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유럽은 무엇을 해야 할까?
프레드릭 제임슨은 최근 해방의 한 형식으로 사회의 모든 분야를 전 세계적으로 군사화하는 유토피아를 제안했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음이 갈수록 분명해지는지금 그동안 꿈꿔온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풀뿌리 민주화운동을 통한 모든 변화의 시도 역시 결국 실패할 운명이다. 그러므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효과적으로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일종의 ‘군사화‘다. 이는 자율규제 경제의 힘을 무력화無力化시키는 다른 이름이다. 어쩌면 유럽에서 지속될 난민 위기는 정확히 이 가능성을 시험할 기회를 제공하리라.
- P103

더욱이 대다수 난민이 서구의 인권 개념과 양립할 수 없는 문화권에서 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외견상 분명한 관용의 제스처(타인의 특수한 감수성을 상호 존중하는 것)가 결코 분명하게 작동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슬람이 서구의 신성모독적 이미지와 냉소적 유머(두 가지 모두 우리 자유의 일부로 여긴다)를 수용할 수 없는‘ 것처럼, 서구 자유주의자도 이슬람의 많은 풍습(일례로, 여성의 복종)을 ‘견딜 수 없다‘고 여긴다. 요컨대, 한 종교 공동체 구성원이 자신의 종교를 겨냥한 직접적 공격을 신성모독 침해로 여기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 다른 사회의 삶 자체를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경우(그 경우 침묵은 불가능하다), 폭발은 피할 수 없다. - 네덜란드, 독일, 덴마크에서 벌어진 호모와 레즈비언을향한 공격이나, 부르카로 온몸을 두른 여성을 접한 프랑스인들이 이를 프랑스 정체성을 위협하는 공격으로 간주하여 침묵할 수 없다고 한 것도 매한가지다. - P105

그러므로 두 가지에 유념해야 한다. 첫째,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을 만드는 것이다. ‘유럽 중심적‘이라는비난을 들을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종교의 자유, 집단적 폭력에 대항하는 개인적 자유의 보호, 여성 인권 등이 그것이다.
둘째, 이 제한 내에서 상이한 생활방식에 무조건적 관용을 행해야 한다. 이런 규범과 소통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가능한 모든 형태의 법적 강제력을 집행해야 한다.
우리는 진보 좌파에 만연한 인도주의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주문처럼 반복되는 불평과 상황을 윤리화시키는 것-유럽은 공감을 상실했다.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다 등은 반이민주의 폭력의 반대급부일 뿐이다. 두 진영 모두 고유한 생활방식의 수호에 윤리적 보편성이 결여되었다며 이를 회복하자고 가정한다(결코 자명하지 않은 가정이다). - P106

 이런 대규모 인구 이동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할까? 과거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때, 사회변화는 야만적이고 충동적인 폭력과 파괴로 행해졌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다는 점에서 최악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인류가 ‘유연한‘ 유목민적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지적-세계적 환경변화는 분명 전대미문의 대규모 사회 변화와 인구 이동을 불러올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떤 특정 생활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를 보호할 당연한 권리를지니지만 삶의 기본좌표를 전면적으로 바꿔야 할 역사적 격변이 발생할 수도 있다(아메리카 원주민, 곧 ‘인디언‘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상황을 안정시킬 새로운 생활방식을 찾지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이런 혼란기에는 국가주권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고하여 새로운 차원의 세계적 협력을 구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기후변화, 물과 에너지 부족으로일어날 경제와 소비의 대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누가이 문제를 결정할 것인가? 누가 어떻게 실천에 옮길 것인가?
이 모든 질문의 답은 ‘만인에게 평등한 이주의 자유‘라는 애매한 용어가 아닌 정교하게 계획되고 잘 조직된 변화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
- P108

유럽은 자신의 의무를 자각하고, 난민의 인간적 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 타협은 있을 수 없다. 민족 대이동은 우리의 미래이며, 이 의무 외의 유일한 선택은 신종 야만이다(혹자는 이를 ‘문명의 충돌‘이라 칭한다). 그러나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난민 이동 발생의 조건을 제거할 철저한 경제 변혁이다. 난민의 주 원인은 글로벌 자본주의와 그 지정학적 게임이다. 이를 철저히 바꾸지 않으면 머지않아 아프리카 난민에 이어 그리스와 다른 유럽 국가의 난민들이 그 뒤를 이을 것이다.  - P109

 오늘날 유일하게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계속되는 자본주의 지배를 지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그 무한 재생산을 막을 충분히 강한 적대성을 찾을 것인가? 적대성은 네가지다. 생태 파국의 위기, 이른바 ‘지적재산권‘의 사유재산화, 새로운 기술과학 발달이 초래할 사회윤리적 영향(특히 유전공학), 마지막으로 무시할 수 없는 적대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 새로운 장벽과 슬럼이다. - P110

이제 우리는 계급투쟁을 다시 의제로 삼아야만 한다. 이를 수행할 유일한 길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뿐이다. 이런 전체적 시야 없이, 파리 테러희생자들과의 비장한 연대감은 윤리의 가면을 쓴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유럽에 도착한 난민의 상황은 무엇 하나 분명한 게 없지만 분명 많은 난민들은 조국의 끔찍한 현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파리 테러가 벌어진 다음 날, 한 난민이 텔레비전에서 무미건조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파리 같은 도시가 이런 비상사태에 빠져 몇 년은 아닐지라도 몇 달 동안 일상생활의 평온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바로 우리가 도망친 곳입니다." 우리는 이 말에 담긴 진리가 번쩍이는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테러리스트와 테러의 희생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이런 세계적인 연대는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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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해, 폴 디는 생각했다. 정말 위험해. 한때 노예였던 여자가 뭔가를 저렇게나 사랑하다니, 무척이나 위험한 짓이었다. 특히 사랑하는 대상이 자기 자식이라면 더욱더 그가 알기로는 그저 조금만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모든 걸 그저 조금씩만 그래야만 사람들이그 대상의 허리를 부러뜨리거나 포대에 처넣는다 해도, 그다음을 위한 사랑이 조금은 남아 있을 테니까.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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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성은 곧 ‘타인‘의 보편성이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이웃만 섬뜩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소름 끼치는 존재라는 알 수 없는 정체성의 심연과 직면한 개인들만이 이 보편성을 지닌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인을 대하면 헤겔의 간결한 지혜를 기억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인의 비밀은 이집트인 자신에게도 비밀이다." 바로 그래서 이웃과 만날 때면 공감하거나이해하려 시도하지 말고, 마음에도 없는 존중을 가장하는 대신, 너희나 우리나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구나 하며 낄낄대고 웃어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인종차별‘을 빗댄 농담을 주고받는 것까지 포함해서). - P96

나는 코미디 영화감독 설리번과 그의 집사 버로스 사이에 오간 더없이 유명한 대화를 참조했다. 설리번은 버로스에게 보다 더 현실감이 살아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거리로 나가 빈곤과 궁핍을 몸소 체험하고 싶다고 말한다.

설리번 : 거리로 나가 가난하고 궁핍한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싶어. 그리고 이 문제를 다룬 영화를 만들 거야.
버로스 : 이렇게 말씀드려도 좋을지 허락하신다면 주인님, 그건 재미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아주 잘 압니다. 그런 주제는 하릴없는 부자나좋아할 겁니다.
설리번 : 그렇지만 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이걸 하려는 거야?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버로스 : 아시다시피 주인님, 부자와 이론가, 물론 이론가는 대개 부자입니다만, 가난을 부정적인 것, 부의 결여라고 생각하죠. 질병이 건강의 결여이듯 말이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님, 가난은 어떤 것의 결여가 아니라, 진짜 페스트입니다.
그 자체로 독성이 강하고, 콜레라처럼 전염되고, 더럽고, 죄악이고 악덕이며 절망입니다. 그저 몇 가지 증상만 꼽아본 겁니다. 가난은 어떤 경우든 멀리해야 하는 것이지 연구 목적의 대상이 아닙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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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강의의 끝에서 각자가 맞이하게 될 동양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랬듯 동양미술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그 계기가 무엇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오는 게 사랑이니까요. 누가 강요한다고 올 수 있는 것도아니고요. 그저 열심히 준비한 이 여정동안 각자의 시선으로 미술을 즐길 수 있게 되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미술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그러니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된다면 문화의 힘이 홍수처럼 세계를 휩쓰는 지금, 우리의 땅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진정으로 든든한 고향이 되어줄 겁니다. - P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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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서구 진보의 부성애적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서구 좌파가 팔레스타인 생활방식을 ‘존중‘한다며 ‘명예살인‘에 침묵을지키는 것은 더더욱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 두 측면 - 서구적 가치를 보편적 인권으로 강요하는 것, 타문화에 대한 존중에서 이 문화의 일부인 잔혹 행위를 간과하는 것은 신비화된 이데올로기라는 한 동전의 양면이다.
보편적 인권의 보편성이 어떻게 왜곡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은밀하게 서구문화의 가치와 규범에 특혜를 주었는지 논한 글은 많다(일례로, 개인이 공동체에 우선한다). 그러나 다문화주의자와 반식민주의자의 생활방식의 다양성 옹호에도잘못이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즉, 폭력적 - 성차별적 - 인종차별적 행동이 특수한 생활방식의 표현이며, 우리가 이를 낯선
‘서구적 가치‘로 평가할 권리는 없다고 합리화하는 것은 각각의 특수한 생활방식에 내재된 적대를 은폐하는 것이다. - P80

문제는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 (유럽)의 고유한 정체성이다. 유럽연합의 지속적 위기가 경제와 금융위기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근본적 차원에서 이데올로기와정치의 위기다. 몇 년 전 유럽연합헌법 비준 국민투표가 실패한 것은 유권자들이 유럽연합을 ‘테크노크라시‘ 경제공동체, 즉 대중을 결집할 비전이 없는 경제공동체로 보았다는 분명한 신호다. 최근의 항의 시위에 이르기까지 대중을 결집시킬 유일한 이데올로기는 몰려오는 이민자들로부터 유럽을 방어하자는 구호였을 뿐이다. 외국인의 위협으로부터 고향땅을 방어하자는 외국인 혐오자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 저변의 전제, 즉 모든 인종 그룹에는 고유의 ‘네이티비아‘Nativia가 있다는 전제를 철저히 거부해야 한다. - P85

그러므로 ‘서로 이해함‘이라는 태도는 ‘서로 길을 비켜감‘이라는 태도로 보완되거나, 새로운 ‘비밀보호법‘에 부합하는 적절한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비판자들이 종종 유럽문명의 약점이자 실패라고 비난하는 이른바 ‘사회생활의 소외‘는 오히려 유럽문명이 더 쉽게 다른 생활방식을 용인하게 만든 요소다. 소외는 사회 내부에 거리감이 필요하다는 역설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과 지척에서 살더라도 평소 나는그를 모른 척한다. 나는 타인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된다. 나는 타인과 더불어 외부의 ‘기계적 규칙을 지키면서 서로의 ‘내면세계‘를 나누지 않고 소통하면서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활동한다. 여기서 배워야 할 교훈은 이것이다. 생활방식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우리에겐 어느 정도의 소외가 필수적이다. 많은 경우, 소외는 문제가 아니라 해법이다 - P91

상이한 문화(혹은 각각의 일상생활의 구조에 각인된 상이한 생활방식)가 양립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융화, 최소한의 조화로운 발전, 평화적 공존을 가로막는진정한 장애물은 무엇일까? 정신분석은 이 장애물을 주이상스(향락)라고 답한다. 주이상스가 서로 달라서, 혹은 공통점이없어서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단지 자신의 주이상스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서 (또 모르는 만큼)타인의 주이상스를 참을 수 없다. 결국 나와 타인의 주이상스가 아니라, 나와, 늘 불청객인 나 자신의 주이상스가 양립하지못할 뿐이다.
이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려고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주이상스를 타인에게 투사하고, 타인은 끊임없이 이 주이상스를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투사는 피할 수 없이 질투심을 자극한다. 질투는, 내가 낙원 (완벽한 주이상스의 유토피아)을 창조하고 상상했는데 정작 자신은 거기에서 제외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같은 정의가 정치적 질투에도 적용된다.
반유대인주의자는 유대인을 탐욕이 심하다고 비난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는 호모와 레즈비언의 성생활을 난잡하다고 툴툴댄다 등이 그 좋은 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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