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내게 경서를 향한 특별한 감정과 욕망이 결여되어 있었던 건 맞다. 경서에 대한 연애 감정이나 욕망이 없었던 건 어쩔 수없다. 문제는 내가 지키는 줄도 모르고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무내용이다. 아무것도 없는 개미굴 같은 폐광을 절대 굴착당하지 않으려고 철통같이 지켜내려 했던 그때의 내 헛된 결사성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끔찍한 모순이며 기망인가. 나는 경서를 존중하지도 예의를 지키지도 않았다. 그러니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비열하고 무심한 인간이라는 걸 명민한 그가 읽어낼까봐. 내가 집요하게 수박을 원할 때 경서는 수박을 사주는 대신 등을 돌리고 모른 척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것이다. 수박을 사준 데 대한 내 감사의 눈길을 그렇게 한사코 피했던 건 어쩌면 잘못 엮인 노끈처럼 나와 엮이는 것이 그도 무섭고 불안해서였을 것이다. - P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