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못된 장난꾸러기였다는 말을 듣고 힘이 나면 아주 나쁜 건가요, 아주머니? 린드 아주머니는 그렇다고 하셨어요. 린드 아주머니는 누군가가 나쁜 짓을 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게 아무리 어릴 적 얘기라도 늘 충격을 받으신대요. 한 번은 어떤 목사님이 어릴 때 친척 아주머니네 벽장에서 딸기 타르트를 훔쳤다고 고백하는 걸 듣고 다시는 그 목사님에게 존경심이 안 생기더래요. 그런데 전 생각이 달라요. 그걸 고백하신 건 정말 고귀한 행동이에요. 못된 짓을 하고 다니던 남자아이들이 자기들도 커서 목사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큰 용기를 얻겠어요. 제 생각은 그래요, 아주머니."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내 생각은 말이다. 앤, 설거지를 벌써 끝냈어야 한다는거다. 수다를 떨어대느라 평소보다 30분이 더 걸렸구나. 일부터 먼저 하고 말은 나중에 하는 법을 좀 배우렴." - P346

"음. 오늘 소중한 교훈을 새로 배웠어요. 초록 지붕 집에 온뒤로 실수를 많이 저질렀지만, 실수 하나하나가 큰 단점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됐거든요. 자수정 브로치 사건 때는 남의 물건을 기웃거리는 버릇을 고쳤고요. ‘유령의 숲‘ 때는 상상력이 지나치면 안 된다는 걸 배웠어요. 진통제 케이크로 요리할 때 부주의했던 습관을 고칠 수 있었고, 머리를 염색한 뒤로는 제 허영심을 돌아보게 되었잖아요. 전 이제 머리나 코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하긴 해도 거의 안 하는 편이죠. 오늘 실수 덕분에이제는 너무 낭만만 좇는 버릇을 고치게 됐어요. 에이번리에서낭만을 찾는 건 아무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수백 년전 캐멀롯의 성안에서라면 쉬웠을지 몰라도, 요즘 세상에 낭만은 어울리지 않아요. 이런 점에서 곧 제가 크게 달라진 모습을보시게 될 거예요. 아주머니."
"제발 그랬으면 좋겠구나."
마릴라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구석 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매슈는 마릴라가 자리를 뜬 뒤 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수줍은 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의 낭만을 다 버리진 마라, 앤, 낭만이 조금 있는 건 좋은거란다. 물론 너무 많으면 곤란하지. 하지만 조금은 남겨두렴. 조금은 말이다." - P372

"벨벳 양탄자야. 커튼은 실크고! 내가 꿈꾸던 것들이야, 다이애나.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것들 사이에 있으니까 별로 편하지가 않아. 여긴 없는 게 없고 전부 다 굉장히 멋져서 상상할 거리가 하나도 없어. 가난한 사람들이 한 가지 위안 삼을 수 있는게 그거거든. 상상할 거리가 훨씬 더 많다는 거." - P379

밤 11시에 거기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니 정말 근사했고 자유를 만끽하는 기분이었어요. 다이애나는 도시 생활이 자기한테 딱 맞대요. 배리 할머니가 저는 어떠냐고 물어보셨는데, 전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봐야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다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잠자려고 침대에 누워서 생각을 해 봤죠. 뭔가를 생각하기에 딱 좋은 때잖아요. 그러고는 결론을 내렸어요, 아주머니. 도시 생활은 제게 맞지 않고, 그래서 기쁘다는 거였어요. 가끔 밤11시에 멋진 식당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좋지만, 매일매일 을 생각하면 밤 11시에 동쪽 다락방에서 푹 자는 편이 더 좋아요. 여기서는 자는 동안에도 지붕 위에 별이 반짝이고 바람은개울을 건너 전나무 숲으로 불어온다는 걸 알잖아요. 다음 날아침 식사 자리에서 그렇게 말씀을 드리니 배리 할머니가 웃으셨어요. 배리 할머니는 제가 무슨 말만 하면 잘 웃으세요. 제가아주 진지한 얘기를 해도요. 그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아주머니. 제가 웃기려고 무슨 말을 한 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할머니는 정말 친절하신 분이고 우리를 아주 훌륭하게 대접해 주셨어요"
금요일이 되자 배리 씨가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조세핀 배리 할머니가 작별 인사를 했다.
"즐겁게 지냈는지 모르겠구나."
"정말 재밌었어요"
"넌 어땠니, 앤?"
"한순간 한순간이 모두 즐거웠어요."
앤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노부인의 목을 끌어안고 주름진 뺨에 입을 맞추었다. 다이애나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기에 앤의 거리낌 없는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조세핀 배리 할머니는 기뻐했고, 베란다에 서서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 P383

그 사이 앤은 키도 훌쩍 자랐다. 마릴라는 어느 날 앤과 나란히 섰다가 앤의 키가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앤, 언제 이렇게 컸니!"
마릴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말끝에 한숨이 따라나왔다. 마릴라는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마릴라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어린아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진지한 눈빛을 한 키 큰 열다섯 살 소녀가 사려 깊은 조그마한 얼굴을 당당히 들고 서 있었다. 어린아이를 사랑한 만큼 눈앞의 소녀도 사랑했지만, 마릴라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슬픈 상실감이 밀려왔다. - P412

한밤중에 깨니 어둠과 정적만 가득했다. 하루 동안의 기억이앤에게 슬픈 파도처럼 밀려왔다. 전날 저녁 문 앞에서 헤어질때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어주던 매슈의 미소가 눈앞에 선했다. "우리 딸, 자랑스러운 내 딸"이라고 말하던 매슈의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고, 앤은 가슴이 터지도록 울기시작했다. 마릴라가 그 소리를 듣고 앤을 달래 주려 올라왔다.
"자... 자...... 그렇게 울지 마라, 얘야. 그런다고 오라버니가 돌아오진 않아. 그렇게…… 그렇게 울면 안 돼. 그걸 알면서도 아까는 나도 참을 수가 없었지만 오라버닌 언제나 내게 정말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단다. 하느님은 잘 아시겠지."
"아, 그냥 울게 해 주세요, 아주머니. 우는 게 가슴 아픈 거보다 나아요. 잠시만 제 곁에서 절 안아 주세요. 다이애나와 함께 있을 순 없었어요. 다이애나는 착하고 다정다감한 친구지만…… 이건 그 애의 슬픔이 아닌걸요. 다이애나는 슬픔 속에 있지 않으니까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도와줄 수 없잖아요. 이건 아주머니와 저, 우리 두 사람의 슬픔이에요. 아, 아주머니, 아저씨 없이 어떻게 살죠?" - P479

집으로 돌아와 창가에 앉았던 그날 밤 이후로 슬픈 일들이 연이어서 얼마나 일어났는지! 그때만 해도 앤의 마음은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했고 미래는 장밋빛 약속으로 채워진 듯 보였다. 그날 이후로 몇 년은 지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앤은 미소를 머금었고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앤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용기 있게 마주했고, 마음을 내려놓고 순순히 받아들이면 의무도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 P488

퀸스에서 돌아와 창가에 앉았던 그날 밤 이후로 앤 앞에 놓인 미래의 지평선이 좁아졌다. 하지만 발 앞에 놓인 길이 좁아진다 해도, 앤은 그 길을 따라 잔잔한 행복의 꽃이 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실한 노력과 훌륭한 포부와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기쁨이 앤에게 깃들었다. 그 무엇도 타고난 앤의 상상력과 꿈이 가득한 이상 세계를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앤이 나직이 속삭였다.
"하느님 하늘에 계시니 세상은 평안하여라." - 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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