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내게 경서를 향한 특별한 감정과 욕망이 결여되어 있었던 건 맞다. 경서에 대한 연애 감정이나 욕망이 없었던 건 어쩔 수없다. 문제는 내가 지키는 줄도 모르고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무내용이다. 아무것도 없는 개미굴 같은 폐광을 절대 굴착당하지 않으려고 철통같이 지켜내려 했던 그때의 내 헛된 결사성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끔찍한 모순이며 기망인가. 나는 경서를 존중하지도 예의를 지키지도 않았다. 그러니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비열하고 무심한 인간이라는 걸 명민한 그가 읽어낼까봐. 내가 집요하게 수박을 원할 때 경서는 수박을 사주는 대신 등을 돌리고 모른 척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것이다. 수박을 사준 데 대한 내 감사의 눈길을 그렇게 한사코 피했던 건 어쩌면 잘못 엮인 노끈처럼 나와 엮이는 것이 그도 무섭고 불안해서였을 것이다. - P236

내가 여자를 잊지 못하는 건, 여자의 환영을 꿈에서도 보는 건내 속의 무엇을 그녀가 여전히 쥐고 흔들기 때문이다. 젊은 날 숲속 식당에서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결코 혐오나 분노가 아니었다. 오히려 연민과 공감에 가까웠다. 꼬리털이 반 넘게 벗겨진, 여자의 존재만으로도 꼼짝 못하고 여자가 휘두르는 폭력의 자장 안에서 벌벌 떠는 강아지는 나의 과거 같았고, 머리숱이 적고 군데군데 뽑힌 듯한 헌 자국이 있는 술 취한 여자는 나의 미래 같았다. 나는 여자가 될 것이고, 지나온 삶만큼이나 살아갈 여생도 끔찍할 것이다. 사는 내내 나와 유사한 행로를 살아갈 누군가의 기억 속에 섬뜩한 이미지로 출몰하면서, 그렇게 삶에서 오래 겉돌다, 날파리떼가 달라붙은 거미줄 같은 수의를 입고 홀로 죽게 될 것이다. 여자를 본 순간 나는 미래를 기억하는 듯한 착란에 사로잡혔고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느꼈다.
죽어, 버릴까...... 죽어, 버릴까.....
나는 여자의 말투를 흉내낸 게 아니라 내 속에 오랫동안 고여있던 가래 같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학대의 사슬 속에는 죽여버릴까와 죽어버릴까밖에 없다. 학대당한 자가 더 약한 존재에게 학대를 갚는 그 사슬을 끊으려면 단지 모음 하나만 바꾸면 된다. 비록 그것이 생사를 가르는 모음이라 해도. - P237

나는 한참 눈을 꾹 누르고 있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수박 앞에서가 아니라 일기 상자 앞에서, 두 겹의 차원이 동일한 무늬로 만나는 날 숲속식당에 가자는 편지를 읽고 내가 울 수도 있었을까. - P241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나는 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매년 새해가 되면 1월 23일의 음력 날짜를 꼬박꼬박 확인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죽기 전에 한번 더 진정한 왈츠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숲속 식당의 마당에 홀로 서 있지 않을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숙녀에게 춤을 권하듯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 테고 우리는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돌아갈 것이다. 공중에서 거미들이 내려와 왈츠의 리듬에 맞춰 은빛거미줄을 주렴처럼 드리울 것이다. 어둠이 내리고 잿빛 삼베 거미줄이 내 위에 수의처럼 덮여도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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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내게 경서를 향한 특별한 감정과 욕망이 결여되어 있었던 건 맞다. 경서에 대한 연애 감정이나 욕망이 없었던 건 어쩔 수없다. 문제는 내가 지키는 줄도 모르고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무내용이다. 아무것도 없는 개미굴 같은 폐광을 절대 굴착당하지 않으려고 철통같이 지켜내려 했던 그때의 내 헛된 결사성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끔찍한 모순이며 기망인가. 나는 경서를 존중하지도 예의를 지키지도 않았다. 그러니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비열하고 무심한 인간이라는 걸 명민한 그가 읽어낼까봐. 내가 집요하게 수박을 원할 때 경서는 수박을 사주는 대신 등을 돌리고 모른 척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것이다. 수박을 사준 데 대한 내 감사의 눈길을 그렇게 한사코 피했던 건 어쩌면 잘못 엮인 노끈처럼 나와 엮이는 것이 그도 무섭고 불안해서였을 것이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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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사만큼 공장 같아 보이는 곳도 없었다. 이곳에서 단일 돈사로는 임신사가 가장 컸는데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파이프와 두툼한 철봉을 구부려 만든 케이지였다. 양돈장에선 이렇게 모돈을 가둬놓는 케이지를 스톨이라고 부르는데 폭 70cm, 높이1m20cm, 길이 1m 90cm였다. 스톨 안에선 모돈이 눕거나 일어서는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폭이 기껏해야 어른 팔 길이 정도였기 때문에 돼지들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몸을 30도 정도만 돌려도 철봉에 막혔다. 그런 스톰 수백 개가 대여섯 줄로 건물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곳의 돼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다가 일어나 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사료를 먹고 살이 찌는 것뿐이었다.
"모돈은 그러면 출산을 몇 번이나 하나요?"
"지금 그걸 모돈 회전율이라고 하는데 일반 농장은 1년에 2회 정도돼. 근데 우리는 1년 2.4회야. 대개 출산을 일곱 번 정도하면 노산이라고 해서 산자수가 줄어. 그럼 생산성이 떨어지지. 무슨 말이냐하면 간단하게 얘기해서 모돈이 사료 먹는 거에 비해서 낳는 새끼 수가 더적은 거야. 그래서 7산하면 그걸로 끝이지. 그러니까 보통 한 3년 키운다고 봐야지. 키우려고 하면 10년이라도 키우지. 그치만 그런 건 우리가 전부 손해 보고 키우는 거니까 그렇게는 안 하지. 어디도 그렇게는안해." - P165

임신사와 분만사의 모돈은 모두 이런 구조의 스톨에 갇혀 있었다. 반면에 어린 돼지나 고기로 쓰는 비육돈은 커다란 우리에 수십 마리씩 풀어놓은 상태로 사육했다. 이런 우리를 농장에서는 돈방이라고 부른다. 돈방 크기는 농장마다 제각각이었지만 스톨의 크기는 어느 양돈장이나 동일하다. 돈방도 비좁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안에 있는돼지들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엎드렸다, 드러누웠다, 걷다, 뒷걸음질 치다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다른 돼지들을 베고 잠이들었다 귀나 꼬리를 물며 싸우기도 하고 펄쩍펄쩍 뛰어오르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모돈들은 갇혀 있다기보다는 온몸을 꽁꽁 묶인 채로 3년을 보내는거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스톨을 사용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잔인해서가 아니라(때로는 잔인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효율성 때문이었다. 모돈은 자돈이나 비육돈과 달리 집단으로 다룰 수가 없었다. 모돈을 작업하려면 한마리 한 마리를 개별적으로 다뤄야 했다. 고기용 돼지에겐 개별적인 이력이란 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 태어나서 6개월이 지난 후까지살아 있으면 도축장으로 보낼 뿐이다. 반면 모돈은 각각의 품종에서부터 시작해서 사용한 약품, 건강 상태, 출산 횟수, 그동안의 산자수, 유산 유무, 마지막 출산일, 임신 확인 날짜, 분만 예정일 등등까지 확인할 수 있어야 했다.
스톨은 돼지에게 주사를 놓아야 할 때 굉장히 편리했다. 돈방에서주사를 놓을 때는 몇 사람이 돼지를 몰고 관리자가 돼지 엉덩이를 쫓아다니며 주사바늘을 꽂았다. 스톨에서는 그냥 일으켜 세우기만 하면됐다. 무엇보다도 임신사의 가장 중요한 업무인 인공수정을 하려면 돼지를 한참 동안 꼼짝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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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차반이 두고 간 닭들이 계사마다 가득했다. 죄인들은 계사 모서리에 모여서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닭들에겐 이 모든것이 낯설 것이다. 계사 안 가득한 냉기도, 어둠도, 굶주림도, 목마름도. 닭들에게 유일하게 익숙한 존재는 나였을 거다. 매일 아침마다 동료들의 목을 부러뜨리며 돌아다니던 커다란 인간. 이제는 미뤄왔던 일을 끝내야 했다. 먼저 패자부활전이 있었다. 사장이 몸집이 큰 놈들로만 30마리 정도 골라놓으라고 지시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줄 거라고 했다. 나머지는 전부 비활성화시켰다. 무리와 떨어져 있던 놈들은 지난번처럼 빗자루를 들고 뛰어다니며 붙잡아야 했다. 구석에 몰린 닭은 도망가지 못하게 주위에 상자를 쌓아둔 다음 한 마리씩 한 마리씩 목을 부러뜨렸다. 배가 고파선지 얼이 빠져선지 닭들은 바로 옆에서 목이 떨어져 나간 닭이 푸드덕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감각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10동에서부터 차례대로 작업했는데 얼마나 많은 닭을 죽였는지 모르겠다. 수백 마리는 될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정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손에 ‘투두둑‘ 하고 닭의 명줄이 끊어지는 느낌이 전해져도 정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릴 때만큼의 감정도 소모하지 않고 닭의 목을 비틀었다. 내 발 주위는 무도병에 걸린 것처럼 사지를 흔들어대는 닭으로 가득했다. 잠깐, 정말 찰나의 100분의 1 정도의 순간 동안 예전의 일기에 적어놓은 그런 감정들, 미안함, 불편함, 찝찝함 같은 것들이 느껴질 것 같았지만 금세 짜증과 피로에 묻혔다. 이런 식이면 사람도 죽일수 있을 것 같았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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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거를 반추하면 할수록 내게 가장 놀라웠던 건 그 시절의 내가 도무지 내가 아닌 듯 무섭고 가엾고 낯설게 여겨진다는 사실이었다. 오래전 기억 속의 자신은 원래 그렇게 생각되는 법인지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렇더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젊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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