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잠깐 멈춰야겠다. 방금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책의 살인자가 태어난 것이다. 그는 지금 커다란 푸른 눈과 매력적인 얼굴을 가진아기이다. 그 아기는 36년이 지난 후 두 남자를 죽이고 사형수 감방에 앉게 될 것이며, 미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주장함으로써 악명을 떨친 살인자로 기억될 것이다. 그때 그의 푸른 눈을 들여다본다면 그 속에서 사람의 마음 깊숙이 김취져 있는 본능을 건드리는 섬뜩한 시선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날카로우면서도 죽음이 느껴지는 눈빛이다. 또한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다는 표정이다. 자기 몸에 부딪히고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아니 꼭 그런 핑계 따위 대지 않고도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의 표정말이다. 아기의 눈빛이 살인자의 눈빛이 되기까지, 그 사이에는 파멸의 역사가 있다.

아버지는 나와 가까운 듯하면서도 아주 멀게 느껴진다. 나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는 아버지이다. 내가 아버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면 그의 비밀을 밝혀내고 그의 두려움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나는 이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는 아마도 나는 나 자신의 마음과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속에 숨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내야 할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것은 내가 아버지와 너무나 많이 닮았고 그래서 그 죄악의 씨가 이미 내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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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생물은 야성을 포기한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공격성을 접고, 자기 몸에 닥친 어떤 운명도 감수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사람 가슴에 안겨 우리 집에 들어서는 다친 야생동물은 그저 꼼짝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다.
마치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마지막 삶의 에너지를 아껴 두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환자 동물이 우리 집 현관을 들어선다. 때로는 들어오자마자 숨을 거두는 동물도 있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는데..." 하며 안고 온 사람은 눈물을 글썽인다. - P197

옛날, 그래 봐야 40년도 채 안 된 일이지만 인간도 동면을 했었다. 대지는 얼어붙고 눈으로 뒤덮인다. 나뭇잎도 거의 다 떨어지고가지에 매달려 있어도 잎의 본래 기능인 광합성은 하지 못하니 개점휴업인 셈이다. 그렇다면 생물의 우두머리인 인간이 뭣 때문에 애써 일해야 하는가. 설마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고장농부들은 다시 봄이 오기까지의 겨울 한 철을 다른 동물들을 흉내내듯 반동면 상태로 시간을 보낸다.
오전 10시가 지나도록 자다가 파친코를 하고 돌아와서는 술을 마시고 다시 한잠 잔다. 아니면 몇 사람이 모여 화투를 치다가 또술판을 벌인다. 파친코나 화투라고 해 봐야 푼돈이나 쓰는 정도고술도 자기들이 빚은 탁주다. 이렇게 봄갈이가 시작되는 4월 중순까지 반동면에 들어간다.
12월의 망망한 벌판을 오가는 사람은 수의사와 우편집배원 그리고 빚을 채근하러 다니는 빚쟁이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길에서 마주치면 "모두들 동면 중이지요?" 하고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가을에는 식욕이 당긴다고들 한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쾌청한 날씨 속에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지거나, 혹은 음식의 수확기인 가을에 식욕을 돋우는 것들이 속속 나오기 때문이라는 등 식욕을 증진시키는 갖가지 이유가 거론된다. 하지만 단순히 ‘식욕이 당긴다‘
는 설명이 가장 맞는 것 같다. 식욕이 당기는 것은 동면을 위한 본능이기 때문이다. - P204

여기서 큰곰은 놀라운 수법을 사용한다. 이들은 수정란의 착상을늦추는 방법으로 태아의 발육을 지연시킨다. 착상되지 않으면 수정란이 어미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수정란이 크지 않는 것이다. 때가 돼서 분만할 시기가 다가오면 ‘이제 슬슬 키워 볼까 하는신호를 받은 자궁벽이 그때까지 그대로 놔뒀던 수정란을 살짝 잡아착상시킨다. 이런 식으로 작은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정말 기이한 일로 많은 연구가가 ‘왜?‘라는 물음에 도전했다. 여러 설이 등장했고 가장 그럴 듯한 다음 설이 정설이 되었다. 우선거대한 몸뚱이를 가지고 이 추운 고장에서 겨울을 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몸에 지방을 축적하고 그래도 충분치 않아 겨울에 자는것으로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한다. 이것이 바로 동면이다. 겨울에는 어느 동물이나 활동이 둔해지는데, 그만큼 다른 생물로부터의 공격이 줄고 안전성이 높아진다. 그렇다면 가장 신경 쓰이는 새끼키우기의 첫 시기를 이때로 맞추면 제일 좋지 않을까.
그런데 그 시기는 동면 기간이기도 하다. 게다가 꾸벅꾸벅 졸면서 새끼를 키우려면 되도록 새끼가 작아야 좋다. 작으면 어미 곰의 에너지 소모도 그만큼 줄어들 테니까. 작게 낳으려면 교미는 늦출수록 좋은데 동면 직전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그 시기는 동면을 위해 지방을 축적하는 때와 겹친다.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번식을 위한 여러 의식은 비교적 한가한 초여름에 치른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수정란이 어미의 자궁 속에서 쑥쑥 자라면 ‘작게 낳아 크게 키운다‘는 방침은 헛일이 되고 만다. 이 모순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수정란을 살아 있는 상태로 자궁 속에 보관했다가 적당한 때에착상시켜 키우는 묘수, 즉 착상 지연의 시스템이 확립된 것이다. 이상이 저 거대한 자궁 안에서 연출되는 드라마의 줄거리다. - P216

해는 벌써 서쪽 언덕 위에서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며 지고 있었다. 나도 주위를 정리했다. 새끼 여우가 탄생하면 3월도 끝난다.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전조등에 비친 눈토끼를 보았다. 털갈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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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별로 인구 대비 몇 개의 지구가 더 필요한지를 계산하기도 하는데, 그 결과 우리나라는 스위스, 러시아와 함께 3.3개의 지구를 필요로 하며, 미국이 4.8개, 호주가 5.4개로 그보다 더 심한 상태에 있다. 즉, 각 나라별로 자원이 소진되는 날짜를 나눠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4월 10일이면 그해에 주어진 모든 자원을 사용하므로, 12월 31일까지 자원을 사용하려면 3.3개의 지구가 필요한것이다. 인도네시아, 에콰도르, 이라크, 니카라과, 쿠바와 같은 나라들은 12월까지도 가용 자원이 있는 상태인데, 자원량 대비 소비가 크지 않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업 발전이 이루어진 국가나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경우 자원을 심하게 과소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 P152

오션 클린업은 매 5년마다 태평양 쓰레기의 50% 수거를 목표로 삼고 있다. 그 원리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플라스틱은 가두고, 바닷속 생물들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특수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길이 100킬로미터, 높이 3미터의 플라스틱으로 U자형 울타리를 설치해 원형으로 움직이는 해류에 떠밀려 바다 위에 떠다니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울타리에 갇히고, 물고기와 같은 해양 생물은 울타리 아래로 통과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때 울타리는 해류의 힘을이용해 띄워놓은 뒤 태양에너지를 이용한 자가발전이 가능하도록 설계하고, 플라스틱 쓰레기가 어느 정도 모이면 한꺼번에 수거한 뒤 재활용센터에 판매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 P164

물, 그중에서도 담수는 70퍼센트를 농업에 사용하고 에너지 자원 개발과 발전용 냉각수 등으로도 다량 사용된다.
이런 현 상태의 에너지 수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2050년에는 2005년 대비 1.6배의 에너지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0년 동안 지하수 사용 증가 속도는 인구 증가속도의 두 배였고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하는 질병의 80퍼센트는 물과 관련이 있다고 하니, 에너지 생산 방식 자체가발전하지 않으면 물 부족은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현재 추정되는 에너지 부분의 물 수요 증가분은 11퍼센트로, 이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2030년에는 전 세계 담수의 40퍼센트가 부족해지고, 이는 식량과 에너지 갈등을 심화할 것이라 전망된다. 유엔에 따르면 이 같은 상황이 유지될 경우 전 세계 인구의 15퍼센트는 바닷물의 염분을 제거하는 해수담수화 기술을 통해 물을 마셔야 한다고 한다.
오래전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도 물 부족을 경고한 바 있다.

나는 21세기에는 물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다. 물 전쟁은 석유 전쟁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석유는 모자라면 다른 연료를 찾으면 되지만 물은 대체가 불가능하다.
- P170

프로파일링 플로트는 수중 글라이더의 전신으로, 수중 글라이더는 간단히 말하면 프로파일링 플로트에 날개만 부착한 형태라 할 수 있다. 프로파일링 플로트도 부력을 조절해서 오르내리며 수집된 데이터와 위치 정보를 전송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한 번 가라앉으면 정해진 수심에서 1주일 이상 머물며 해류를따라 이동한 뒤에 부상하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움직인 위치를 바탕으로 해당 수심의 해류를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오르내리는 동안에도 수온과 염분 등을 측정해 프로파일링된 수직 구조를 관측한다.
프로파일링 플로트는 1999년 세계 최초로 동해에서 시험 후, 2000년부터 세계 도처의 바다 곳곳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2019년 5월 기준 전 세계 바다에는 3877개의 프로파일링 플로트가 띄워져 있다. 처음 목표였던 3000개를 훨씬 뛰어넘은 개수다. 마치 세계 도처의 바다의 3877개의 선박에서 쉬지 않고 10일마다 지속적인 수직 프로파일링 관측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동해에도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수심이 1000미터 이하인 천해에는 투하하지 않기에 황해와 동중국해에서는 자료를 수집하지 못했다. 이처럼 오늘날에는 챌린저호 탐사 시대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비약적인 해양관측 데이터가세계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수집되고 있다. - P228

이런 방대한 데이터를 오늘의 기록으로 후대에 전해주기만 해도 앞으로의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술은 우리가 추출할 수 없었던 새로운 정보들로부터 지구환경 문제의해결책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알파고가 데이터를 학습 프로바둑기사 이세돌 9단을 이긴 것처럼, 후일 해양관측 데이터를 통해 학습한 인공지능은 해양과학적원리를 이용해 오늘날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지구환경 문제를 푸는, 보다 나은 해결책을 찾도록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선조들의 지혜를 본받아야 한다.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엄청난 기록문화유산을 남긴 선조들처럼, 해양 데이터 과학의 시대를 맞이하는 해양 정보 지식의 프로슈머들에게 방대한 해양관측 기록 데이터를 바로 지금 수집해 남겨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지구환경 문제들을 과학으로푸는 시작점이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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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수사슴이 부럽다. 남자라고 1년 내내 긴장해서 살아야한다면 너무하지 않은가? 가끔 쉬고도 싶다. 남자의 위신이라는것이 이른 봄에 두릅나무의 눈이 꺾이듯 떨어져 나가 한동안 사내임을 내팽개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나 아이들의 심정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남자의 체면을 내세운 쓸데없는 싸움도없지 않을까? 그러다가 모두들 긴 겨울 채비에 들어가려는 가을이되면 수놈은 명예를 되찾고 짧고 깊게 산다. 아, 멋지지 않은가. 일본사슴들에게 그때가 바로 10월인 것이다. 보기에도 그 모습이 늠름해서 나도 모르게 ‘이번 겨울에도 힘내게, 친구!‘ 하고 말을 건네는데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 P166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아주 오랜 옛날 대풍작의 가을에 뚝뚝 도토리가 떨어진 자리는 땅 위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늪지대일 수도있고 호숫가였을 수도 있다. 물위에도 물론 떨어졌을 것이다. 도토리는 물에 떠내려가 가까운 바닷가 모래밭에 얹히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땅속의 수분을 빨아들인다. 다음해 도토리는 싹을 틔운다. 도토리의 두툼한 떡잎은 대량의 전분과 지방의 저장고로, 태어나는 어린눈을 키울 충분한 영양분을 가지고 있어 다음 해의 성장까지도 도울 수 있다. 이렇게 10년이 지나면 어린 떡갈나무 숲이 되고, 백년이 지나면 울창한 숲을 이룬다.
그리고 2백 년이 훨씬 넘으면, 보는 사람의 입이 쩍 벌어질만한 거대한 숲이 된다. 떡갈나무 숲을 보며 이 숲이 탄생할 무렵과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해 보았다. 만일 내 상상이 틀렸다면 조물주에게 듣는 수밖에 없겠지.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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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악몽

악몽을 꾸었다.
그 꿈에서는 언제나 밤이다. 우리는 어릴 때 살던 집에 있다. 1950년대에 지어진, 널빤지로 지붕을 댄 그 이층집은 비바람에 시달려 누렇게 빛이 바래고 낡았다. 미국 어느 빈민촌의 바깥 변두리 치솟아오른 공장의 굴뚝들과 야간조명등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한 채 자리 잡고 있는 집이다. 집 앞에는 기찻길 하나가 달빛을 반사하며 쭉 뻗어 있는데, 그것은 내게 금지된 저 숲을 가로막는 경계선이다. 꿈속에서는 밤새도록 저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외부 세계로부터 손님을 실은 기차 한 대가 오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기차는 오지 않는다. 기적소리만 울릴뿐.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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