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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 부부는 세 시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프랜시스는 마치 여행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침 내내 어머니와 함께 시계를 보면서 안절부절못했고, 두 시 반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셋방들을 점검했다. 이후에는 마음을 가다듬었고, 그러다가 점점 맥이 풀려갔으며, 다섯 시가 다 된 지금 프랜시스는 또다시 셋방으로 향하는 자신의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구 몇 점 없는 그공간에 일말의 애정이 남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바버 부부가 어서 도착해 세를 들기를, 그리하여 이 기다림이 끝나기만을 초조하게 바랄뿐이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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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인들 중 대략 3분의 1은 자폐증에 더해서 최소한 하나 이상의 정신 질환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비율은 보통 사람들 중 약 10퍼센트가 정신 질환 진단을 받는 것과 비교된다. 그럼에도 자폐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이런 요인들에 대한 치료가 제공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폐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질병으로서 우울증을 앓고, 대략 18퍼센트는 불안증에 시달린다.  - P459

마빈 브라운의 어머니 아이실다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과 할수 없는 것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흔히 사람들은 <단순한 지혜>의 모태가 된 거친 환경을 미화하거나, 자신이 얻은 지혜를 실제보다 더 단순화하거나 더 현묘한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단순한 지혜>를 가르치려 든다. 하지만 아이실다 브라운은 아들의 상태에 대해 그동안 내가 만났던 그 어떤 어머니들보다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듯 보였다. 일평생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음으로써 수용하는 재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녀는 아들을 위해 양질의 복지를 요구했지만 그러한 복지 혜택이 자신의 아들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자폐 아동의 양육을 둘러싼 중산층이나 부유층의 이야기는 대체로 공허한 싸움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종의 대하소설이다. 반면에 나는 아이실다의 묵인하는 태도와 그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로서 그녀의 행복을 존중한다. - P463

미국 자폐증 협회는 150만 명 정도의 미국인이 자폐 범주에 해당될102거라고 추산한다. 02 질병 통제 센터CDC는 21세 미만 자폐 인구가 56만명에 달한다고 말한다. 미국 교육부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에서만 자폐증발병률이 매년 10퍼센트에서 17퍼센트씩 증가하고 있으며, 향후 10년 뒤에는 자폐 인구가 4백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중 1퍼센트 이상이 자폐 범주에 속한다. 이 같은자폐 인구의 급증은 확대된 자폐 범주와도 일부 관련이 있다. 한때는 분열형 장애나 지적 장애로 분류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아울러 한때는 특이한 사람으로만 여겨질 뿐 자폐 진단까지는 받지 않았을지도 모를 사람들이 이제는 자폐 범주로 분류된다. 부모들의 적극적인 지원은 자폐 아동들이 다른 질환을 앓는 아동들에 비해 보다 나은 복지 혜택을 누리도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어떤 특정한 진단 범주에 보다 나은 복지 혜택이제공될 경우 이를 이용하기 위해 전적으로 부합되지 않는 아동에게도 해당진단을 적용하려는 의사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자녀의 장애때문에 부당하게 가해지는 비난을 피하고자 한때는 자폐증이라는 꼬리표를 기피했던 부모들도 이제는 자녀가 특수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기꺼이 그 같은 꼬리표를 달아 주고자 한다. 일례로 캘리포니아에서는 진단명을 바꿔치기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 P467

퇴행성 자폐증이 실제로는 퇴행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많다. 다시 말해서, 특정 유전자형을 보유한 아동들은 발달 단계에서이미 징후들을 보이기 시작하지만 치아나 머리카락처럼 일정한 때가 되어야 자폐증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퇴행 현상을 보이는 자녀를 많은 부모들은 거의 정반대되는 주장을 내놓는다. 즉 특정한 환경적인 요인이 퇴행현상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면역 주사를 맞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해서 이런 퇴행 현상이 발생한다는 점을 들어 많은 부모들이 그들 자녀가 백신 때문에, 특히 홍역 볼거리-풍진MMR 백신과 수은 기반의 방부제 티메로살이 함유된 백신 때문에 자폐증에 걸렸다고 주장한다. MMR 백신은 1970년대에 미국에 도입되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 백신은 어머니의 항체가 백신의 작용을 가로막아서 한 살 이전에는 효과가 없기 때문에 대략 생후 13개월째에 접종된다. 1998년에 영국의 로열 프리 병원의 위장병 전문의 앤드루 웨이크필드Andrew Wakefield는 의학 전문지 「랜싯Lancer」에 MMR 백신과 자폐 아동의 위장병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웨이크필드와 그의 동료들이 제시한 관련 사례는 단지 12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에 대한 백신 접종을 거부했다. 영국의 홍역 예방접종 비율이 92퍼센트에서 8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고 그 결과 홍역 발병률이 치솟기 시작했다. 1998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홍역에 걸린 아동 숫자는 56명에 불과했고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2008년에 이르러서는 영국 전역에서 총 5,088명의 아이들이 홍역에 걸렸고 그들 중 2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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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이 자폐증과 무관하다는 증거들이 속속 등장했음에도 웨이크필드의 조수들은 은폐 의혹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논란을 야기했고, 그 결과 백신 문제는 계속해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아동에게 일상적으로 운용되는 모든 백신에서 티메로살을 제거한 이후에도 자폐증의 발병률이 줄어들지 않자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가 백신과 면역 체계에 대한 백신의 잠재적인 공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거나, 단순히 지나치게 많은 예방접종이 모두 합쳐져서 나타난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P469

인셀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음식 알레르기나 천식, 당뇨병, 자폐증, 소아 조울증 등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이런 질환들은 지난 10년간 40배로 증가했죠. 나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보다 포괄적인 어떤 요인이 있는 것은 아닐지 궁금해요. 그게 뭔지는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환경적인 요인이 아닐까 생각해요.」 안타깝게도 현대 생활에는 후보로 거론될 만한 환경적인 변수들이 너무나 많다. 이를테면 휴대전화나 항공 여행, 텔레비전, 비타민 영양제, 식품 첨가물 등이다. 많은 부모들이 주위에 널린 중금속이 그들의 자녀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믿는다. 또한 그 밖의 다른 광범위한 물질을, 특히 연간 생산량이 3백만 톤이 넘는 플라스틱을 만들 때 사용되는 에스트로겐 기반의 인공 고분자화합물 비스페놀-A 같은 물질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유전학자들은 이러한 의문들이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어쩌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 P473

자폐의 특정 측면을 찬양하는 이 모든 행위가 신경 다양성 운동이다. 가장 선구적인 자폐 자선단체로는 <큐어 오티즘 나우>가 있었고, 나중에 이 단체는 <오티즘 스픽스>와 통합되었다. 자폐증 치료에 반대하는 주장은 우주여행에 반대하는 것과 약간 비슷한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신경 다양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자폐증을 지금 치료하지 말라고 외친다. 다른 모든 정체성 정치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주장은 편견에 반대하여 벼려지고 연마된 견해이며, 그럼에도 근본적인 진실을 밝히는 일과 진실 자체를 창조하려는 시도 사이의 좁은 경계선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보다 큰 사회 집단까지 나서서 자폐인의 이례적인 사회 논리를 수용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사회를 구성하는 원칙 자체가 흔들린다고 불평한다. 한편 신경 다양성 운동가들은 자폐 행동에 사회적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자폐 행동이 단지 다를 뿐 똑같이 유효한 체계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회정의를 그들 나름대로 정하고 이를 위해 투쟁한다. - P493

중증 자폐를 가진 자녀의 부모 중에는 분명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폐인들을 가리켜 진짜 자폐가 아니라고 일축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여기에 가장 중요한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진단율의 증가는 유행병의 존재를 주장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즉 연구 자원을 얻어내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비록 고기능 자폐인들을 진단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자폐인의 숫자가 증가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그러한 연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유행병은 없다고 주장하는 「낯설지 않은 아이들Unstrange Minds의 저자이며 조이스 청의 남편이기도 한 로이 리처드 그린커는 자폐 스펙트럼의 양쪽 끝에는 과학에 반대하는 반(反)과학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신경 다양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자폐증을치료하려는 것에 분노한다. 반면에, 백신 사용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보기에 꼭 해내야 할 연구를 과학자들이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분노한다. 그들의 전제는 너무 달라서 서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식론적, 철학적 토대가 너무나 다른 까닭에 서로 대화를 할수 없다〉‘"고 말했다.
토머스 인셀은 <내가 아는 한 자폐 커뮤니티는 가장 양극화되고 분열된 커뮤니티이다. 나는 자폐 아동에게는 명백히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폐 아동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은 비단 자폐 아동뿐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 스스로를 지극히 경시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들은 암 환자나 전염병 환자에게도 똑같이 주장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우리는 이런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뇌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같은 주장을 삼가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가 최대한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가길 원하지만 그 자녀가 배변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말을 전혀 할 줄 몰라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 P500

 스트레스는 사람을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끈다. 그리고 극단적인 스트레스는 우리 사회의 가장 엄격한 금기를 범하도록 이끈다. 바로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행위다. 자폐증 자녀를 죽이는 행위가 사랑에서 우러난 행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증오나 분노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들을 죽이려다가 미수에 그친 데브라 윗슨은 경찰에게 <나는 그 아이가 <엄마, 사랑해요>라고말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장장 11년을 기다렸어요> ‘라고 말했다. 열정은혼란스럽다. 그리고 대다수 이러한 부모들은 매우 압도적인 감정에 휩싸여서 그 같은 행동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감정을 사랑이나 증오 둘 중 하나로 분류하는 것은 해당 감정의 크기를 축소하는 모양새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 스스로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그 감정이 얼마나 강렬한지 알 뿐이다.
미국에서 살해된 자폐 아동들 중 절반 이상이 부모에 의해 살해되고 자식을 살해한 부모들 중 절반가량이 이타적인 행동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회가 그들의 주장을 수용할 경우 해로운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곳곳에서 확인되었다. 이를테면 범죄학자들은 생명윤리학자들이 <이타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자식을 대상으로 한 살인뿐 아니라, 이미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부모들에게 죄의식을덜어 주어서 아동 학대가 증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이타주의를 동기로 내세워 세간의 이목을 끄는 모방 범죄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FBI 범죄 심리 분석관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런 사건의 진짜 동기는 힘과 통제권을 갈망하는 욕구인 경우가 많다. 법정이 이런 범죄에 대해 관대함을 보이는 것은 사회 전체에, 그리고 다른 부모들에게 자폐인의 삶이 다른 보통 사람의 삶보다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추론은 우생학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위험하다. - P525

다운증후군의 트라우마는 출생 이전부터 다운증후군 문제가 현실이되고, 그 결과 부모와 자식 간의 유대를 초기 단계에서 약화시킬 수 있다.
자폐증의 문제는 자폐증이 유아기에 시작되거나 발견되기 때문에 이미 부모와 유대 관계가 형성된 시점에서 아이에게 변화가 찾아온다는 점이다. 정신분열증이 충격적인 이유는 해당 질환이 늦은 사춘기나 성인 초기에 발병하는 까닭에, 부모의 입장에서 그동안 10년 넘게 알아 왔고, 사랑했으며, 심지어 이전과 거의 똑같아 보이는 아이를 영원히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거의 모든 부모는 정신분열증이 침습성 질환이라고, 사랑하는 아이에게 한 꺼풀 가면이 씌워졌다고, 그래서어떻게든 일시적인 피정복 상태에서 아이를 구출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보다 그럴듯한 현실은 정신분열증이 알츠하이머병처럼 무언가 더해지는 것이 아닌 대체와 결실(缺失)의 질병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전까지는알던 사람을 가면으로 덮어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부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은 정신 질환 증세가 전혀 없던 어린 시절의 일들을 기억하기 때문에, 특히 끈질긴 개인사에 관련된 과거의 흔적들이 계속 유지된다. 따라서 부모에게 과거의 트라우마는 물론이고 그가 했던 또는 하고자 했던 옳은 일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또한 사촌들의 이름을 알고 일정 수준의 기술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어쩌면 테니스의 백핸드 실력도 여전히 훌륭하고, 놀라거나 누군가를 무시할 때 한쪽 눈썹만 추켜올리는 기술도 여전할 것이다. 아울러 다른 부분에서도 지속성을 유지할 것이다. 이를테면 유머 감각도 그대로이고, 브로콜리를 싫어하는 것, 가을 낙조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 볼펜을 선호하는 것도 그대로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자신의 성격 중 상냥함을 포함해서 가장 기본적인 부분들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 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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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을 꺼내 뚜껑을 열었던 버들은 울상이 됐다. 개미가 새까맣게 되어 있었다.
"우야꼬, 이를 우짜꼬."
가까이 온 태완이 털썩 앉더니 버들에게서 도시락을 빼앗아 옆에 있던 물통의 물을 부었다. 물이 흘러넘치자 둥둥 뜬 개미도 밖으로 쏠려 나갔다. 태완은 한쪽 밥을 떠서 뚜껑에 담아 버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 도시락에 아직 남은 개미들을 후후 불어 날린뒤 밥을 입에 떠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늘 그래 왔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뜨겁고 고요한 묘지에 앉아 개미가 꾀었던 밥을 먹는 태완을 보자 버들은 무언가 울컥 치밀었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속내를 쏟아부었던 조금 전과 다른 감정이었다. 태완이 남의 땅에 와 살아 낸 시간을 한순간에 다 본 것 같았다. 버들이 살아봤기에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버들은 서둘러 떠 넣은 밥과 함께 눈물을 삼켰다.  - P176

"내사마 조선에 돌아갈 맘 없다. 여서 내 딸들 맘껏 학교 보내고 자유껏 살기다. 조선한테 쥐뿔 받은 기 없지만서도 내가 와 발 벗고 나서는가 하면 고향 떠난 우리한테는 조선이 친정인 기라. 친정이 든든해야 남이 깔보지 못한다 아이가. 일본인 노동자들이 툭하면 파업하는 기 우째서겄노. 힘센 즈그 나라가 뒤에 떡 버티고 있어가 노동자들이 하올레하고 맞짱 뜰 수 있는 기다."
줄리 엄마 말대로 일본인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처우개선을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벌이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백인 농장주들은 일본인 노동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조선인이나 필리핀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여 파업을 분쇄했다. 일시적이나마 임금이 높고,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터라 조선인 노동자들은 파업을 분쇄하는 데 기꺼이 참여했다.
조선이 친정이라는 줄리 엄마 말이 버들의 마음에 와 박혔다. 홍주가 어디서나 제 성질대로 거침없이 사는 것은 과부가 된 딸도 시댁에서 빼내 왔을 만큼 든든한 친정 덕분일지 몰랐다. 어머니가 조선 생각은 하지 말고 재미나게 살라고 했지만 떠나왔다고 해서,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친정을 잊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조국도 마찬가지였다. - P199

엄마가 쉬엄쉬엄 말했다. 편안하고 환한 얼굴이었다. 나는 울음을 꾹 참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가난해서 팔려 오거나일본 없는 세상에서 편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처럼 꿈을 찾아여기까지 온 것이다.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엄마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사람이 내 엄마인 게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연적으로 남은 두 사람이 따라 떠올랐다. 로즈 이모가 내 곁에 있어줘서 행복했다. 그리고 송화가 날 낳아 줘서 고마웠다. 레이의 끝과 끝처럼 세 명의 엄마와 나는 이어져 있다. 나는 또 어느 곳에있든 하와이, 그리고 조선과도 이어져 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언제나처럼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물 안주길 잘했구로."
엄마가 웃었다. 우리는 비를 피하지 않았다. 하와이에 산다면 이런 비쯤 아무렇지 않게 맞아야 한다.
아스라이 펼쳐진 바다에서 파도가 달려오고 있었다. 해안에 부딪힌 파도는 사정없이 부서졌다. 파도는 그럴 걸 알면서도 멈추지않는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파도처럼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살아갈 것이다. 할 수 있다. 내겐 언제나 반겨 줄 레이의 집과 나의 엄마들이 있으니까. (*)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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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발전의 특징은 질병의 감소다. 이제는 무수한 전염성 질병들이 백신으로 예방되거나 항생물질로 치료될 수 있다. 예컨대 에이즈 바이러스도 많은 경우에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으로 제어될 수 있다. 치명적인 암도 영구적으로 완화될 수 있다. 친모가 바이러스에 노출될 경우 태아에게청각 장애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건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청각 장애 아동의 숫자가 줄었을 뿐 아니라, 인공와우이식수술은 기능적인 차원에서 청각 장애인의 숫자를 감소시켰다. 뇌하수체 왜소증 치료법은 소인 인구의 감소를 불러왔다. 다운증후군은 조기 진단이 가능해지면서 일부 부모들이 낙태를 선택하기도 하지만 훨씬 효과적으로 대처할수 있게 되었다. 정신분열증은 신경이완제로 완화된다. 신동과 범죄의 비율은 시대와 상관없이 일관된 비율을 보여 준다. 이상하게도 자폐만 유독증가 추세에 있는 듯 보인다.
일부 전문가들은 우리가 예전보다 단지 자주 자폐증 진단을 내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1960년에 신생아 2,500명 중 한 명꼴이던 자폐 아동의 비율이 오늘날 88명 중 한 명꼴로 증가한 이유로서, 개선된 진단법은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자폐증이 왜 증가하는지 모른다. 사실 자폐증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다. 자폐증은 이미 알려진 생물학적 실체가 아닌 일단의 행동이라는 점에서 <질병>이 아니라 일종의 증후군)이다. 이 증후군은 지극히 변덕스러운 일단의 증상과 행동을 모두 망라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뇌의 어느 부분에서 해당 증후군을 유발하는 작용이 일어나는지, 왜 발생하는지, 무엇이 기폭제 역할을 하는지 거의 아는것이 없다. 게다가 외적인 징후 말고는 자폐 여부를 판단할 방법도 없다. 노벨상 수상자 에릭 캔들Eric Kandel 교수는 <자폐증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의 뇌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우리가 인간의 뇌를 이해해야만 비로소 자폐증을 이해할 거라는 사실을 에둘러서 말한 것이다. - P399

자폐증은 <파괴적인 질환>으로 간주된다. 행동뿐 아니라 감각적 체험, 운동 기능, 마음의 평정, 자신의 육체가 있는 곳에 대한 물리적 감각.내면 의식 등 거의 모든 면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자폐증은 사회적인 기능의 붕괴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지적 장애 그 자체는 자폐증이 아니다 같은 자폐증이라도 사람마다 증상이 다르게 나타나며, 자폐증의 주된 증상에는 언어능력의 부재나 지체, 서투른 비언어적 의사소통 능력, 팔을 퍼덕이거나 자신을 자극하는 행동을 포함한 반복 행동, 최소한의 눈맞춤, 친구를 사귀는 일에 대한 무관심, 즉흥적이거나 창의적인 놀이의 결여, 부족한 공감 능력이나 통찰력 및 사교성, 호의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의 부족, 고지식함, 고도로 집중된 관심, 회전하는 원형 물체나 반짝이는 물건에 대한 집착 등이 있다. 자폐가 있는 아동이나 성인은 대체로 사고하는 방식이 지극히 구체적이다. 따라서 은유나 유머, 반어법, 비꼼등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들은 강박적이거나 틀에 박힌 행동을 보이기 쉽고, 겉보기에 무작위적인 대상에 집착하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보다 장난감을 크기나 색깔별로 정리하기를 좋아한다. 자폐인 사람은 자신의 손을 물어뜯거나 머리를 찧으면서 자학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은 감각기능의 저하가 원인일 수 있다. 많은 자폐 아동이 사물을 가리키는 능력을 개발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신이 가리키고 싶은 것이 있을 경우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직접 그 대상에게 가야 한다. 반향언어증이 있어서 보통은 그 말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단어나 문장을 따라 하는 경우도 있다. 자폐인 사람들은 말을 하더라도 말투에 억양이 없을 수 있으며, 그러한 사람들은 흔히 자신을 매료시킨 딱히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은 여러 대상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장황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독특한 식사 습관과 극심한 편식도 흔한 일이다.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나 다른 사람과의 접촉, 형광등이나 깜빡거리는 조명, 소음으로인한 감각 과부하에 지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자폐가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옷에 달린 상표처럼 사소한 것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극을 받는 사람도 많다. 또한 대다수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어떤 것에 오히려 당혹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많다. 자폐 아동은 대체로 일찍부터 자폐 징후를 (주변 사람들이 인지하든 말든) 보이지만, 대략 3분의 1가량은 정상적으로 성장하다가 대체로 16개월에서 20개월 사이에 퇴행 현상을 보인다. 증상이 발현되는 정도가 모두 제각각인 까닭에 자폐증은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정의되며, 해당 스펙트럼에는 다양한 수준으로 발현되는 가지각색의 증상들이 포함된다. - P401

장애를 낯설지만 조용한 기쁨이 가득한 아름다운 장소로 설득력 있게 묘사한 「네덜란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비꼬면서, 자폐아를 둔한 어머니는 자폐 아동의 양육 경험을 교전 지역 한가운데에 인정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는 것에 비유해서 「베이루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글을 썼다. 이 생지옥은 자폐 아동이 보여 주는 극단적인 증상들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이러한 증상들에는 걸핏하면 벽에 대소변을 칠하는 괴벽, 미친 듯한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며칠씩 잠을 자지 않는 능력,
다른 사람과 교류할 줄 모르는 심지어 말을 걸 줄도 모르는 명백한 무능력, 닥치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성향 등이 포함된다. 이런 이례적인 신경학적 상태, 즉 자폐증에는 치료법이 없다. 그럼에도 교육이나 약물치료, 식이요법, 생활 방식의 변화 등을 통해 자폐 아동의 압박감이나 불안감, 육체적 또는 감각적 문제를 덜어 줄 수는 있다. 동일한 치료라도 사람마다 치료 효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를 밝혀낸 사람은 아직 없다. 더욱 좌절스러운 측면은 어떤 종류의 치료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폐 아동이 일반적으로 상당히 많음에도, 장시간 실제로 치료를 한 다음 포기할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아이에게는 어떠한 치료도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그나마 가장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치료법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노동 집약적이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비용이 든다. 한편 자폐에서 벗어난 <탈출>에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은 부모들로 하여금 거의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을 위해 싸우도록 만든다. 그 결과 부모들은 거의 미치기 직전까지, 또는 파산 직전까지 그들 자신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고, 그럼에도 자녀의 문제 행동은 고쳐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대다수 부모들은 치료할 수 없는 질환을 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을 치료하는 데 헌신하려고 하지만 자폐증은 그들의 <평온을 위한 기도>조차 외면한다. - P402

그녀와 함께 거주하는 소녀들 중 한 명은 뇌성마비였는데 엄마를 만났다가 헤어질 때마다 울음을 터뜨렸다. 벳시가 말했다. 「나는 여동생과 이야기하면서 <씨씨는 나와 헤어질 때도 우는 법이 없어라고 한탄했어요. 그러자 동생은 <만약 씨씨가 울면 언니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봐>라고 하더군요.」 씨씨 같은 자녀를 둔 부모들은 그들의 사랑이 자녀에게 무용지물일까 봐 두려워하고, 그들의 사랑이 부족해서 자녀를 완전히 파괴할까 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들 입장에서 보면 어느 쪽이 더 나쁜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씨씨를 외부 시설에 위탁한 지 3년이 지났을 때 벳시가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이 씨씨에게 가는 것을 싫어한다고인정해요. 그럼에도 정해진 날 중 한 번이라도 그녀를 보지 않으면 엄청난 죄책감을 느껴요. 우리 어머니 모임의 회원 중 한 분이 그러더군요.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영원히 가지 않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런 거예요.〉」 - P409

 그녀의 아들은 제한적인 발화 능력을 가졌으며 아주 제한적인 경우에만 그 능력을 발휘할 수있다. 「그 아이는 흥분했을 때만 말을 할 수 있어요. 신경학적으로 그렇대요. 그리고 갈수록 더 자주 흥분하는데 그러면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인 것같아요. 한편으로 그는 어렸을 때보다 지금이 더 안쓰러워요.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낳거나, 할아버지가 되거나, 집을 사지도 못할 거잖아요. 어른이 되어서 하는 모든 일들은 그 사람에게 인생의 풍미를 제공해요. 하지만 아무리 수평선 저 너머까지 둘러보아도 그 아이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또 다른 어머니가 열세 살짜리 자신의 아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만약 그 아이가 청각 장애라면, 그래서 수화를 배울 필요가 있다면 나는 수화를 배울 거예요. 그렇지만 지금의 그 아이가 사용하는 언어를 배울 방법은 전무해요. 그 아이 자신도 그 언어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다." - P435

뇌 영상 검사는 자폐증의 기제(機制)를 밝히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해당 기제의 생물학적 기질 중 일부를 밝혀냈다. 예일 대학에서 진행된 한 연구에 따르면, 자폐증이나 아스퍼거 증후군인 어른이사람의 얼굴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활성화되는 뇌 영역은 자폐증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 사물을 인식할 때 활성화되는 영역과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무언가에 집착을 보이는 자폐인은 사람의 얼굴이나 사물을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는 뇌 영역에서 인식했다. 요컨대 자폐인 소년은 자신의 어머니를 인식할 때나 평범한 찻잔을 인식할때 동일한 뇌 영역에 불이 들어왔다. 그렇지만 그 소년이 일본 만화 중 하나인 디지몬 캐릭터에 집착하고 그런 상태에서 디지몬 캐릭터를 보는 경우에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를 처리할 때 사용하는 뇌 영역에 갑자기 불이 들어왔다. - P443

또한 자폐증은 자연 발생적인 새로운 변이나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유전자질환일 수 있다. 일례로 자폐증은 친부의 나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이 같은 연관성의 잠재적인 원인으로는 아버지의 나이가 많은 경우 정자에서 생식 계열의 새로운 변이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점을 꼽을 수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30대 아버지를 20대 아버지와 비교했을 때 자폐증 발병률은 4배가 더 많았고, 이후의 연령대에서는 이 같은 현상이 더욱 심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연구자들은 자폐증이 임신 기간 중에 발생하는 임부와 태아의 유전적인 불친화성 때문에 초래된다는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동류(同類) 교배>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오늘날처럼 유동적이고 인터넷이 활성화된 시대에는 특정 유형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 예컨대 <체계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이 이미 그런 성향이 두드러진 비슷한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고, 따라서 가벼운 자폐 성향을 가진 이들 두 사람이 그런 특성이 보다 심화되어 나타나는 자녀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 P449

일란성 쌍둥이 중 한 명이 자폐인 경우 다른 한 명도 자폐일 확률은증상이 훨씬 경미하거나 중증인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60~90퍼센트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은 자폐증이 유전적 질환이라는 강력한 논거를 제시한다. 일란성 쌍둥이는 눈동자 색깔이나 다운증후군 같은 질환을 항상 공유하지만 공유되지는 않는 특성들도 많으며, 자폐증은 인지 장애 중에서도 특히 쌍둥이 간의 상호 연관성이 높다. 요컨대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 강박장애 등에 비해 쌍둥이 형제 중 한 명이 발병하면 다른 한 명도 발병할 확률이 높다.
일란성이 아닌 이란성 쌍둥이 중 한 명이 자폐인 경우 다른 한 명도 자폐일 확률은 20~30퍼센트이다. 이란성 쌍둥이는 유전자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 환경이 거의 비슷할 뿐이다. 쌍둥이가 아니더라도 형제 중에 자폐인이 있는 경우 다른 형제도 자폐일 확률은 보통 사람들보다 20배정도 높다. 심지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더라도 가까운 친척 중에 자폐인이 있는 사람은 잠재적으로 자신의 사회성에 문제를 느낄 가능성이 있다." 이 모든 사실은 자폐증에 강력한 유전적 요인이 존재하지만 유전자 하나만으로 모든 자폐증 사례를 설명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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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신부, 픽처 브라이드 버들은 자신들을 지칭하는 단어를 되뇌어 보았다.
"언니는 이름이 우예 그렇습니꺼? 살면서 그런 이름은 첨이라 버들은 우연히 둘만 있게 됐을 때 에스더에게 물었다. 에스더는 사진 신부들 중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버들을 좋게 보았다.
"내 조선 이름은 붙들이야. 난 내 위로 오빠가 둘이나 죽은 다음태어났어. 할아버지가 남자 동생 태어나면 붙들라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 너무 싫었어. 이름 주인인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남동생을 위한 이름인 거잖아."
"그라모 에스더는 누가 지은 겁니꺼?"
"교회에서 세례명을 짓게 됐을 때 내가 고른 거야. 에스더는 자기네 동포를 구한 왕비야. 나도 미국에 가서 공부해 우리 동포를 구할 거야."
버들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에스더를 홀린 듯이 보았다. 버들은 동포를 구할 거라는 말보다 이름을 스스로 골랐다는 사실이 더 대단해 보였다. 붙들이처럼 어진말 여자애들 중에도 남동생 보라고, 아니면 원하지 않은 딸이라서 지은 이름들이 있었다. 섭섭이, 서운이, 또섭이, 끝순이, 막순이, 말순이, 얌전이…… 심지어 이름 없는 아이도 있었다. 아무렇게나 불리다 시집가면 안골댁, 양촌댁처럼 친정 동네 명칭을 붙인 태호가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다. 가난한 과부의 딸인 버들도 조선에서 시집갔으면 어진말댁이 됐을것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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