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을 꺼내 뚜껑을 열었던 버들은 울상이 됐다. 개미가 새까맣게 되어 있었다. "우야꼬, 이를 우짜꼬." 가까이 온 태완이 털썩 앉더니 버들에게서 도시락을 빼앗아 옆에 있던 물통의 물을 부었다. 물이 흘러넘치자 둥둥 뜬 개미도 밖으로 쏠려 나갔다. 태완은 한쪽 밥을 떠서 뚜껑에 담아 버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 도시락에 아직 남은 개미들을 후후 불어 날린뒤 밥을 입에 떠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늘 그래 왔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뜨겁고 고요한 묘지에 앉아 개미가 꾀었던 밥을 먹는 태완을 보자 버들은 무언가 울컥 치밀었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속내를 쏟아부었던 조금 전과 다른 감정이었다. 태완이 남의 땅에 와 살아 낸 시간을 한순간에 다 본 것 같았다. 버들이 살아봤기에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버들은 서둘러 떠 넣은 밥과 함께 눈물을 삼켰다. - P176
"내사마 조선에 돌아갈 맘 없다. 여서 내 딸들 맘껏 학교 보내고 자유껏 살기다. 조선한테 쥐뿔 받은 기 없지만서도 내가 와 발 벗고 나서는가 하면 고향 떠난 우리한테는 조선이 친정인 기라. 친정이 든든해야 남이 깔보지 못한다 아이가. 일본인 노동자들이 툭하면 파업하는 기 우째서겄노. 힘센 즈그 나라가 뒤에 떡 버티고 있어가 노동자들이 하올레하고 맞짱 뜰 수 있는 기다." 줄리 엄마 말대로 일본인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처우개선을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벌이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백인 농장주들은 일본인 노동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조선인이나 필리핀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여 파업을 분쇄했다. 일시적이나마 임금이 높고,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터라 조선인 노동자들은 파업을 분쇄하는 데 기꺼이 참여했다. 조선이 친정이라는 줄리 엄마 말이 버들의 마음에 와 박혔다. 홍주가 어디서나 제 성질대로 거침없이 사는 것은 과부가 된 딸도 시댁에서 빼내 왔을 만큼 든든한 친정 덕분일지 몰랐다. 어머니가 조선 생각은 하지 말고 재미나게 살라고 했지만 떠나왔다고 해서,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친정을 잊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조국도 마찬가지였다. - P199
엄마가 쉬엄쉬엄 말했다. 편안하고 환한 얼굴이었다. 나는 울음을 꾹 참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가난해서 팔려 오거나일본 없는 세상에서 편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처럼 꿈을 찾아여기까지 온 것이다.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엄마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사람이 내 엄마인 게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연적으로 남은 두 사람이 따라 떠올랐다. 로즈 이모가 내 곁에 있어줘서 행복했다. 그리고 송화가 날 낳아 줘서 고마웠다. 레이의 끝과 끝처럼 세 명의 엄마와 나는 이어져 있다. 나는 또 어느 곳에있든 하와이, 그리고 조선과도 이어져 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언제나처럼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물 안주길 잘했구로." 엄마가 웃었다. 우리는 비를 피하지 않았다. 하와이에 산다면 이런 비쯤 아무렇지 않게 맞아야 한다. 아스라이 펼쳐진 바다에서 파도가 달려오고 있었다. 해안에 부딪힌 파도는 사정없이 부서졌다. 파도는 그럴 걸 알면서도 멈추지않는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파도처럼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살아갈 것이다. 할 수 있다. 내겐 언제나 반겨 줄 레이의 집과 나의 엄마들이 있으니까. (*)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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