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못된 장난꾸러기였다는 말을 듣고 힘이 나면 아주 나쁜 건가요, 아주머니? 린드 아주머니는 그렇다고 하셨어요. 린드 아주머니는 누군가가 나쁜 짓을 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게 아무리 어릴 적 얘기라도 늘 충격을 받으신대요. 한 번은 어떤 목사님이 어릴 때 친척 아주머니네 벽장에서 딸기 타르트를 훔쳤다고 고백하는 걸 듣고 다시는 그 목사님에게 존경심이 안 생기더래요. 그런데 전 생각이 달라요. 그걸 고백하신 건 정말 고귀한 행동이에요. 못된 짓을 하고 다니던 남자아이들이 자기들도 커서 목사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큰 용기를 얻겠어요. 제 생각은 그래요, 아주머니."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내 생각은 말이다. 앤, 설거지를 벌써 끝냈어야 한다는거다. 수다를 떨어대느라 평소보다 30분이 더 걸렸구나. 일부터 먼저 하고 말은 나중에 하는 법을 좀 배우렴." - P346

"음. 오늘 소중한 교훈을 새로 배웠어요. 초록 지붕 집에 온뒤로 실수를 많이 저질렀지만, 실수 하나하나가 큰 단점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됐거든요. 자수정 브로치 사건 때는 남의 물건을 기웃거리는 버릇을 고쳤고요. ‘유령의 숲‘ 때는 상상력이 지나치면 안 된다는 걸 배웠어요. 진통제 케이크로 요리할 때 부주의했던 습관을 고칠 수 있었고, 머리를 염색한 뒤로는 제 허영심을 돌아보게 되었잖아요. 전 이제 머리나 코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하긴 해도 거의 안 하는 편이죠. 오늘 실수 덕분에이제는 너무 낭만만 좇는 버릇을 고치게 됐어요. 에이번리에서낭만을 찾는 건 아무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수백 년전 캐멀롯의 성안에서라면 쉬웠을지 몰라도, 요즘 세상에 낭만은 어울리지 않아요. 이런 점에서 곧 제가 크게 달라진 모습을보시게 될 거예요. 아주머니."
"제발 그랬으면 좋겠구나."
마릴라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구석 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매슈는 마릴라가 자리를 뜬 뒤 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수줍은 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의 낭만을 다 버리진 마라, 앤, 낭만이 조금 있는 건 좋은거란다. 물론 너무 많으면 곤란하지. 하지만 조금은 남겨두렴. 조금은 말이다." - P372

"벨벳 양탄자야. 커튼은 실크고! 내가 꿈꾸던 것들이야, 다이애나.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것들 사이에 있으니까 별로 편하지가 않아. 여긴 없는 게 없고 전부 다 굉장히 멋져서 상상할 거리가 하나도 없어. 가난한 사람들이 한 가지 위안 삼을 수 있는게 그거거든. 상상할 거리가 훨씬 더 많다는 거." - P379

밤 11시에 거기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니 정말 근사했고 자유를 만끽하는 기분이었어요. 다이애나는 도시 생활이 자기한테 딱 맞대요. 배리 할머니가 저는 어떠냐고 물어보셨는데, 전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봐야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다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잠자려고 침대에 누워서 생각을 해 봤죠. 뭔가를 생각하기에 딱 좋은 때잖아요. 그러고는 결론을 내렸어요, 아주머니. 도시 생활은 제게 맞지 않고, 그래서 기쁘다는 거였어요. 가끔 밤11시에 멋진 식당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좋지만, 매일매일 을 생각하면 밤 11시에 동쪽 다락방에서 푹 자는 편이 더 좋아요. 여기서는 자는 동안에도 지붕 위에 별이 반짝이고 바람은개울을 건너 전나무 숲으로 불어온다는 걸 알잖아요. 다음 날아침 식사 자리에서 그렇게 말씀을 드리니 배리 할머니가 웃으셨어요. 배리 할머니는 제가 무슨 말만 하면 잘 웃으세요. 제가아주 진지한 얘기를 해도요. 그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아주머니. 제가 웃기려고 무슨 말을 한 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할머니는 정말 친절하신 분이고 우리를 아주 훌륭하게 대접해 주셨어요"
금요일이 되자 배리 씨가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조세핀 배리 할머니가 작별 인사를 했다.
"즐겁게 지냈는지 모르겠구나."
"정말 재밌었어요"
"넌 어땠니, 앤?"
"한순간 한순간이 모두 즐거웠어요."
앤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노부인의 목을 끌어안고 주름진 뺨에 입을 맞추었다. 다이애나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기에 앤의 거리낌 없는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조세핀 배리 할머니는 기뻐했고, 베란다에 서서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 P383

그 사이 앤은 키도 훌쩍 자랐다. 마릴라는 어느 날 앤과 나란히 섰다가 앤의 키가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앤, 언제 이렇게 컸니!"
마릴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말끝에 한숨이 따라나왔다. 마릴라는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마릴라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어린아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진지한 눈빛을 한 키 큰 열다섯 살 소녀가 사려 깊은 조그마한 얼굴을 당당히 들고 서 있었다. 어린아이를 사랑한 만큼 눈앞의 소녀도 사랑했지만, 마릴라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슬픈 상실감이 밀려왔다. - P412

한밤중에 깨니 어둠과 정적만 가득했다. 하루 동안의 기억이앤에게 슬픈 파도처럼 밀려왔다. 전날 저녁 문 앞에서 헤어질때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어주던 매슈의 미소가 눈앞에 선했다. "우리 딸, 자랑스러운 내 딸"이라고 말하던 매슈의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고, 앤은 가슴이 터지도록 울기시작했다. 마릴라가 그 소리를 듣고 앤을 달래 주려 올라왔다.
"자... 자...... 그렇게 울지 마라, 얘야. 그런다고 오라버니가 돌아오진 않아. 그렇게…… 그렇게 울면 안 돼. 그걸 알면서도 아까는 나도 참을 수가 없었지만 오라버닌 언제나 내게 정말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단다. 하느님은 잘 아시겠지."
"아, 그냥 울게 해 주세요, 아주머니. 우는 게 가슴 아픈 거보다 나아요. 잠시만 제 곁에서 절 안아 주세요. 다이애나와 함께 있을 순 없었어요. 다이애나는 착하고 다정다감한 친구지만…… 이건 그 애의 슬픔이 아닌걸요. 다이애나는 슬픔 속에 있지 않으니까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도와줄 수 없잖아요. 이건 아주머니와 저, 우리 두 사람의 슬픔이에요. 아, 아주머니, 아저씨 없이 어떻게 살죠?" - P479

집으로 돌아와 창가에 앉았던 그날 밤 이후로 슬픈 일들이 연이어서 얼마나 일어났는지! 그때만 해도 앤의 마음은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했고 미래는 장밋빛 약속으로 채워진 듯 보였다. 그날 이후로 몇 년은 지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앤은 미소를 머금었고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앤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용기 있게 마주했고, 마음을 내려놓고 순순히 받아들이면 의무도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 P488

퀸스에서 돌아와 창가에 앉았던 그날 밤 이후로 앤 앞에 놓인 미래의 지평선이 좁아졌다. 하지만 발 앞에 놓인 길이 좁아진다 해도, 앤은 그 길을 따라 잔잔한 행복의 꽃이 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실한 노력과 훌륭한 포부와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기쁨이 앤에게 깃들었다. 그 무엇도 타고난 앤의 상상력과 꿈이 가득한 이상 세계를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앤이 나직이 속삭였다.
"하느님 하늘에 계시니 세상은 평안하여라." - 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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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이성은 감각들의 증거를 날조하도록 만드는 원인이다.
감각들이 생성, 소멸, 변화를 보여 줄 때,
그것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군복무 시절, 휴가만큼 달콤했던 것이 또 있었을까. 특히 첫 번째 휴가는 그야말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것처럼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물론 귀대하던 날은 그 반대로 천길 벼랑으로 다시떨어지는 참담한 느낌이 들었던 순간으로 기억되지만 말이다. 친구들이나 부모님도 첫 휴가를 나온 나를 보면서 당혹감을 털어놓곤 했다. "군기가 바짝 들었는데?" 나는 너무나 각이 져 있고, 무언가에 주눅이 든 것처럼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긴 첫 번째 휴가 기간 동안에도 기상 시간에 벌떡 일어나는 내 모습에 나 자신도 얼마나 쓴웃음을 지었는지. 휴가 동안 나는 친구들을 만나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려고 학교 근처로 가거나, 아니면 혼자 있을 때면 영화관에 가거나 종로에 있던 대형 서점에 들르곤 했다. 가급적 군대에서는 할 수 없었던 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휴가 기간에 내가 했던 모든 것은 군대에서 억압할수밖에 없었던 나의 감정들을 되살려 내는 일들이었다. - P15

우리 시대의 삶은 과거보다 더 팍팍해졌다. 그만큼 우리에게서 행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삶의 조건이 악화된 만큼, 우리는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기 쉬우니까. 그렇지만 행복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감정의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분출이 가능하냐의 여부에달린 것 아닌가.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슬픔을, 쏟아지는 은하수에서 환희를, 친구의 행복에 기쁨을, 말러의 5번 교향곡 4악장에서 비애를, 멋진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시부모의 무례한 행동에 분노를, 주변 사람들의 평판에 치욕을, 번지점프에서 뛰어내리면서 불안을 이 모든 감정들의 분출로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것을 느끼게 된다. 원하는 감정일 수도 있고, 결코 원하지 않던 감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그것이 내 안에서 발생하고, 또 나 자신을 감정들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슬픔, 비애, 질투 등의 감정도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있기에, 내일을 더 희망차게 기다릴 수 있으니까. 장차 내게 행복한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설렘,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아닐지. - P18

한번이라도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응시했다면,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이성이 감정보다 먼저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이성은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성이감정을 적대시한다면 언젠가 감정의 참혹한 복수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감정에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칸트(Immanuel Kant)의 이성과는 다른 종류의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감정의 쓰나미를 무모하게 막아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을 긍정하고 지혜롭게 발휘하는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의 이성 말이다.
철학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스피노자만은 ‘이성의 윤리학‘
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에 주목한 ‘감정의 윤리학‘을 옹호했다. 스피노자가 피력했던 감정의 윤리학은 아주 단순한 사실, 즉 타자를 만날 때 우리는 기쁨과 슬픔 중 어느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들은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es)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P20

표면적으로 게라심은 여지주의 압력에 굴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지는 결코 게라심에게 무무를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게라심의행위는 소극적이나마 주체적인 결단, 다시 말해 여지주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비록 적극적으로 무무를 지키지는 못했지만, 게라심은 소극적이나마 여지주가 무무를 죽일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한 것 아닐까? 무무를 강물 속에 던지는 순간, 게라심은 농노로서 가지고 있던 비루함도 함께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하게 여지주의 말에 순종하는 존재였다면, 여지주의 손에서 무무를 빼앗아 자신의 손으로 무무의 생명을 앗으려는 결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침내 게라심은 자신을 지배하던 비루함을 극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피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비루함(abjectio)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것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슬픔‘은 어떤 타자가 나의 삶의 의지를 꺾으려고 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여지가 주인으로서의 삶을 부정할 때, 게라심이 느꼈던 것도 바로 이 슬픔이다. 이런 슬픔이 반복되면 누구나 비루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게라심은 자신이 사랑하는 무무의 목숨을 스스로 거둔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스스로‘라는 말일 것이다. 게라심의 행위는 제한적이나마 나름대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던 능동적인 결단이었으니까. 타티야나를 빼앗겼을 때 철저하게 순응적이기만 했던 모습과는 달리 게라심의 마음은 조금씩 비루함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비록 개일지라도 무무에 대한 애정이 그를 조금씩 주인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기적 아닐까? 사랑이 가져다주는기쁨의 감정은 우리에게 항상 조용히, 그렇지만 강력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의 기쁨을 지킬 수 있는 주인으로 살고있는가?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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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 내일을 생각하면 기분 좋지 않나요? 내일은 아직아무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 새로운 날이잖아요."
"내 보증하다. 넌 내일도 실수를 수두룩이 저지를 거다. 너처럼 실수를 쫓아다니며 저지르는 아이는 처음 본다, 앤."
앤이 풀이 죽어 말했다.
"맞아요. 저도 잘 알아요. 그래도 아주머니, 제게도 장점이하나 있는데, 알고 계세요? 전 같은 실수는 두 번 저지르지 않아요."
"끊임없이 새로운 실수를 저지르니 좋은 점이 있어도 그게그거구나"
"아, 모르세요, 아주머니?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는 분명 한계가 있어요. 제가 그 한계에 다다르면 제 실수도 끝나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에 정말 위로가 돼요."
"글쎄, 저 케이크나 가져가서 돼지한테 주렴. 사람이 먹을 건못되더구나. 제리 부트라 해도 말이다." - P292

상황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은 앤에게 천성을 바꾸라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앤이 그렇듯이 ‘순수한 영혼에 불처럼 뜨겁고 이슬처럼 맑은‘ 사람에게는 언제나 삶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강렬하게 찾아왔다. 마릴라도 이것을 알기에 막연하지만 걱정이 되었다. 세상을 살면서 반복될 기쁜 일과 슬픈 일들이이 충동적인 아이에게 얼마나 힘겨울까, 똑같은 크기로 기쁨이다가온다 해도 과연 고통이 지나간 자리를 치유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마릴라는 앤을 차분하고평온한 성품의 아이로 키우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얕은 개울 위에서 일렁이는 햇빛을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낯설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글프지만 마릴라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앤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앤은 간절한 희망이나 계획이 무산되면 ‘고통의 나락‘으로 거꾸러졌고, 반대로 기대가 이루어지면 아찔한 ‘환희의 왕국‘으로 날아올랐다. 마릴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아이를 얌전하고 반듯한 모범생으로 만들겠다던 생각을 거의 포기했다. 게다가 마릴라 자신조차 그렇게바뀐 앤을 지금보다 더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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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집 스위치는 뒤르켐이 말한 호모 듀플렉스를 또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적인(통속적인) 세계 속에서 삶의 대부분을 살아가지만, 신성한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무엇보다 큰 희열을 맛본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그저 전체를 이루는 일부일 뿐이다.
군집 스위치를 켜는 방법으로는 흔히 세 가지, 즉 자연에 대한 경외심. 뒤르켐주의적 약물, 레이브 파티가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옥시토신과 거울뉴런에 대한 최근 연구 성과를 언급하며, 바로 이것들이 우리의 군집 스위치를 이루고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옥시토신은 사람들을 자기 집단에 엮어주지, 인류 전체에 엮어주지는 않는다. 거울뉴런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자신과 같은 도덕 매트릭스를 가진 사람에게 특히 잘 공감하도록 한다.
‘우리 인간은 누구든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라고 믿을 수 있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별로 개연성 없는 이야기이다. 그보다는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편향적 사랑, 즉 서로에 대한 동질감.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 무임승차자에 대한 억제, 이 세 가지를 통해 강화되는 그 편향적 사랑이,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이 아닐까 한다. - P436

물론 초월적 동인이라는 것이 종교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사실이다. 버지니아 대학의 럭비 시합 날에도 그 시끌벅적한 소란의 한가운데에는 항상 럭비공이 자리하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종교의 영속성과 열정을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럭비공의 움직임만 보고 대학 럭비 시합의 영속성과 열정을 이해하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한정된 연구의 시야를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적 믿음과 종교적 관습이 어떤 식으로 공동 작용을 하며 거기서 어떻게 종교적 공동체가 만들어지는지, 그 전체적 모습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깊은 신앙심이 상보적이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세 가지 요소, 즉 믿음· 행위 ·소속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현재 많은 학자가 주장하고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동시에 한꺼번에 살필 경우 우리는 신무신론자의 관점에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종교적 심리를 접할 수 있게 된다. 신무신론의 입장과 대립각을 이루는 이 모델에 나는 뒤르켐주의 모델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는바, 이 모델에서는 종교적 믿음과 관습이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진 믿음은, 자신이 저지른 어떤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혹은 자신이 속한 어떤 집단을 편들기 위해 우리가 나중에 만들어낸 구성물일 때가 많다. - P444

다시 말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숙제, 즉 혈연이 없는 사람과 어떻게 협동하는가하는 문제는 바로 신무신론자들이 값비싸고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라며 깎아내렸던 그 의례적 관습이 해결해주는 것이다. 비합리적인 믿음이 도리어 집단의 합리적 운용에 도움을 주며, 고귀함 기반에 의지하게 되면 그 효과는 특히 더 커진다. 신성함은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눈을 가려 관습이 가진 자의성을보지 못하게도 한다.
소시스의 이러한 연구 결과는 애트런과 헨리히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신이라는 존재는 실제로 집단을 단결시키고, 성공시키고, 또타 집단을 경쟁에서 물리치는 데 힘이 된다. 이는 분명 집단선택의한 형태이나, 애트런과 헨리히는 이것이 순전히 문화적 차원의 집단선택임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을 하나로 엮고 이기심을 더 잘 억제하는 종교가 다른 종교를 희생시키고 퍼져나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여기서 패배한 쪽이 반드시 종적을 감춰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7~8세기의 이슬람교나 19세기의 모르몬교의 경우에서볼 수 있듯이, 종교는 유전자보다 훨씬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다. 어떤 종교가 성공적일 경우 그 주변의 민족 혹은 그것과의 경쟁에서 밀린 이들도 얼마든지 그것을 채택할 수 있다. - P457

 그 예로, 우리는 자살 폭탄 테러가 종교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로버트 페이프(RobertPape)는 지난 100년간의 자살 테러 공격을 모아 일일이 데이터베이스화해보았는데, 자살 폭탄 테러는 애국심에서 나오는 반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것은 문화적으로 전혀 이질적인 민주주의 세력이 자신들 나라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데 대한 반발이었다. 즉, 군화와 장갑차로 자기들 땅을 밀고 들어오는 데 대한 반응이었지. 하늘에서 폭탄이 몇 발 떨어졌다고 해서 보인 반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국의 신성한 영토를 오염되게 놔둘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내가 벌집속으로 주먹을 날린 후 그 상태로 한참을 있는다면 어떨지 상상해보자.)
군사점령이 일어난다고 그것이 자살 폭탄 테러까지 이어지는 일은 대체로 없다. 자살 폭탄 테러까지 일어나려면 젊은이들이 몰려들만한, 그래서 그들이 더 큰 대의를 위해 순교까지 감행할 만한 그런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자리 잡고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비종교적일 수도 있고(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지향하는 스리랑카의 과격파단체 타밀 타이거즈의 경우처럼), 종교적일 수도 있다(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은 1983년 자살 폭탄 테러를 일으켜 미국을 레바논에서 철수시킴으로써 이 전략이 효과적일 수 있음을 세상에 처음으로 입증해 보였다). 즉, 어떤 것이든 사람들을 하나의 도덕 매트릭스로 엮을 수 있기만 하면,
그리하여 내부 집단은 미화하고 동시에 타 집단은 악으로 몰 수 있기만 하면, 거기에서 도덕을 내세운 살인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종교는 이러한 과업을 이루기에 딱 좋은 형태인 것이고 말이다. 따라서 종교는 잔혹 행위를 일으키는 원동력이기보다 잔혹 행위의 방조자인 경우가 많다. - P476

여러 가지 다양한 척도로 봤을 때, 종교에 독실한 미국인이 종교가 없는 미국인에 비해 이웃과 시민으로서 더 훌륭한 자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돈과 시간을 (특히 궁핍한 처지의 이들을 돕는 데에 더 아낌없이 나눠 주고 있으며, 공동체 생활에도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렇다면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이웃과 시민으로서 더 나은 자질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퍼트넘과 캠벨은 일련의 설문 조사에 종교와 관련된 질문을 집어넣어 보았다. 사람들의 종교적 생활(예를 들면, "<성경>은 평소 얼마나 읽는가?", "기도는 평소 몇 번이나 하는가?")은 물론 그들의 종교적 믿음(예를 들면, "당신은 지옥을 믿는가?" "인간은 죽고 나면 신 앞에 불려가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심판받는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 상세하게 묻는 내용이었다. 연구 결과, 종교인의 훌륭한 자질에 있어 종교적 생활이나 믿음은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지옥을 믿는가, 매일 기도하는가, 가톨릭.
개신교 · 유대교 · 모르몬교 중 무엇을 믿는가 등의 이 모든 것은 종교인이 베푸는 아량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종교가 이루어내는 도덕적선행과 확실하고 강하게 연관된 사실은 단 하나, 바로 사람들이 동료종교인과의 관계에 얼마나 단단히 얽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덕 매트릭스 안에서 맺어지고 이루어지는 우정과 집단 활동이 이타심을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최선을 이끌어내는 힘도 바로 그것이었고 말이다.
퍼트넘과 캠벨은 믿음을 강조했던 신무신론파의 입장을 거부하고 마치 뒤르켐의 입에서 나온 듯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바로 종교적 소속감이다. - P474

도덕성 정의에 대한 내 작업이 다음과 같은 뒤르켐의 말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사람들 간에 연대를 형성시키는모든 것, 나아가 •••••• 자신의 자아보다•••••• 커다란 무엇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을 규제하게 만드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도덕이
다." 뒤르켐은 사회학자였던 만큼 개인의 자아를 제약하는 사회적사실들 (개인의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사회적 사실들의 실례로는, 종교·가족· 법률을 비롯해 내가 도덕적매트릭스라고 칭했던 공통의 의미 네트워크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심리학자인 만큼 도덕성과 관련한 요소가 마음 바깥은 물론 우리의 마음 안에도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갖가지의 진화한 심리 기제들, 즉 도덕적 감정들, 내면의 변호사(혹은 공보관), 여섯 가지 도덕성 기반, 군집 스위치 등이 이러한 내적인 요소에 해당한다. - P479

이 보수주의자들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도덕 매트릭스의 폭이 넓기 때문에, 도덕적 자본에 위협이 가해질 경우 진보주의자는 미처 인지하지못해도 보수주의자는 그것을 감지해낼 수 있다. 보수주의라고 해서 모든 종류의 변화(이를테면 인터넷)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변화 때문에 우리 도덕성의 뼈대가 되는 제도나 전통(이를테면 가정)이 해를 입는다고 생각하면 보수주의자들은 거기에 맹렬히 맞서싸운다. 도덕성의 근간이 되는 그러한 제도와 전통의 수호야말로 보수주의자가 가장 신성하게 생각하는 가치이다.
예를 들어, 역사가 새뮤얼 헌팅턴 (Samuel Huntington)이 보수주의에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보수주의는 그것이 신성시하는 특정 제도(18세기 프랑스의 경우에는 군주제, 21세기 미국의 경우에는 헌법이 될 수 있겠다)를통해서는 정의될 수 없다고 한다. 그보다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는사회 기반이 위협을 받는 순간에 기능한다는 특징이 있다. 어느 정도는 제도가 꼭 필요하고, 또 그런 제도로는 기존의 것이 바람직함을 사람들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YourMorals.org에서의 연구 결과 우리는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이야말로 누구보다 폭넓은 도덕적 관심사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 이들이 여섯 가지의 기반 모두를 비교적 골고루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있었다(도표 12-4> 참조). 이 폭넓은 관심사(특히 충성심, 권위, 고귀함 기반에 비교적 높은 가치를 두는 것)는 보수주의자들로 하여금 일정한 통찰력을 갖게 해주는데, 뒤르켐식 공리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통찰력은 매우 소중한 것으로 여겨진다. - P539

한편 이보다 앞서 진행된 한 연구에서 퍼트넘은 민족이 다양할 경우 정반대의 효과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 플루리부스 우눔>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논문에서 그는 미국에 존재하는 수백 개공동체의 사회적 자본 수준을 심층 조사했고, 그 결과 이민과 민족적 다양성 수준이 높으면 사회적 자본이 감소하는 것 같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건 당연한 일 아니냐고 여러분은 생각할지 모른다. 사람들은 인종차별적 성향을 갖고 있어서 자신과 모습이 다른 사람들은 신뢰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는 그런 맥락의 이야기가 아니다. 퍼트넘은 설문 조사에서 사회적 자본을 다음의 두 가지로 분명히 구별해놓았다. 즉, 사회적 자본에는 서로 다른 집단 사이에 만들어지는 연접 자본(bridging capital)이 있는가 하면, 집단은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가치와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을 묶어주는 결속 자본(bonding capital)이 있다. 퍼트넘은 민족적 다양성이 이 두 종류의 사회적 자본을 모두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정리한다.

다양성으로 인해 초래되는 일은 내집단/외집단의 분열이 아니라, 아노미 혹은 사회적 고립이다. 쉽게 말해 다양한 민족이 뒤섞여 있는 환경 속의 사람들은 거북이가 등껍질 속으로 숨어들듯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인다.

퍼트넘은 여기서 뒤르켐의 사상(이를테면 아노미의 개념)을 활용해 왜 다양성이 존재하면 사람들이 안으로만 파고들며 더 이기적이 되는지, 그래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일에는 별반 관심을 안 가지게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퍼트넘이 말하는 거북이의 은둔성은 내가 앞에서부터 줄곧 이야기해왔던 꿀벌의 군집성과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 P544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 이는 상대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부족과 같은 도덕 공동체 속에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서는 신성한 가치를 빙 둘러싸고 다 같이 힘을 합쳐 왜 우리가 백번 옳고 저들은 백번 그른지 사후 논변을 지어낸다. 그러면서 상대방은 눈이 멀•어 진실. 합리성·과학·상식을 못 본다고 여긴다. 그러나 알고 보면신성한 대상을 이야기하는 순간 눈이 멀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상대편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쪽에서 신성시하는 것을 따라가보면 된다. 그러려면 첫걸음으로 여섯 가지의 도덕성 기반을 떠올려보고, 그중 해당 논쟁에서 가장 중시되고 있는 기반 한두 개를 찾아낸다. 더불어 여러분이 진정 마음을 열고 싶다면 머리가 아닌 가슴을 먼저 열어야 한다. ‘상대편의 누구와 한 번이라도 우정 어린 만남을 갖고 나면, 어느덧 상대편의 말에 귀 기울이기가 훨씬 쉬워졌음을 알 수 있게 될 테고, 그러면 심지어 논쟁거리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는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여전히 의견은 하나로 모으지 못한다 해도, 어느 한쪽은 옳고 한쪽은 그르다는 마니교식 이분법을 떠나 서로를 더 존중하는 건설적인 음양의 관계로 발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 P550

세계에 존재하는 도덕적 다양성,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는 철학자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이 그 답을 찾기 위해 평생 동안 씨름해온 문제이다. 벌린은 도덕적 상대주의를 단호히 거부하는 입장이다.

나는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일은 없다. "나는 커피에 우유 넣는 걸 좋아하지만 당신은 빼는 걸 좋아하지요. 그렇듯이 내가 따뜻한 심성을 선호해도 당신은 강제수용소를 선호할 수 있어요." 이 말은 곧 우리에게는 저마다 중시하는 가치가 따로 있고, 그 가치는 다른 무엇에 침해되거나 통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을 나는 틀렸다고 본다.

그 대신 벌린은 다원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하는데, 그것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와 기질이 여러 가지로 존재하듯이, 이 세상에는 본보기가 되는 이상(理想)도 여러 가지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나는 이르게 되었다. 가치라는 것은 무한정 존재하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가치들, 그러니까 내가 인간 본연의 외관과 성격을 유지한 채 추구할 수 있는 가치는 그 수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74개일 수도 있고, 혹은 122개일 수도 있으며, 혹은 27개일 수도 있으나, 그 개수가 어떻든 한정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원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어떤 이가 그러한 가치 중 하나를 추구할 때 나는 그 가치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왜 그 사람이 그 가치를 따르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그가 처한 상황에서라면 나 역시 그 가치를 따르게 될 것임을 인정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인간적 이해의 가능성이 싹튼다. - P557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왜 정치와 종교 때문에 서로 이편저편으로나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 답은 마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사람은 선하고 어떤 사람은 악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마음이 집단적 바름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져 있기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답이었다. 우리 인간은 지극히 직관적인생물체로서, 우리의 전략적 추론 능력도 사실은 직감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나와 다른 매트릭스의 사람들을 만나면, 더구나 그런 이들의 도덕 매트릭스는 우리의 것과는 다른 식으로 배열된 도덕성 기반에 의지하고 있는 때가 많기 때문에, 그들과 연결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러니만큼 이다음에 옆자리에 나와 다른 매트릭스의 사람이 앉게된다면, 그때는 한번 연결을 시도해보자. 하지만 그 사람의 매트릭스로 곧장 뛰어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거나 어떤 식으로든 약간의 신뢰가 생기기 전까지는 도덕성의 문제를 꺼내 들어서도 안 된다. 그러다가 시의적절하게 도덕성 관련된 이슈를 무사히 꺼냈다 싶으면, 그때는 다른 것보다 먼저 그 사람의 입장을 얼마간 추어주고 그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표한다.
우리는 어차피 한동안은 이 땅에 다 같이 발붙이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서로 잘 지낼 수 있게 함께 노력해보자, - P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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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려 새들이 날 때 상당한 기쁨을 맛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너무 어린 새나 늙은 새, 다친 새는 날 수없다. 많은 새들이 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실제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때는 한정되어 있다. 놓칠 수도 있었던잠재력을 깨닫고 목적에 맞게 쓴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일 아닐까?
행정실장이 된 옛 교무 교감이나, 유체 이탈 화법을 쓴학생 교감을 보며 내가 왜 이마를 찌푸렸는지, 이제는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의 잠재력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능력을 실제로 사용하는것은 아니다.
행정실장과 학생 교감은 날지 않는 새들 같았다. 마지막으로 날아 본 게 언제인지도 모를 비둘기들이었다.
나는......
(어머니는 세상에는 정말 불의가 많고, 그 무수한 불의를 한 사람이서는 도저히 다 바로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꿀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조금씩 생겨날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언제 그 기회가 올까? 내게 맞는 기회가 왔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직접 덤벼 보기 전에 그게 적당한 기회인지 과연 알아챌 방법이 있을까?)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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