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자 가장자리에 앉아 연기를 시작하려는 체조선수처럼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현재 뭘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를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내가 더듬거렸다.
아버지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대로 앉아 나에게서 다음 얘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침착하고 진지하게 보이도록 차근차근 말을 이으면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모든 반응을 주시하면서, 내가 찾아낸 일거리들을 상세히 열거하고 그 각각의 일에서 얼마나 버는지를 알려주었다. 또 그 일들을 다 맡아 집에서 처리하는 것 외에도 학교 시험 준비까지 하기 위해 시간을 어떻게 쪼개 쓰는지도 설명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모든 일이 아주 바람직하게 들리도록, 즉 나의 삶을 지적이고 책임감 있는 방법으로 꾸려갈 것이며 열심히 공부해서 학위를 따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아버지는 내게서 꼭 들어야 할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침묵을 지켰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서 저 자신을 부양하고 학업도 계속할 수 있다는 건 아셨겠지요." 그러고는 겨우 들릴락말락하게 말끝을 흐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저는 훌리아를 데려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허락을 구하러 왔습니다. 우리는 결혼했고 훌리아는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 P326

빅 파블리토 역시 그의 옆으로 가 있었다. 그가 한편으로는 인자하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놀리는 투로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반쯤은 다정스럽게 또 반쯤은 조롱하듯이 그를 앞뒤로 흔들면서 내 쪽을 쳐다보고 말했다. .
"문제는 이 페드리토는 자기가 유명한 사람이었던 시절을 기억하려고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여기선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니까요." 파스쿠알이 웃었고 빅 파블리토도 웃었다. 나 역시 웃는 척했고 페드로 카마초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 친구는 파스쿠알이나 나까지도 기억 못 하는 척하려고 든다니까요." 빅 파블리토가 마치 강아지를 가지고 놀듯 거의 까까머리인 그의 머리통을 두드렸다. "우리, 당신이 왕이었던 시절을 기념하기 위해 점심을 같이할 생각인데, 당신 운이 든 거라고, 페드리토, 오늘은 훌륭한 뜨거운 음식을 먹게 될 테니까. 손님으로 모실 테니 같이 가자고!"
"대단히 고맙습니다만......" 그가 즉시 깍듯이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갈 수가 없겠군요. 제 아내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제가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으면 궁금해할겁니다."
- P355

내가 올가 아주머니와 루초 삼촌(그들은 내 아내의 언니와 형부에서 내 장인, 장모로 바뀌어 있었다) 댁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이슥할 무렵이었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절망감을 느꼈다. 사촌 파트리시아가 잔뜩 못마땅한 기색을 띠고 나를 맞았다.
그러더니 내가 소설 쓸 자료를 모은다는 핑계로 자기를 감쪽같이 속이고서 훌리아를 만나고도, 집안 식구들이 훌리아가 파렴
치한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입을 봉했을 가망성도 얼마든지 있는 거 아니냐며 나를 윽박질렀다. 그러나 파트리시아는 훌리아가 파렴치한 죄를 저지르는지 아닌지 조바심이 나서 조금이라도 마음 놓고 있지 못하고, 만일 다음번에 내가 마누엘아폴리나리오 오드리아 장군의 연설문을 읽으러 국립도서관으로 간다면서 아침 여덟시에 집을 나섰다가, 저녁 여덟시에 핏발선 눈으로 술냄새를 풍기면서, 더군다나 손수건에 립스틱 자국이라도 묻혀가지고 돌아온다면 내 눈을 후벼파거나 쟁반으로 머리통을 깨버릴 것이었다. 내 사촌 파트리시아는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이면 무슨 짓이건 다 할 수 있는 당찬 여자였으므로.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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