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성은 감각들의 증거를 날조하도록 만드는 원인이다.
감각들이 생성, 소멸, 변화를 보여 줄 때,
그것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군복무 시절, 휴가만큼 달콤했던 것이 또 있었을까. 특히 첫 번째 휴가는 그야말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것처럼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물론 귀대하던 날은 그 반대로 천길 벼랑으로 다시떨어지는 참담한 느낌이 들었던 순간으로 기억되지만 말이다. 친구들이나 부모님도 첫 휴가를 나온 나를 보면서 당혹감을 털어놓곤 했다. "군기가 바짝 들었는데?" 나는 너무나 각이 져 있고, 무언가에 주눅이 든 것처럼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긴 첫 번째 휴가 기간 동안에도 기상 시간에 벌떡 일어나는 내 모습에 나 자신도 얼마나 쓴웃음을 지었는지. 휴가 동안 나는 친구들을 만나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려고 학교 근처로 가거나, 아니면 혼자 있을 때면 영화관에 가거나 종로에 있던 대형 서점에 들르곤 했다. 가급적 군대에서는 할 수 없었던 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휴가 기간에 내가 했던 모든 것은 군대에서 억압할수밖에 없었던 나의 감정들을 되살려 내는 일들이었다. - P15

우리 시대의 삶은 과거보다 더 팍팍해졌다. 그만큼 우리에게서 행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삶의 조건이 악화된 만큼, 우리는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기 쉬우니까. 그렇지만 행복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감정의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분출이 가능하냐의 여부에달린 것 아닌가.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슬픔을, 쏟아지는 은하수에서 환희를, 친구의 행복에 기쁨을, 말러의 5번 교향곡 4악장에서 비애를, 멋진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시부모의 무례한 행동에 분노를, 주변 사람들의 평판에 치욕을, 번지점프에서 뛰어내리면서 불안을 이 모든 감정들의 분출로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것을 느끼게 된다. 원하는 감정일 수도 있고, 결코 원하지 않던 감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그것이 내 안에서 발생하고, 또 나 자신을 감정들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슬픔, 비애, 질투 등의 감정도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있기에, 내일을 더 희망차게 기다릴 수 있으니까. 장차 내게 행복한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설렘,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아닐지. - P18

한번이라도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응시했다면,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이성이 감정보다 먼저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이성은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성이감정을 적대시한다면 언젠가 감정의 참혹한 복수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감정에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칸트(Immanuel Kant)의 이성과는 다른 종류의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감정의 쓰나미를 무모하게 막아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을 긍정하고 지혜롭게 발휘하는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의 이성 말이다.
철학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스피노자만은 ‘이성의 윤리학‘
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에 주목한 ‘감정의 윤리학‘을 옹호했다. 스피노자가 피력했던 감정의 윤리학은 아주 단순한 사실, 즉 타자를 만날 때 우리는 기쁨과 슬픔 중 어느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들은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es)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P20

표면적으로 게라심은 여지주의 압력에 굴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지는 결코 게라심에게 무무를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게라심의행위는 소극적이나마 주체적인 결단, 다시 말해 여지주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비록 적극적으로 무무를 지키지는 못했지만, 게라심은 소극적이나마 여지주가 무무를 죽일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한 것 아닐까? 무무를 강물 속에 던지는 순간, 게라심은 농노로서 가지고 있던 비루함도 함께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하게 여지주의 말에 순종하는 존재였다면, 여지주의 손에서 무무를 빼앗아 자신의 손으로 무무의 생명을 앗으려는 결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침내 게라심은 자신을 지배하던 비루함을 극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피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비루함(abjectio)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것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슬픔‘은 어떤 타자가 나의 삶의 의지를 꺾으려고 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여지가 주인으로서의 삶을 부정할 때, 게라심이 느꼈던 것도 바로 이 슬픔이다. 이런 슬픔이 반복되면 누구나 비루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게라심은 자신이 사랑하는 무무의 목숨을 스스로 거둔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스스로‘라는 말일 것이다. 게라심의 행위는 제한적이나마 나름대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던 능동적인 결단이었으니까. 타티야나를 빼앗겼을 때 철저하게 순응적이기만 했던 모습과는 달리 게라심의 마음은 조금씩 비루함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비록 개일지라도 무무에 대한 애정이 그를 조금씩 주인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기적 아닐까? 사랑이 가져다주는기쁨의 감정은 우리에게 항상 조용히, 그렇지만 강력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의 기쁨을 지킬 수 있는 주인으로 살고있는가?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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