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염이 그린 도안을 발전시켜 크롬 살갖이 접히는 정교한 구조와 금속 뼈대의 복잡한 연결 부위를 설계했다. 경첩 하나하나를 결합하고, 톱니바퀴 한 개 한 개를 조립하고, 모든 전선을 납땜질하고 이음매를 용접하고 구동 장치 하나하나에 윤활유를 발랐다. 그렇게 염의 몸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는 광경은 경이로웠다. 내 눈앞에서 염은 마치 은빛 종이접기 구조물처럼 접혔다가 펼쳐지기를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태곳적의 전설에 나오는 존재처럼 아름답고 소름 끼치는 크롬 여우가 내 앞에 서 있었다.
- P108

아까도 얘기했지만, 난 죽지 않았어.
그때껏 살면서 난 담배가 내 영혼인 줄만 알았어. 그래서 ‘담뱃갑‘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거야. 애초에 관심도 없었어, 그 얌전한 종이 껍데기에는 그 껍데기 속의 조그마한 빈 굴에도.
빈 담뱃갑은 길을 잃고 집에 들어온 거미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갈 때 집 대신 요긴하게 쓸 수 있어, 잔돈이나 옷에서 떨어진 단추를 넣거나, 반짇고리로 쓰기도 좋고, 립스틱이랑 아이라이너랑 조그만 블러셔 같은 것도 그럭저럭 넣고 다닐 만해, 내가 넣고 싶은 건 뭐든 다 받아들이는 물건이지.
내가 지금 느끼는 기분이 바로 그거야. 마음이 탁 트인 기분, 만사가 태평한 기분, 어디에든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말이야. 그래, 내삶은 이제 비로소 진짜 실험이 됐어. 다음엔 뭘 할 수 있을까?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여기까지 오기 전에 난 먼저 내 담배를 다 피워 버려야 했어. 나한테 일어난 일은 ‘상태 변화‘였어. 내 영혼이 담배 한 갑에서 담뱃갑으로 바뀌었을 때, 난 성장한 거야.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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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봤지요? 틸리가 없으면 당신은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자신의 삶조차 기억 못 하고, 어머니한테 전화 한 통 못 겁니다. 이제 인류는 사이보그입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의식을 전자(電子)의 영역으로 확장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아를 두뇌 속으로 다시 욱여넣기가 불가능합니다. 당신들이 파괴하려고 했딘 당신의 전자 복제판은 문자 그대로 실제의 당신입니다.
이렇게 전자적으로 확장된 자아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된 이상, 당신들이 센틸리언을 무너뜨려 봤자 금세 다른 대체재가 등장해서 우리 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이미 늦었다 이겁니다. 거인은 이미 오래전에 램프에서 탈출했어요. 처칠이 이런 말을 했다지요. 건물을 만드는 것은 우리이지만, 나중에는 그 건물이 우리를 만든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돕는 기계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 기계가 우리를 대신해서 생각을 한다. 이겁니다.
- P71

피치 못할 운명과 마주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적응하는 것뿐입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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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불을 보듯 빤한 일이지만) 만약 그 회사의 채용 기준에서 트위터 팔로어 수가 최우선 고려 사항이라는 말이 새어나간다면 어떻게될까?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자들은 팔로어 수를 늘리기 위해 갖은노력을 다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수천 명의 팔로어를 만들어준다는19.95달러짜리 대행 서비스를 이용할지도 모른다. 그런 팔로어들은대부분 로봇이 자동으로 생성시킨 가짜다. 이렇듯 사람들이 시스템을 악용함에 따라 대리 데이터는 고유한 효과성을 잃고,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은 긍정 오류false positive 의 이득을 얻게 된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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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가 딴 데 정신이 팔리면서 대화는 공백 상태에 빠졌다. 둘은마주 보고 빙그레 웃으며 침묵을 음미하려 했다.
그 순간, 귓속의 이어폰에서 틸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엘렌한테 요즘 유행하는 일본식 디저트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는건 어때요? 제가 적당한 가게를 알아요."
사이는 갑자기 달고 예쁘게 생긴 음식이 먹고 싶어 견디기가 힘들었다. 방금 전까지는 아예 생각도 못했는데.
틸리는 단순히 알고 싶은 것만 가르쳐 주지 않아요. 뭘 생각해야할지까지 가르쳐 준단 말이에요.
사이는 곰곰이 생각했다.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지금도 알아요?
사이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 보려고 했다. 방금 틸리가 한 짓은 뭐였을까, 사이 본인도 모르는 욕구를 추측으로 알아맞힌 걸까? 아니면 사이의 머릿속에 그 욕구를 심어 놓은 걸까?
지금도 아냐고요.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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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번역자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큰 틀에서 글쓰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은유 또한 자연스레 번역에서 얻게 된다.
모든 의사소통 행위는 번역이라는 기적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서, 내 신경 세포 속의 변화하는 활동 전위들은 특정한 배열과 유형과 사유로 분출한다. 그들은 내 척수를타고 흘러내려 내 팔과 손가락으로 갈라져 들어가고, 결국에는 근유들이 움찔거리면서 사유가 동작으로 번역된다. 키보드의 조그마한 지렛대들이 눌리고, 전자들의 배열이 바뀌고, 종이 위에 기호들이 찍힌다.
다른 시간대의 다른 장소에서 그 기호들에 부딪혀 반사된 빛은,
자연이 수십억 년에 걸친 무작위적 변이 끝에 빚어낸 초정밀 광학기관 한 쌍으로 들어간다. 거꾸로 뒤집힌 영상이 광감지 세포 수백만 개로 이루어진 막 한 쌍에 맺히고, 이 막을 통해 전기적 파장으로 번역된 빛은 시각 신경을 거슬러 올라가 시각 교차를 지나 시각로를 따라 시각 겉질로 들어가며, 이곳에서 파장은 다시 조립되어 글자, 구두점, 단어, 문장, 보조관념, 원관념, 사유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위태롭고 불합리하고 SF처럼 보인다.
- P8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울고 있는 내 모습에서 시작한다. 기억속의 나는 엄마와 아빠가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아빠는 달래기를 포기하고 방에서 나가 버렸지만, 엄마는 나를 안고 부엌으로 가서 식탁 앞에 앉혔다.
"칸, 칸 (자, 보렴.)"
- P13

"내가 사랑(love)‘이라고 말할 때, 난 그 말을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이 [愛]‘라고 말하면,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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