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군집 스위치는 뒤르켐이 말한 호모 듀플렉스를 또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적인(통속적인) 세계 속에서 삶의 대부분을 살아가지만, 신성한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무엇보다 큰 희열을 맛본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그저 전체를 이루는 일부일 뿐이다.
군집 스위치를 켜는 방법으로는 흔히 세 가지, 즉 자연에 대한 경외심. 뒤르켐주의적 약물, 레이브 파티가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옥시토신과 거울뉴런에 대한 최근 연구 성과를 언급하며, 바로 이것들이 우리의 군집 스위치를 이루고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옥시토신은 사람들을 자기 집단에 엮어주지, 인류 전체에 엮어주지는 않는다. 거울뉴런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자신과 같은 도덕 매트릭스를 가진 사람에게 특히 잘 공감하도록 한다.
‘우리 인간은 누구든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라고 믿을 수 있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별로 개연성 없는 이야기이다. 그보다는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편향적 사랑, 즉 서로에 대한 동질감.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 무임승차자에 대한 억제, 이 세 가지를 통해 강화되는 그 편향적 사랑이,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이 아닐까 한다. - P436

물론 초월적 동인이라는 것이 종교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사실이다. 버지니아 대학의 럭비 시합 날에도 그 시끌벅적한 소란의 한가운데에는 항상 럭비공이 자리하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종교의 영속성과 열정을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럭비공의 움직임만 보고 대학 럭비 시합의 영속성과 열정을 이해하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한정된 연구의 시야를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적 믿음과 종교적 관습이 어떤 식으로 공동 작용을 하며 거기서 어떻게 종교적 공동체가 만들어지는지, 그 전체적 모습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깊은 신앙심이 상보적이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세 가지 요소, 즉 믿음· 행위 ·소속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현재 많은 학자가 주장하고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동시에 한꺼번에 살필 경우 우리는 신무신론자의 관점에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종교적 심리를 접할 수 있게 된다. 신무신론의 입장과 대립각을 이루는 이 모델에 나는 뒤르켐주의 모델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는바, 이 모델에서는 종교적 믿음과 관습이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진 믿음은, 자신이 저지른 어떤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혹은 자신이 속한 어떤 집단을 편들기 위해 우리가 나중에 만들어낸 구성물일 때가 많다. - P444

다시 말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숙제, 즉 혈연이 없는 사람과 어떻게 협동하는가하는 문제는 바로 신무신론자들이 값비싸고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라며 깎아내렸던 그 의례적 관습이 해결해주는 것이다. 비합리적인 믿음이 도리어 집단의 합리적 운용에 도움을 주며, 고귀함 기반에 의지하게 되면 그 효과는 특히 더 커진다. 신성함은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눈을 가려 관습이 가진 자의성을보지 못하게도 한다.
소시스의 이러한 연구 결과는 애트런과 헨리히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신이라는 존재는 실제로 집단을 단결시키고, 성공시키고, 또타 집단을 경쟁에서 물리치는 데 힘이 된다. 이는 분명 집단선택의한 형태이나, 애트런과 헨리히는 이것이 순전히 문화적 차원의 집단선택임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을 하나로 엮고 이기심을 더 잘 억제하는 종교가 다른 종교를 희생시키고 퍼져나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여기서 패배한 쪽이 반드시 종적을 감춰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7~8세기의 이슬람교나 19세기의 모르몬교의 경우에서볼 수 있듯이, 종교는 유전자보다 훨씬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다. 어떤 종교가 성공적일 경우 그 주변의 민족 혹은 그것과의 경쟁에서 밀린 이들도 얼마든지 그것을 채택할 수 있다. - P457

 그 예로, 우리는 자살 폭탄 테러가 종교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로버트 페이프(RobertPape)는 지난 100년간의 자살 테러 공격을 모아 일일이 데이터베이스화해보았는데, 자살 폭탄 테러는 애국심에서 나오는 반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것은 문화적으로 전혀 이질적인 민주주의 세력이 자신들 나라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데 대한 반발이었다. 즉, 군화와 장갑차로 자기들 땅을 밀고 들어오는 데 대한 반응이었지. 하늘에서 폭탄이 몇 발 떨어졌다고 해서 보인 반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국의 신성한 영토를 오염되게 놔둘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내가 벌집속으로 주먹을 날린 후 그 상태로 한참을 있는다면 어떨지 상상해보자.)
군사점령이 일어난다고 그것이 자살 폭탄 테러까지 이어지는 일은 대체로 없다. 자살 폭탄 테러까지 일어나려면 젊은이들이 몰려들만한, 그래서 그들이 더 큰 대의를 위해 순교까지 감행할 만한 그런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자리 잡고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비종교적일 수도 있고(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지향하는 스리랑카의 과격파단체 타밀 타이거즈의 경우처럼), 종교적일 수도 있다(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은 1983년 자살 폭탄 테러를 일으켜 미국을 레바논에서 철수시킴으로써 이 전략이 효과적일 수 있음을 세상에 처음으로 입증해 보였다). 즉, 어떤 것이든 사람들을 하나의 도덕 매트릭스로 엮을 수 있기만 하면,
그리하여 내부 집단은 미화하고 동시에 타 집단은 악으로 몰 수 있기만 하면, 거기에서 도덕을 내세운 살인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종교는 이러한 과업을 이루기에 딱 좋은 형태인 것이고 말이다. 따라서 종교는 잔혹 행위를 일으키는 원동력이기보다 잔혹 행위의 방조자인 경우가 많다. - P476

여러 가지 다양한 척도로 봤을 때, 종교에 독실한 미국인이 종교가 없는 미국인에 비해 이웃과 시민으로서 더 훌륭한 자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돈과 시간을 (특히 궁핍한 처지의 이들을 돕는 데에 더 아낌없이 나눠 주고 있으며, 공동체 생활에도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렇다면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이웃과 시민으로서 더 나은 자질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퍼트넘과 캠벨은 일련의 설문 조사에 종교와 관련된 질문을 집어넣어 보았다. 사람들의 종교적 생활(예를 들면, "<성경>은 평소 얼마나 읽는가?", "기도는 평소 몇 번이나 하는가?")은 물론 그들의 종교적 믿음(예를 들면, "당신은 지옥을 믿는가?" "인간은 죽고 나면 신 앞에 불려가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심판받는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 상세하게 묻는 내용이었다. 연구 결과, 종교인의 훌륭한 자질에 있어 종교적 생활이나 믿음은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지옥을 믿는가, 매일 기도하는가, 가톨릭.
개신교 · 유대교 · 모르몬교 중 무엇을 믿는가 등의 이 모든 것은 종교인이 베푸는 아량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종교가 이루어내는 도덕적선행과 확실하고 강하게 연관된 사실은 단 하나, 바로 사람들이 동료종교인과의 관계에 얼마나 단단히 얽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덕 매트릭스 안에서 맺어지고 이루어지는 우정과 집단 활동이 이타심을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최선을 이끌어내는 힘도 바로 그것이었고 말이다.
퍼트넘과 캠벨은 믿음을 강조했던 신무신론파의 입장을 거부하고 마치 뒤르켐의 입에서 나온 듯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바로 종교적 소속감이다. - P474

도덕성 정의에 대한 내 작업이 다음과 같은 뒤르켐의 말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사람들 간에 연대를 형성시키는모든 것, 나아가 •••••• 자신의 자아보다•••••• 커다란 무엇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을 규제하게 만드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도덕이
다." 뒤르켐은 사회학자였던 만큼 개인의 자아를 제약하는 사회적사실들 (개인의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사회적 사실들의 실례로는, 종교·가족· 법률을 비롯해 내가 도덕적매트릭스라고 칭했던 공통의 의미 네트워크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심리학자인 만큼 도덕성과 관련한 요소가 마음 바깥은 물론 우리의 마음 안에도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갖가지의 진화한 심리 기제들, 즉 도덕적 감정들, 내면의 변호사(혹은 공보관), 여섯 가지 도덕성 기반, 군집 스위치 등이 이러한 내적인 요소에 해당한다. - P479

이 보수주의자들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도덕 매트릭스의 폭이 넓기 때문에, 도덕적 자본에 위협이 가해질 경우 진보주의자는 미처 인지하지못해도 보수주의자는 그것을 감지해낼 수 있다. 보수주의라고 해서 모든 종류의 변화(이를테면 인터넷)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변화 때문에 우리 도덕성의 뼈대가 되는 제도나 전통(이를테면 가정)이 해를 입는다고 생각하면 보수주의자들은 거기에 맹렬히 맞서싸운다. 도덕성의 근간이 되는 그러한 제도와 전통의 수호야말로 보수주의자가 가장 신성하게 생각하는 가치이다.
예를 들어, 역사가 새뮤얼 헌팅턴 (Samuel Huntington)이 보수주의에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보수주의는 그것이 신성시하는 특정 제도(18세기 프랑스의 경우에는 군주제, 21세기 미국의 경우에는 헌법이 될 수 있겠다)를통해서는 정의될 수 없다고 한다. 그보다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는사회 기반이 위협을 받는 순간에 기능한다는 특징이 있다. 어느 정도는 제도가 꼭 필요하고, 또 그런 제도로는 기존의 것이 바람직함을 사람들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YourMorals.org에서의 연구 결과 우리는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이야말로 누구보다 폭넓은 도덕적 관심사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 이들이 여섯 가지의 기반 모두를 비교적 골고루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있었다(도표 12-4> 참조). 이 폭넓은 관심사(특히 충성심, 권위, 고귀함 기반에 비교적 높은 가치를 두는 것)는 보수주의자들로 하여금 일정한 통찰력을 갖게 해주는데, 뒤르켐식 공리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통찰력은 매우 소중한 것으로 여겨진다. - P539

한편 이보다 앞서 진행된 한 연구에서 퍼트넘은 민족이 다양할 경우 정반대의 효과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 플루리부스 우눔>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논문에서 그는 미국에 존재하는 수백 개공동체의 사회적 자본 수준을 심층 조사했고, 그 결과 이민과 민족적 다양성 수준이 높으면 사회적 자본이 감소하는 것 같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건 당연한 일 아니냐고 여러분은 생각할지 모른다. 사람들은 인종차별적 성향을 갖고 있어서 자신과 모습이 다른 사람들은 신뢰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는 그런 맥락의 이야기가 아니다. 퍼트넘은 설문 조사에서 사회적 자본을 다음의 두 가지로 분명히 구별해놓았다. 즉, 사회적 자본에는 서로 다른 집단 사이에 만들어지는 연접 자본(bridging capital)이 있는가 하면, 집단은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가치와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을 묶어주는 결속 자본(bonding capital)이 있다. 퍼트넘은 민족적 다양성이 이 두 종류의 사회적 자본을 모두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정리한다.

다양성으로 인해 초래되는 일은 내집단/외집단의 분열이 아니라, 아노미 혹은 사회적 고립이다. 쉽게 말해 다양한 민족이 뒤섞여 있는 환경 속의 사람들은 거북이가 등껍질 속으로 숨어들듯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인다.

퍼트넘은 여기서 뒤르켐의 사상(이를테면 아노미의 개념)을 활용해 왜 다양성이 존재하면 사람들이 안으로만 파고들며 더 이기적이 되는지, 그래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일에는 별반 관심을 안 가지게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퍼트넘이 말하는 거북이의 은둔성은 내가 앞에서부터 줄곧 이야기해왔던 꿀벌의 군집성과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 P544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 이는 상대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부족과 같은 도덕 공동체 속에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서는 신성한 가치를 빙 둘러싸고 다 같이 힘을 합쳐 왜 우리가 백번 옳고 저들은 백번 그른지 사후 논변을 지어낸다. 그러면서 상대방은 눈이 멀•어 진실. 합리성·과학·상식을 못 본다고 여긴다. 그러나 알고 보면신성한 대상을 이야기하는 순간 눈이 멀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상대편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쪽에서 신성시하는 것을 따라가보면 된다. 그러려면 첫걸음으로 여섯 가지의 도덕성 기반을 떠올려보고, 그중 해당 논쟁에서 가장 중시되고 있는 기반 한두 개를 찾아낸다. 더불어 여러분이 진정 마음을 열고 싶다면 머리가 아닌 가슴을 먼저 열어야 한다. ‘상대편의 누구와 한 번이라도 우정 어린 만남을 갖고 나면, 어느덧 상대편의 말에 귀 기울이기가 훨씬 쉬워졌음을 알 수 있게 될 테고, 그러면 심지어 논쟁거리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는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여전히 의견은 하나로 모으지 못한다 해도, 어느 한쪽은 옳고 한쪽은 그르다는 마니교식 이분법을 떠나 서로를 더 존중하는 건설적인 음양의 관계로 발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 P550

세계에 존재하는 도덕적 다양성,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는 철학자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이 그 답을 찾기 위해 평생 동안 씨름해온 문제이다. 벌린은 도덕적 상대주의를 단호히 거부하는 입장이다.

나는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일은 없다. "나는 커피에 우유 넣는 걸 좋아하지만 당신은 빼는 걸 좋아하지요. 그렇듯이 내가 따뜻한 심성을 선호해도 당신은 강제수용소를 선호할 수 있어요." 이 말은 곧 우리에게는 저마다 중시하는 가치가 따로 있고, 그 가치는 다른 무엇에 침해되거나 통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을 나는 틀렸다고 본다.

그 대신 벌린은 다원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하는데, 그것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와 기질이 여러 가지로 존재하듯이, 이 세상에는 본보기가 되는 이상(理想)도 여러 가지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나는 이르게 되었다. 가치라는 것은 무한정 존재하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가치들, 그러니까 내가 인간 본연의 외관과 성격을 유지한 채 추구할 수 있는 가치는 그 수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74개일 수도 있고, 혹은 122개일 수도 있으며, 혹은 27개일 수도 있으나, 그 개수가 어떻든 한정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원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어떤 이가 그러한 가치 중 하나를 추구할 때 나는 그 가치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왜 그 사람이 그 가치를 따르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그가 처한 상황에서라면 나 역시 그 가치를 따르게 될 것임을 인정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인간적 이해의 가능성이 싹튼다. - P557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왜 정치와 종교 때문에 서로 이편저편으로나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 답은 마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사람은 선하고 어떤 사람은 악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마음이 집단적 바름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져 있기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답이었다. 우리 인간은 지극히 직관적인생물체로서, 우리의 전략적 추론 능력도 사실은 직감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나와 다른 매트릭스의 사람들을 만나면, 더구나 그런 이들의 도덕 매트릭스는 우리의 것과는 다른 식으로 배열된 도덕성 기반에 의지하고 있는 때가 많기 때문에, 그들과 연결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러니만큼 이다음에 옆자리에 나와 다른 매트릭스의 사람이 앉게된다면, 그때는 한번 연결을 시도해보자. 하지만 그 사람의 매트릭스로 곧장 뛰어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거나 어떤 식으로든 약간의 신뢰가 생기기 전까지는 도덕성의 문제를 꺼내 들어서도 안 된다. 그러다가 시의적절하게 도덕성 관련된 이슈를 무사히 꺼냈다 싶으면, 그때는 다른 것보다 먼저 그 사람의 입장을 얼마간 추어주고 그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표한다.
우리는 어차피 한동안은 이 땅에 다 같이 발붙이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서로 잘 지낼 수 있게 함께 노력해보자, - P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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