼의 시간에 굴복한 것 같다. 나는 이 시간을 소비할 수 없다. 그것을 채울수도, 죽일 수도, 더 작은 조각들로 쪼갤 수도 없다. 이상하게 한두 시간 동안이라면 고통스러울 일도 아주 다량으로 겪다보면 견디기가 수월해진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일이 끝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시간이 한가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구식의, 어쩌면 귀족적이기까지할 삶에 적응해버렸다. - P101

 음악은 알 수 없는 리듬을 따라 내가 예상하는 음계에서 항상 조금 위나 아래에 있는 음들로 이어진다. 나는이것이 선입견을 버리고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흡수할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종류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연주자가 마침내 손을 멈췄을 때는 아마 1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테지만 수많은 디테일로 채워진 그 연주를 듣는 동안 마치 수천번의 붓놀림으로 채운 그림이 순간순간 공중에 걸려 있는 듯했다. 나는 겸손해지는 것을 느낀다. 세상을 탐험해볼 자격만을 간신히 갖춘 갓난아기가 된 기분이다.
고쟁 연주자가 악기를 정리한 뒤 ‘딸깍‘ 하고 케이스를 닫는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원을 둘러싼 전시실들에 시선이 닿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내가 가진 생각 따위는 모두 제쳐두고 그곳의 중국화를 새롭게 바라보겠다는 의지가 타오른다. 시각 예술은그 획들을 화면에 잡아두며 끝나지 않는 공연을 펼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너그럽게 느껴진다. - P110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추게됐다. 우선 작품에서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이 솔깃해할 만한 대단한 특이점을 곧바로 찾아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낸다. 뚜렷한특징들을 찾는 데 정신을 팔면 작품의 나머지 대부분을 무시하기 십상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그린 초상화가 아름다운 까닭은 그의 천재성을 반영한 특징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색채와형태, 인물의 얼굴, 물결처럼 굼실거리는 머리카락 등이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다양하고 매력적인 세상의 속성들이 훌륭한 표현 수단 안에 모아졌기 때문이다.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건 좋다‘, ‘이건 나쁘다‘ 또는 ‘이건 가, 나, 다를 의미하는 바로크 시대 그림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상적으로는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선 안된다. 예술이 우리레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 P114

나는 그녀가 이 유리 케이스 안에 더 이상 갇혀 있지 않을 언젠가를 상상하며 이디아 앞에서 긴 시간을 보낸다. 어느 좋은 날라텍스 장갑을 낀 기술자들이 전시 스탠드의 속박을 풀고 그녀를 "제한구역, 관계자외 출입 금지"라는 표지판이 붙은 지하실로 데려갈 것이라 믿는다. 그녀를 수장고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포장 기술자가 유물들을 하역장으로 옮기기 전 주문 제작한운송 상자에 넣는 등록소 옆의 구역으로 향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디아가 나이지리아 베닌 시티에 계획 중인 새로운 박물관으로 보내질 것을 기대해본다. 1897년, 영국군이 베닌 시티를 정복, 약탈했고 여러 차례의 불법적인 거래 끝에 이디아는 결국 메트의 소장품이 되었다. 경비원인 나는 유물 반환 문제에 특별한 전문 지식은 없지만, 우리 중 누구도 석방해야 할 강력한 이유가있는 것들을 붙들고 있는 감옥의 교도관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이 가면은 적어도 세계적인 도시의 공공 컬렉션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서아프리카 이야기를 하니 나이지리아, 가나, 토고, 부르키나파소, 카메룬출신의 경비원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 P122

시선을 사로잡는 보기 드문 사람들도 있다. 한 노인이 감상에지쳐서 보행기에 몸을 엎드리면 그의 아내는 고개를 숙여 그의귀에 속삭인다. 몇 분 동안 그녀는 그가 체력이 모자라 놓치게될 중세의 유물들을 자세히 묘사해준다. 설명이 끝나면 그녀는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들은 다시 조금씩 나아간다.
아메리카 전시관의 분수대 앞에서 한 어머니가 아이에게 동전두 닢을 건네며 말한다. "하나는 네 소원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네 소원만큼 간절한 다른 누군가의 소원을 위해서." 이런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나는 듣자마자 언젠가 내 아이들에게 똑같이 말해주리라 결심한다. - P143

내가 갈팡질팡하며 설명하는 동안 남자는 그런 이야기에 굶주린 듯 귀를 기울인다. 보기 드문 사람이다. 아는 척을 하거나비웃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수많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의 충돌을 반기는 사람. 나는 온종일 감탄했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남자의 개방적인 태도에 더 탄복한다. 남자는 나에게 감사를 표한 후 떠났고 그때부터 나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듣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은 말하는 사람들이다. 간혹 말을 하면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를 향해 엄청나게 천천히독백을 하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노력이 하도 정성스럽고 진지해서 그 마법의 힘이 풀릴까 두려워 감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이 재능 있는 예술가들...." 그녀는 <안데스의 오지 Heart of theAndes>(프레더릭 에드윈 처치 Frederic Edwin Church의 대형 풍경화, 1857년 봄의 에콰도르 여행에서 그린 수많은 스케치를 바탕으로 안데스산맥의풍경을 묘사했다-옮긴이)의 광활한 풍경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얼마나 아름답게 그렸는지 좀 봐요... 얼마나 능숙하게 잘그렸는지 몇 달, 몇 년 동안 잊혀지지가 않지요... 계속 떠올리게 되죠. 휴식 같은 곳으로 나를 계속 데려다놓아요... 대단해... 사진을 보고 그린 것도 아닌데, 단지 눈으로 본 것일 텐데... 그리고 그렸을 텐데 말이죠..." - P146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것보다도 이 시리즈는 대체로 사람이 얼마나 구체적이고도 독특하게 만들어졌는지, 우리가 태도와 몸짓으로얼마나 많은 의사소통을 하는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선, 색깔, 빛, 그림자로 보이는지를 생생하게 일깨워준다. 사진속의 오키프는 털이 없는 영장류 같기도 하고, 또 일순간 근엄한여신 같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실체일 것이다. 그렇지않은가? 인류라는 생물종의 신비로움이 나에게 깊은 각인을 남긴다.
사진에서 눈을 돌려 전시실을 둘러보니 문득 웃음이 터질 것같다. 전 세계에서 모인 수십 명의 살아 숨 쉬는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데 하나같이 벽에 걸린 무색의 움직임 없는 인물 사진들을 보느라 옆 사람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현실의 사람들은 흔해 빠진 대상들로 간주되는 듯하다. 정말이지 아무 때나 볼수 있는 대상 아닌가. 우리의 삶을 순식간에 지나쳐 영원히 사라져버릴 낯선 이들에게 왜 구태여 관심을 쏟겠는가. 여기 있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조지아 오키프는 우리에게는 없는 미덕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멈춰 있다. 그녀는 영구적이다. 그 주변으로는 그녀의 성스러운 아름다움과 (옛말에서 성스럽다Sacred는 단어의 의미는 ‘분리되어 있는‘이었다) 지루하고 평범한 세속의 영역을 분리하는 액자가 둘러져 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멈춰 서서무언가를 흠모할 명분이 필요하다. 예술 작품은 바로 그것을 허락한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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