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엄마는 오리 먹이를 잘 만든다. 지유는 만드는 법을 잘 안다.
먼저 돼지고기를 사야 한다. 머리나 갈비, 뒷다리 같은 덩어리고기를 뼈째 사는 게 좋다. 엄마는 항상 도매시장에 간다. 마트에서 파는 살코기는 양에 비해 비싸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는 ‘비싸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놓고 돈 얘기를 하는 건 상스러운 짓이니까. 대신 이렇게 말한다. 오리도 칼슘이 필요해.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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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자 가방엔 누군가의 일생이 있다.

죽음의 기록이 담고 있는 것들

죽음, 세상에 이보다 무겁고 힘들고 어려운 주제가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모두의 삶에서 결코 누구도 비켜갈 수없는 인생 일대사 문제이기에 한 번쯤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보기로 한다.
정확하게는 죽음을 통한 삶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어둡고 모호한 죽음이 아닌, 우리의 일상을 함께하는 죽음 그 자체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 그로부터 우리의 ‘오늘‘ 이 갖는 의미를 새롭게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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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자 가장자리에 앉아 연기를 시작하려는 체조선수처럼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현재 뭘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를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내가 더듬거렸다.
아버지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대로 앉아 나에게서 다음 얘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침착하고 진지하게 보이도록 차근차근 말을 이으면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모든 반응을 주시하면서, 내가 찾아낸 일거리들을 상세히 열거하고 그 각각의 일에서 얼마나 버는지를 알려주었다. 또 그 일들을 다 맡아 집에서 처리하는 것 외에도 학교 시험 준비까지 하기 위해 시간을 어떻게 쪼개 쓰는지도 설명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모든 일이 아주 바람직하게 들리도록, 즉 나의 삶을 지적이고 책임감 있는 방법으로 꾸려갈 것이며 열심히 공부해서 학위를 따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아버지는 내게서 꼭 들어야 할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침묵을 지켰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서 저 자신을 부양하고 학업도 계속할 수 있다는 건 아셨겠지요." 그러고는 겨우 들릴락말락하게 말끝을 흐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저는 훌리아를 데려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허락을 구하러 왔습니다. 우리는 결혼했고 훌리아는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 P326

빅 파블리토 역시 그의 옆으로 가 있었다. 그가 한편으로는 인자하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놀리는 투로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반쯤은 다정스럽게 또 반쯤은 조롱하듯이 그를 앞뒤로 흔들면서 내 쪽을 쳐다보고 말했다. .
"문제는 이 페드리토는 자기가 유명한 사람이었던 시절을 기억하려고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여기선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니까요." 파스쿠알이 웃었고 빅 파블리토도 웃었다. 나 역시 웃는 척했고 페드로 카마초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 친구는 파스쿠알이나 나까지도 기억 못 하는 척하려고 든다니까요." 빅 파블리토가 마치 강아지를 가지고 놀듯 거의 까까머리인 그의 머리통을 두드렸다. "우리, 당신이 왕이었던 시절을 기념하기 위해 점심을 같이할 생각인데, 당신 운이 든 거라고, 페드리토, 오늘은 훌륭한 뜨거운 음식을 먹게 될 테니까. 손님으로 모실 테니 같이 가자고!"
"대단히 고맙습니다만......" 그가 즉시 깍듯이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갈 수가 없겠군요. 제 아내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제가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으면 궁금해할겁니다."
- P355

내가 올가 아주머니와 루초 삼촌(그들은 내 아내의 언니와 형부에서 내 장인, 장모로 바뀌어 있었다) 댁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이슥할 무렵이었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절망감을 느꼈다. 사촌 파트리시아가 잔뜩 못마땅한 기색을 띠고 나를 맞았다.
그러더니 내가 소설 쓸 자료를 모은다는 핑계로 자기를 감쪽같이 속이고서 훌리아를 만나고도, 집안 식구들이 훌리아가 파렴
치한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입을 봉했을 가망성도 얼마든지 있는 거 아니냐며 나를 윽박질렀다. 그러나 파트리시아는 훌리아가 파렴치한 죄를 저지르는지 아닌지 조바심이 나서 조금이라도 마음 놓고 있지 못하고, 만일 다음번에 내가 마누엘아폴리나리오 오드리아 장군의 연설문을 읽으러 국립도서관으로 간다면서 아침 여덟시에 집을 나섰다가, 저녁 여덟시에 핏발선 눈으로 술냄새를 풍기면서, 더군다나 손수건에 립스틱 자국이라도 묻혀가지고 돌아온다면 내 눈을 후벼파거나 쟁반으로 머리통을 깨버릴 것이었다. 내 사촌 파트리시아는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이면 무슨 짓이건 다 할 수 있는 당찬 여자였으므로.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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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을 일종의 자살로 본다.
면, 우리의 자살은 그로 인해 죽게 될 사람들이 아마도 우리가 아닐 거라는 사실 때문에 더 소름끼친다. 이미 기후변화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과, 기후변화로 미래에 죽게 될 인구는 아이티나 짐바브웨, 피지, 스리랑카, 베트남, 인도, 방글라데시처럼 최소한의 탄소발자국을 만들어 내는 지역에살고 있다. 많은 이들이 기후변화로 죽었고, 앞으로 훨씬 더많이 죽을 것이다. 지략이 아닌, 자원이 부족해서.
환경운동에서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다리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고 다리를 건널 수도 있다. 미래 세대를 위해자원을 확보해 놓기에는 너무 늦었다거나 너무 어렵다는두려움에 질려 두 손을 놓아 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의 그리고 우리의 - 가장 귀중한 자원이다.
- P222

물이 다 빠지고 나서 하느님은 지구를 다시는 파괴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으로 무지개를 보여 주셨다. 이 행성이 우리의 유일한 집이 될 것이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 P229

사람들이 할머니를 이 집에서 운반해 나갔어. 여전히 여기 계시면 좋을 텐데, 할머니가 조금만 더 사시면 좋을 텐데, 할머니와 조금 더 산다면 좋을 텐데, 더 많은 삶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아. 그 말을 절대 멈추지말아야 해. 유서는 한 번 쓰지만, 삶을 위한 글은 항상 써야해,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친숙한 것으로 낯선 것에 다리를놓고, 미래를 위한 메시지를 심고, 과거에서 온 메시지를 캐내고, 미래에서 온 메시지를 캐내고, 우리의 영혼과 논쟁하고, 그만두기를 거부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이런 일을 다 함께, 모든 이들의 손으로 같은 펜을 쥐고, 같은 기도를 하는 숨결을 함께 내쉬면서 이런 일을 해야 해, 영혼이 유서의 말미에서 결론 내리듯이, 아마도 자살과 반대되는 행동을 시작하면서 다 같이 집을 만들 거란다. 우리들 각자 우리 자신과 언쟁을 벌이면서 다 함께 집을 만들 거야.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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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제 좀더 침착해져서 울음을 멈추고 다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이 일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바르기타스?" 그녀가 슬픈 기색이 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나한테 싫증이 나기전까지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일 년? 이 년? 삼 년? 이삼 년뒤에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나면 난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게 공평하다고 생각해?"
"대사관에서 그걸 인정해줄까요?" 내가 물러서지 않고 다시물었다. "만일 볼리비아 대사관에서 그것들이 유효하다고 인정해준다면 페루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인정받기가 쉬울 겁니다.
난 외무부에 우리를 도와줄 친구가 있나 알아보겠어요."
그녀는 내가 들이게 될 온갖 수고에 미안해하면서도 동시에 깊이 감동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만일 네가 오 년 동안 다른 누구에게도 눈 돌리지 않고 나만 사랑하면서 같이 살겠다고 맹세한다면 좋아." 그녀가 말했다.
"오년 동안 행복할 수 있다면 난 이 완전히 미친 짓을 해보겠어."
- P163

"처음부터 끝까지 조마조마해 못 견디겠어." 훌리아가 내 손을 꼭 쥐면서 속삭였다. "권총을 뽑아 들고 은행을 터는 중인데어느 때라도 경찰이 들이닥질 것 같은 그런 기분 같지 않아?"
택시 운전사는 십 분 넘게(그 시간이 우리에게는 십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 있었지만 마침내 양손에 술병을 하나씩 움켜쥐고 돌아왔다. 이제 의식이 계속될 수가 있었다. 증인이 서명하고 나자 읍장은 훌리아와 내게도 서명을 하게 했다. 그러고는 민법전을 펼쳐 들고 촛불 가까이 바짝 갖다 대더니 기록부에 글자를 적어넣었을 때처럼 천천히 남편과 아내의 권리와 의무에 관련된 조항을 읽어주었다. 드디어 그가 우리에게 결혼증명서를 내주면서 우리가 남편과 아내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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