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를 클릭하다‘로 바꾸면 현재 우리가 겪는 고충이 된다.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향을 염려했다. 그가 눈돌리는 곳마다 사람들은 정보를 통찰로 착각하며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이터 (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 P179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쾌락을 최고선으로 이겼다. 다른 모든 것(명성과 돈, 심지어 덕까지)은 그것이쾌락을 더 증가시키는 만큼만 중요하다. 에피쿠로스는 늘 그렇듯도발적인 문제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명예가 있는 자와 헛되이 그들을 찬양하는 자에게 침을 뱉는다." 쾌락은 우리가 그 자체로서 욕망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 심지어 철학까지도, 쾌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한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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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다.
- P197

에피쿠로스는 많은 사람이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산더미처럼 쌓인 고통 맨 위에 사소한 즐거움을 올려놓고는 왜 행복하지 않은지 궁금해한다.  - P198

와인을 마시다 말고 멈춘다. 얼마큼이어야 충분하지?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이렇게 자문한 적이 거의 없다. 언제나 그 답은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더 많이‘는 움직이는 과녁이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쾌락의 쳇바퀴"라고 부른다. 이 별난 인간 본성은 외 세 번째 크렘브륄레가 첫 번째나 두번째 크렘브륄레만큼 맛있는 법이 없는지를 설명해준다. 시운전때는 황홀했던 새 차가 길 위에서 한 달이 지나면 지루해지는 이유도 설명해준다. 우리는 새로운 쾌락에 익숙해진다. 그러면 새로운 쾌락은 더 이상 새롭지도, 그리 즐겁지도 않은 것이 된다. 우리는 특히 내가 ‘조금만 더 - 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취약하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예를 들면 돈과 명예,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만 더 많으면 된다.
하지만 조금 더 갖게 되면 우리는 눈금을 재조정하고 생각한다.
그저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우리는 얼마큼이어야 충분한지를 모른다.
충분히 좋음은 안주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변명도 아니다.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완벽함도 좋음의 적이지만, 좋음도 충분히 좋음의 적이다.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좋음의 신념을 따르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충분히‘가 떨어져 나가고, 그저 좋음만이 남는다.
- P212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느냐.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준다.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어떤 기억이 표면 위로 떠오르는가? 어쩌면 결혼식처럼 커다란 사건일 수도 있고, 우체국의 말도 안 되게 긴 줄에서 뒤에 선 사람과 나눈 뜻밖의 다정한 대화처럼 작은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가장 주의를 기울인 순간일 확률이 높다. 우리의 삶은 가장 열중한 순간들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유는 "가장 큰 희열은 가장 온전하게주의를 기울였을 때 찾아온다"라고 말했다.
이런 드문 순간에 우리는 베유가 "극도의 관심"이라 부르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몰입"이라 부른 정신 상태에 진입한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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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학교! 어제부터 난 학교에 다닌다!
진짜 학교에 다니는 건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다!
이틀밖에 안 됐지만 학교가 좋다.
엄마 아빠는 내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전부 다 잘되고 있다.
카마일라르 담임 선생님도 정말 좋다.
수학도 정말 좋다.
하늘에서 빅뱅이 일어나 세상이 만들어진 것도 배우고, 과지모도가 주인공인 유명한 이야기도 읽었다. 사람들은 등에 큰 혹이있는 콰지모도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과지모도는 노트르담 탑에 갇힌 여자를 구했다.
- P5

"주말에 내가 누릴 수 없는 생활을 봤더니, 그냥 좀 슬퍼. 오로르를 가르치고 오로르가 아주 훌륭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당연히 즐겁지. 그렇지만 ‘어른‘이 되면 힘든 게 있단다. 어른은 선택을 해야 하고, 당시의 선택이 옳았다고 자신을 계속 설득해야해. 그렇지만 그 선택이 썩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있어."
- P22

클로에가 계속 말했다. "오로르는 자기 참모습대로 살면 돼, 다른사람을 괴롭히는 애들은 불안정한 동물들이나 마찬가지야. 혼자 있으면 불안하니까 무리를 지어서 움직이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뭉쳐다니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 자기 참모습을 들키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눈에 띄는 사람, 독창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을 괴롭히지, 내가 너한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이거야. 참모습 그대로살아, 그리고 못된 애들이 그렇게 한심한 편지를 또 보내거나 어떤 식으로든 괴롭혀도 당황하거나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지 마."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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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든>은 각성제로 쓰인 것이지, 처방전은 아니었다.
더 멀리 어슬렁거리다 또 다른 글이 적힌 안내판을 발견한다.
<월든>의 한 구절로, 아마도 소로의 말 중에 가장 유명할 것이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본질적인 실상에 직면하고 싶어서, 그것들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지 않아서였다."
마음에 들지만, 한 군데만 살짝 수정하고 싶다. 나라면 의도적으로 살고 싶다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보고‘ 싶다로 바꿀 것이다. 소로도 반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소로의 실험의 핵심은 보는 것이었다. 나머지, 그러니까 고독과 간소함 같은 것은 잘 보기 위한 수단이었다.
- P132

정말이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나만의 월든인 이곳에서 더 명료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지만, 시각적 깨달음, 소로가 성취한 "단 하나의 확장"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실망스럽지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소로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말에서 위안을 얻는다.
보는 데는 시간뿐만 아니라 거리도 필요하다고, 소로가 내게 말한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 P143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 너머에 있는 세계 개념을 지지했지만 여기에 흥미롭고 (당연히) 우울한 자신만의 생각을 덧붙였다. 칸트와 달리 쇼펜하우어는 실재가 단일하고 통일된 독립체이며, 비록간접적일지라도 접근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모든 인간과동물, 심지어 무생물을 뒤덮고 있다. 그것은 아무 목적 없이 분투하며, 미안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무자비한 악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힘을 "의지"라 칭했다. 나는 이 이름이 부적절하다고 본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정신력이 아니라 일종의 힘이나 에너지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중력 같은 것이다.
중력만큼 유순하지는 않지만,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지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요구는 고갈될 줄을 모른다. 모든 욕망이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그 갈망을 가라앉히거나 그 요구에 끝을 맺거나 그 심장의 끝없는 나락을 채우기엔 세상의 그 어떤 만족도 충분치 않다.
- P155

쇼펜하우어는 다른 동물인 고슴도치의 도움을 받아 인간관계를 설명한다. 추운 겨울날 한 무리의 고슴도치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가까이 붙어 서서 옆 친구의 체온으로 몸을 덥힌다. 하지만 너무가까이 붙으면 가시에 찔리고 만다.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들이
"악마 사이를 오가며" 붙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서로를 견딜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거리"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딜레마는우리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타인은 우리를 해칠 수 있다. 관계는 끊임없는 궤도수정을 요하며, 매우 노련한 조종사조차 가끔씩 가시에 찔린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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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알란의 인생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알란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었다. 그 메시지가 소년의 영혼에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렇게 정착한 뒤에는 영원히 남았다.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
이 말에 내포된 의미 중 하나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는다는거였다. 적어도 타당한 이유 없이는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는거였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윅스훌트의 거실에 날아들었을 때도, 알란은 가족의 전통에 따라 묵묵히 숲으로가서 나무를 베었을 뿐이다. 물론 다른 때보다 좀 더 오래, 그리고 좀 더 무거운 침묵 속에서 나무를 베었지만 말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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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데카르트가 머리의 철학자였다면, 루소는 심장의 철학자였다. 루소는 격정의 지위를 드높였고, 감정을 용인되는 것으로, 이성과 똑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얼추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루소가 살았던 이성의 시대에 상상적 사고는 믿을 수 없는 수상쩍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세기 후, 무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라는 이성주의자는 ‘지식보다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무를 껴안는 기술 반대자라고, 모두가 다시 수렵 채집을 하고 모닥불 옆에서 좋은 돌을 두고 다투길 바라는 사람이라고, 루소를 무시하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루소가 원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루소의 주장은 다시 동굴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자연과 다시 동조하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더 나은 동굴로 돌아가자는 것이랄까. 루소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에, 캘리포니아에 고속도로가 깔리기 수 세기 전에 환경 문제를 예측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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