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지금 확실히 기억나는 것,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것은, 그뒤에 이어진 폭력 사태였다. 가끔 당시 민주주의가 아파르트헤이트에승리했다며 이를 ‘무혈혁명‘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하지만그건 백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흑인들의 피는 거리에 흘러 넘쳤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붕괴됐으니 우리는 이제 주도권이 흑인들에게 넘어오리란 걸 알았다. 문제는 ‘어느 쪽 흑인이냐‘였다. 잉카타 자유당측이Inkatha Freedom Party 측과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서로 권력을 다투면서 폭력 사태가 빈발했다. 이 둘 사이의 정치적 역학 관계는 상당히 복잡했지만, 줄루와 코사의 대리전으로 이해하는 편이 가장 쉽다. 잉카타는 대부분 줄루족으로, 매우 호전적이며 국수주의적이었다. 한편 ANC는 여러 다른 부족들의 연합체 성격을 띠고있었으나 그 당시엔 주로 코사족이 리더를 맡고 있었다. 이 둘은 평화롭게 힘을 뭉치는 대신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곳곳에서 폭동이 일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됐다. 넥레이싱 Necklacing 처형이 흔하게 벌어졌다. 넥레이싱이란 사람의 팔을 결박하고 고무 타이어를 몸통에 씌운 후, 휘발유를 들이붓고 불을 붙여 산 채로 화형시키는 것이다.  - P26

나는 엄마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제대로 못 들었다. 꾸벅꾸벅 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신호등이 가까워졌다. 버스 기사가 차로를 살피기 위해 속도를 줄이는 순간, 엄마는 손을 뻗어 버스 문을 밀어제치더니, 나를 잡아 있는 힘껏 밖으로 내던졌다. 그러고는 앤드루를 감싸 안은 채 몸을 둥글게 말아 나를 따라 뛰어내렸다.
아프기 전까지는 꿈인 줄만 알았다. 쾅! 나는 도로 바닥에 세게 내동댕이쳐졌다. 엄마는 바로 내 옆에 떨어졌고 우리는 데굴데굴 구르고 굴렀다. 잠이 확 달아났다. 반쯤 잠들어 있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 난 겨우 멈춰 서긴 했지만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엄마는, 이미 두 발로 서 있었다. 나를 향해 엄마가 소리쳤다.
"뛰어!"
그래서 나는 뛰었다. 엄마도 뛰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누구도 나와 엄마보다 빨리 달리지 못했다.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뭘 해야 하는지 나는 그냥 알았다. 항상 폭력이 잠복해 있고 그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세계에서 살며몸에 밴 동물적 본능이랄까. 흑인 거주구에서, 진압 장비를 착용한 경찰이 장갑차와 헬리콥터를 대동하고 등장하면 나는 알았다. ‘숨을 곳을 찾아 뛰어야 한다. 뛰어서 숨어야 한다.‘ 다섯 살짜리지만 알았다. 다른 삶을 살았다면, 달리는 미니버스에서 내던져져서 당황했을지 모른다. 멍청이처럼 멀뚱히 서서 ‘무슨 일이에요, 엄마? 왜 내 다리가 이렇게 아프죠?"라고 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엄마가 ‘뛰어‘라고 했으니 나는 뛰었다. 사자로부터 도망치는 가젤처럼 나는 뛰었다. - P32

대영 제국이 쇠퇴하면서 아프리카너들은 남아공이 자신들의 적법한 유산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들썩이며 증가하는 다수의 흑인들에 맞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는 더 새롭고 더 튼튼한 도구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공식 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전 세계의 인종 차별 제도들을 연구했다. 호주, 네덜란드, 아메리카 대륙을 방문해서 어떤 제도가 효과적이고 그렇지 않은지 파악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보고서를 발간했고, 정부는 이렇게 얻은 지식을 활용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선진적인 인종차별 시스템을 설계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흑인들을 완전히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법률과 감시 시스템으로구성된 일종의 경찰국가 제도였다. 그 법률전문은 3000페이지가 넘고 무게가 거의4.5킬로그램에 달하지만, 그 요지는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미국은 원주민들을 ‘분리시키고 ‘노예화‘한 후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제거해 버렸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동일 집단의 사람들에게 행해졌다고 생각해 보라. 그게바로 아파르트헤이트였다. - P36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입증해 주지만, 나는 내 부모의 범죄를 입증하는 증거였다. 내 아빠와 함께할 수 있는 건 오직 실내뿐이었다. 집을 떠나면 그는 우리와 길 건너에서 걸어야 했다. 엄마와 나는 늘 주버트 파크에 갔다. 요하네스버그 중앙 공원에는 아름다운정원과 동물원, 사람 크기의 말을 갖춘 대형 체스판이 있었다. 한번은 내가 막 걸음마를 배우던 시절 아빠와 함께 그 공원에 갔던 적이 있다는 말을 엄마로부터 들었다. 공원에서 그는 나와 멀찍이 떨어져 걷고있었는데, 내가 쫓아가면서 이렇게 외쳤단다. "아빠! 아빠! 아빠!"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그는 도망쳐 버렸다. 나는 그게 아빠를 쫓는 게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엄마와도 같이 걸을 수 없었다. 피부색이 밝은 아이가 흑인여자와 함께 다니면 여러 의문들이 제기된다.  - P48

히포와 특별 기동대를 처음 본 것은 내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이었던 때였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마침내 붕괴된 이후였다. 그전까지는한 번도 경찰을 본 적이 없었는데, 아예 내가 경찰의 눈에 띌 일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웨토에 오면 할머니는 나를 절대 밖에나다니게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말했다. "안 돼, 안돼지, 안 돼. 얘는 절대 집 밖으로 나가선 안 돼." 벽 뒤에서, 마당에서는 놀 수 있었지만, 거리에서는 안 됐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놀고 있는 그 거리에서는 내친척들, 이웃 꼬마들, 걔네들은 밖으로 나가 맘대로 배회하다가 해가 질무렵에야 집에 돌아왔다. 나는 할머니에게 제발 밖에 나가게 해 달라고졸랐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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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21세기에 나타난 감시에는 세 가지 새로운 양상이 있다. 첫째는 모니터링되는 수준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다지털 기술 때문에 사생활 침해가 우려스러운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며, 셋째는 의사결정 권력이 지나치게 기계에 이양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문제는 역시 규모다. 옥스퍼드대 정치학자 이반 마노카Ivan Manohka가 썼듯 "예전에는 작업장 감시가 신중하게 이루어졌고 감독자의 시선은 제한적이었으며 그 범위도 작업장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직원의 성과에 대한 디지털 정보를 전자 기기와 센서가쉬지 않고 실시간으로 수집·처리하며, 그 범위가 (그리고 종종) 작업장밖으로까지 확장된다. "
상시적인 감시 아래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기계적인 방식으로 감시된다. 갈수록 솔직해지지 못하고 동료와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남에게 불신받는다고 느낄수록 우리 주변을 더더욱 경계하고, 자신을 검열하며, 움츠러들고,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기 두려워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외로워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용주, 우리의 일, 우리의 주변 사람과 단절된 느낌을 받게 된다. - P253

하심이 낮은 평점을 받고 우버에서 쫓겨날 것이 두려워 장시간아무 말도 못 하는 환경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안타깝다. 이러한 사실은 평가 구조에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누군가를 숫자 하나로 축소해버릴 때 그들은 스스로를 검열하고, 스스로에게 침묵을 강요하며,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굽실거리는 와중에 진정한 자아로부터 소외된 기분을 느낄 위험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수치에는 맥락에 대한 이해가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실제로 형편없는 서비스에 매겨진 ‘2점‘은 고객이 기분이 좋지 않아서 준 ‘2점‘이나 어느 인종차별주의 손님이 단순히 피부색 때문에 준 ‘2점‘과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 P257

더욱이 인간과 로봇의 대화는 아직 인간과 인간의대화만큼 유려하거나 유창하지 않으며, 로봇의 인터페이스도 점점개선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투박하다. 그러니 로봇이 우리와 맺을 수있는 ‘우정‘은 아직까지는 다소 제한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며, 기술의 진보에서 흔히 그렇듯이 섹스가 이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적어도 엔지니어의 관점에서 보면 최고급 섹스로봇은 가장 발전된 형태의 소셜 로봇이며, 특히 최근 출시된 섹스로봇은 역시나 아직은 인간에 가깝다고하기는 어렵지만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 P303

어떤 사람은 이런 사건들은 피해자 없는 범죄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알렉사에게 언어폭력을 가하는 것은 고장 난 자동차에 욕을 퍼붓는 것과 다르지 않고, 페퍼를 발로 차는 것은 문짝에 발길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우리가사물에 인간적 특징을 부여했으면 최소한만이라도 예의를 갖추어 그사물을 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행동이 괜찮은 것이 되고 급기야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도 서서히 스며들 위험이 있다. 섹스로봇을 때리는 남자는 자신의 데이트 상대에게 폭력적이 될 것이다. 가상 비서에게 공격적으로 또는 무례하게 말하고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데 익숙해진 아이들은 교사나 점원, 서로에게 똑같이 굴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알렉사로부터 배우게 될 ‘기술‘은 불친절이 될 것이다. - P309

한편 유엔은 2019년에 발표한 146쪽짜리 보고서에서 "여성화된 디지털 비서가 실제 여성과 융합되면서 잘못된 젠더 고정관념이 퍼질 위험성이 있다"면서 "여성과의 관계에서일방적인 명령조의 언어 표현이 일반적인 것이 되고 "86 적대적인 행동, 심지어 괴롭힘에도 순종적이고 회피적이며 심지어 애교스러운반응을 보이는 "유순하고 남을 기쁘게 하고 싶어 안달하는 도우미"라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 유엔 보고서는 "너는 난잡해You‘re a slut"라는 말에 대한 시리의 디폴트반응 가운데 하나인 "할 수만 있다면 얼굴을 붉혔을 거예요‘‘I‘d Blush If I Could‘를 제목으로 달았다.
더욱이 범죄학에서 수십 년간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섹스 인형이환상을 지우기보다는 오히려 ‘증폭시키며‘, 사용자가 현실 세계에서상대방의 ‘노‘라는 대답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성인용품과는 다른 문제다. 실물 같은 로봇인데 ‘노‘라고할 줄 모르고, 신체를 훼손하거나 학대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일부 남성에게 그릇된 환상을 심어줄 것"이라고 범죄학자 산테 말렛은 썼다. - P311

그리고 사회 전체 차원에서 우리가 남을 돌보는 행위를 더는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근본적인 뭔가를 상실하게 된다. 우리가 서로에게필요하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서로의 요구나 권리나 욕구를 존중하겠는가? 기계가 보살핌의 영역에서 인간을 대체하고 돌보미의 역할을 자처하는 세계는 포용적 민주주의, 호혜성, 연민, 돌봄과 같은 토대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세계다.
21세기에 점차 확대되어가는 외로움 위기에 기술이 줄 수 있는답은 제한적이다. 그리고 여기에도 다양한 위험이 수반된다. 가상 비서, 소셜 로봇, 심지어 섹스로봇도 개인적 차원에서의 외로움 완화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이러한 기술이 (그에 따른 이득이 경제적인 것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인간 사이의 접촉, 인간의 우정과 돌봄을희생하면서까지 도입되어서도 안 된다. 잠재적인 사회적 여파가 지나치게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실 현장에서 스크린이 아이들의 교육에 일익이 될 수는 있지만 결코 인간 교사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오히려 우리는 로봇공학, AI, 감성 AI의 발전을 우리 각자에 대한도전으로 여겨야 한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를높이고, 주변 사람을 더 잘 돌보고, 서로를 조금 더 보살피고, 남에게더 공감적이고 이타적이 되기 위한 도전, 언제나 로봇보다 더 인간적이기 위해 자기 자신의 한계를 밀어붙이는 도전, 그리고 어쩌면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로봇으로부터도 배우는 도전이 될 것이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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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1

뛰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추격 신에서는 누군가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거나 던져지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맨바닥에 부딪힌 그사람은 어느 정도 데굴데굴 구르다가 딱 멈춰서 벌떡 일어나 먼지를 툭툭 털어 낸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난 생각한다. ‘저거 완전 뻥이야. 달리는 차에서 내던져지면 저것보다 훨씬 더 아프다고‘ - P15

당시 나는 가톨릭 사립 학교 메리베일 칼리지 Maryvale College에 다니고 있었다. 매년 열리는 메리베일 운동회의 챔피언은 나였고, 엄마들중 챔피언은 바로 우리 엄마였다. 비결이 뭐냐고? 엄마는 늘 내 엉덩이를 걷어차려고 날 쫓아다녔고, 나는 걷어차이지 않기 위해 늘 도망 다녔으니까. 그 누구도 나와 엄마보다 빨리 달리지 못했다. 엄마는 ‘이리와서 좀 맞자‘는 식으로 매질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보단, 무료 배송으로 매질을 서비스하는 쪽이랄까. 또 물건을 집어던지는 데도 능숙했다. 무엇이든 엄마 옆에 있던 게 내 눈앞으로 날아오곤 했다. 그게 깨질 수 있는 물건이면 잡아서 고이 내려놔야 했다. 만약에 깨지기라도하면 그 역시 내 잘못이 되어 버리고 그럼 볼기짝이 훨씬 더 얼얼해질테니까. 엄마가 꽃병을 던지면, 나는 그걸 잡아서, 내려놓고, 다시 도망갔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생각해야 했다. ‘이거 중요한 물건인가? 그래. 깨질 수 있는 건가? 그래. 그럼 잡고, 내려놓고, 다시 도망가자!‘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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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주들이 우리의 직업적 미래를 알고리즘에 맡긴다면 앞으로우리가 공정하게 대우받거나 의미 있는 법적 대응 수단을 확보할 수있으리라고 확신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일단 한 개인의 미래 성과를 얼굴 표정이나 목소리 톤 같은 특징으로 예측할 수 있는가에 관해 논쟁이 첨예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9년 11월 잘 알려진 미국 공익연구기관인 전자개인정보센터는 미국 연방거래위원회에 하이어뷰를 정식으로 고소했다. 하이어뷰가 "증명되지 않은 은밀한 알고리즘을 이용해 입사 지원자의 "인지 능력", "심리적 특성", "정서 지능", "사회성"을 평가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편견 문제도 있다. 하이어뷰는 자사의 방법론은 인간적인 편견을 제거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이어뷰의 알고리즘은 과거에 촬영한 영상이나 이미 ‘성공한 직원‘을 토대 삼아 훈련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채용 과정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미 적용되었던 편견이 다시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 P240

우리는 쇼샤나 주보프가 ‘감시 자본주의의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에 산다.25 고용주가 항상 당신을 주시할 뿐만 아니라 AI와 빅 데이터와 사생활 침해가 심각한 각종 기기를 동원해 당신에 관한 온갖 판단을 내리는 시대. 승진이나 해고 같은 직장 경력의 중요한 행로를 결정하는, 이러한 판단들은 흔히 맥락이 생략된 자료에 근거하거나 주변 상황이 고려되지 않은 채 내려지곤 한다.
레이날다의 손목이 발갛게 부어올랐는데도 페덱스 관리자들이작업 속도를 늘리라고 주문한 것은 기계가 속도만 측정할 뿐 레이날다가 느끼는 통증은 측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형 감옥 같은 작업장 시대에 측정되지 않은 것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반면 측정된 것은 과도하게 중요하게 여겨진다.
물리적인 작업 공간을 벗어난다고 해서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것은 아니다. 워크스마트WorkSmart라는 앱은 스크린 캡처, 앱 모니터링, 키보드 입력 정보 검사 등을 통해 ‘집중도‘와 ‘강도‘를 기준으로 원격근무자들을 항상 점수화한다. 이런 앱들이 수년 전부터 인기를 끌고있다. 워크스마트의 감시를 받는 노동자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심지어 10분 간격으로 사진에 찍혀야 한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역시나 이런 추세도 심화되었다. 은행에서 보험 회사까지. 로펌에서 소셜 미디어 기업까지, 집에서 일하는 직원이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는지 걱정스러운 고용주들은 2020년 봄 감시 소프트웨어에 큰돈을 투자했다. 일부 원격 근무 감시 시스템 공급자들은 2020년 4월 판매량이 무려 300%나 성장했다. 직원이 사무실로 복귀하면 이 소프트웨어가 그들의 노트북에서 제거될까?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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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 점멸 다음에는 괴성이 찾아왔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수면이 흔들리고 바닥이 진동했다. 젖은 흙냄새가 물씬 쏟아졌다. 물은 젖은 육지에 마른 발을 댄 채로, 제게로 쏟아지는 흙더미를 바라봤다. 산이 흐르고 있었다. 그토록 높고 단단했던 산이 물처럼 흘렀다. 마을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의 비명과 웅성임과 후회도 함께 물의 귀에 닿았다.

[산사태입니다. 주민 여러분들은 모두 긴급히 대피를 하여 주시기•••]

방송은 지직이는 잡음과 함께 멎었다. 물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곳곳에서 굴러떨어진 흙더미와 바위가 하천을 메워 갔다. 하천이 없어지면 물귀신은 어떻게 되려나. 사라질까? 그렇게 원하던 끝이었는데 반갑지 않았다.

이영을 보고 싶었다. 쏟아지는 비와 흙과 돌 사이에서 물은 이영을 기다렸다. 이영은 분명 올 테니까. 빗줄기가 얼굴을 아프게 때려서 눈을 제대로 뜰수가 없었다. 물은 힘겹게 눈을 떴다. 탁하게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흰 손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여울." - P71

1

평소와 다름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김치콩나물국의 시큼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고,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간간이올렸다. 주연은 애꿎은 밥알을 괴롭히며 맞은편에앉은 엄마를 바라봤다. 국에 밥을 마는 손등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돋아 있었다.

"밥 안 먹고 뭐 해?"

엄마가 툭 물었다. 주연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되물었다.

"이 상황에서 멀쩡하게 식사하는 게 더 이상한거 아니야?"

엄마는 김치를 집어 올리며 답했다.

"안 될 건 뭐니?"

주연은 사각형 식탁 앞에 앉은 아빠를 가리켰다.
창백한 안색의 아빠는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빈 그릇에 헛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눈에 초점이라고는없었고, 그의 주위에서는 은은한 쉰내가 풍겨 왔다. 주연은 화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끓어오르는것을 꾹꾹 눌러 참고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 P75

"괜찮을 거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아 보였다. 당연히 울 줄 알았던 엄마는 울지 않았다. 이번엔 자신이 울 거 같아서 주연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옆에 눕는 엄마를향해 주연은 말했다.

"내 옆에 눕지 마. 내가 갑자기 좀비로 변할 수도있잖아. 내방 가서 자."
"상관없어. 좀비가 되면, 엄마 꼭 물어 줘."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진심이야. 꼭 물어야 해."
- P98

집안에 은은한 향내가 맴돌았다. 굿판이 끝난 뒤에 거대한 뱀의 시신은 나무 아래 묻혔다. 주연도 그저께, 제사를 지내자 바스라진 뱀의 가루를 엄마와 함께 동네 뒷산에 묻었다. 엄마가 텔레비전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라 망신이다. 저게 뭐 하는 짓이래니?"
"엄마도 제사 지냈으면서."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엄마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다음 주에는 네 아빠한테 다녀오자."

주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가 남긴 잇자국을 더듬었다. 그 잇자국은 꽤 오래 갔지만 분명하게 옅어졌고, 결국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었다. - P108

내가 떨어뜨린 비닐봉지를 주워 들었다. 안에는어머니가 먹고 싶다던 초밥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제일 좋아하던 연어 초밥과 새우 초밥을 꺼내 뒤틀린 그녀 앞에 두었다. 다행히 어머니의 눈은 감겨있었다. 만약 뜨여 있었다면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별로 좋아하지 않던 문어 초밥을 골라 입에 넣었다. 문어 초밥은 그녀가 왜 싫어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나는 초밥을 씹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더 빨리 집에 왔다면 달라졌을까?

내가 초밥을 사러 나가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전날 사과를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면 달라졌을까?

집안의 모든 과도를 버렸다면 달라졌을까?

어머니는 죽지 않고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을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는 상황이 바뀌지 않았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는 굳이 사과가 아니어도 언젠가 무슨 핑계로든 어머니를 찔렀을 것이다. 나 역시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언젠가 아버지를 죽였을 것이다. 동기나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언젠가는 벌어지고야 말 일이었던 것이다. 단지 그날이 오늘이었던 것뿐. 질긴 문어 초밥을 꼭꼭 씹어 삼키자 모든 미련이 사라졌다. 그리고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칼을 들어 내 목을 찔렀다.

사라져 가는 의식 사이로 들어서는 안 될 생각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상황이 조금만 달랐다면 누군가는, 기왕이면 어머니가 살 수는 있지 않았을까? - P113

처음엔 아버지가 집에 온 것이라 생각했다. 배가고파서 부엌을 뒤지다가 멀쩡해 보이는 초밥을 발견했겠지. 나는 좁은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아버지는 없었다. 만약 그사이에 다시 나갔다면 내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절대로 조용히 나가지않는다. 열려 있는 안방 너머로 모로 누워 잠든 어머니의 구부정한 등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사왔던 두 개의 초밥 상자 중 하나가 깨끗이 비워진채로 놓여 있었다. 마음에 작은 빛이 들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일어나 눈을 뜨면 다시 피 묻은 과도가 날 반기더라도, 기쁘게 내 목을 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 P127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다.
내가 바꾸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게 아니다.

나는 그제야, 어머니의 눈과 나의 눈을 보고서야,
누구를 막고 누구를 먼저 죽이든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제의 시발점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곳에 있었다. 이보다 훨씬 이전에 어머니가표정을 잃기 전, 아버지가 술을 마시기 전, 아버지의 회사가 망하기 전, 그리고 우리가 행복했을 때보다 더, 더, 더 전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그 두 명이 만나기 전에.

"이제 한 번 남았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나는 이제 진짜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어떤 확신이들었다. 나는 목소리에게 물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으로도 갈 수 있어?"
"당연하지."

목소리가 기다렸던 대답이란 듯이 깔깔깔 웃어댔다. - P136

터덜터덜 걷는 뒷모습을 붙잡고, 손수건을 건네주고, 손도 한 번 더 잡고, 기왕이면 입맞춤도 한 번더 하고, 그럴 생각에 나는 설렜다. 이윽고 골목의코너를 돌았을 때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듬직한 뒷모습이 아닌, 목에 칼이 박힌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찬석이었다.

찬석은 목에 박힌 칼을 붙잡은 모습으로 정지해있었다. 멀겋게 눈을 뜬 채였다. 검은 눈동자로 찬석의 붉은 피가 비쳤다. 찬석이 뽑지 못한 칼을 뽑은 것은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검은 옷의 남자였다. 남자는 꺾인 찬석의 목을 쥐고 칼을 쏙 뽑았다. 칼이 뽑혀 푹 꺾인 머리는 부서진 마네킹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남자는 그 모든 걸 지켜보고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것도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도망을 가는 것도, 경찰을 부르는 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모든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는 우는 것 같이 웃었다. 찬석을 찌른 칼로 나 역시 찌를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이게 마지막이에요."

뒤돌아 골목길을 뛰어가는 남자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무엇이 마지막이라는 것인지, 무엇이 다행이라는 것인지,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남자가 뛰는 발소리를 알았다. 그 숱한 밤, 나를 따라오던 골목길의 발걸음. 나의 스토커. 그가 결국 찬석을 죽였다.

그리고 모든 게 암흑인 상태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기회는 세 번이야. 시간을 되돌려 줄까?" - P132

다음 날 나는 그들이 지나가는 골목 어딘가에 몸을 숨겼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을 잡고 서로 <작은별>을 한 소절씩 나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아, 이노래.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추운 밤거리를 배회하며부르던 노래. 이 노래도 결국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불러 주는 노래였던가. 서로의 미래를 모르고마냥 행복해하는 그들이 안쓰럽고, 부러웠다. 부럽고 슬펐다. 너무 슬퍼서, 나는 그 좁은 골목 틈에서어머니를 데려다주고 홀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울었다. 젊은 아버지를 마주할 때까지 계속울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된 거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왜 이때처럼 계속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 없었던 거지.
이렇게나 반짝반짝 빛나던 그들이었는데. 품 안의 과도를 버릴까 고민하던 그때, 쭈그려 앉아 있던 나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맑고 반짝반짝한, 작은 별이 박힌 동공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추운데, 괜찮으세요?"

아, 나의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나의 젊은 아버지는 어머니 말씀대로 좋은 사람이 맞았다.

그리고 나는 품속의 칼을 고쳐 잡았다. - P149

아이가 어릴 적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부르던이름인데, 언제부터인가 부르지 않게 되었다. 부르지 않았다기보다는 부르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것이다. 아마 아이의 키가 점점 커지고, 얼굴의 윤곽이 잡혀 가면서부터였다. 나는 차마 그 아이를 우리들의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었다. 커가는 아이의얼굴이 점점 ‘검은 옷의 남자‘의 얼굴이 되어 갔기때문이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세 번이나 찬석을 죽이려했고 그중에 두 번은 진짜로 죽였으며, 결국 한 번은 내가 죽였던 그 얼굴을. 내 눈앞에서 홀연히 증발해 버린 그 남자를. 우리의 아이가 그 남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얼굴은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어 가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나는 아이를 사랑했지만 아이를 바라볼 수 없었고 우리의이름으로 부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않았다. 아이를 보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았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에서 도망치려면, 외면하는 수밖에없었다.

역시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오늘 문득, 모든것이 귀찮아졌다. 찬석은 이미 내가 사랑했던 찬석이 아니고 나 역시 그때의 내가 아닌데 아무렴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내가 사람을 죽여서까지 지켜냈던 나의 사랑이, 삶을 견디지 못하고저 아래로 곤두박질쳐 바닥을 기는 것을 지켜보는것도 너무 힘들었고 끔찍한 남자의 얼굴을 한 사랑하는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데에도 질렸다.  - P155

그리고 마침내 이성이 나간 찬석이 마구잡이로그것을 휘두르다 내 목을 그어 버린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의 얼굴이 왜 아이의 얼굴인지, 나는 왜 그때 엉엉 울었는지, 아이가 왜 과거의 찬석을 죽이려고 했는지, 왜 그 자신이 사라지고 말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닥은 이미 내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흥건하다.
찬석의 표정을 보고 싶은데 고개를 들 수 없다. 멀리서 아이가 초밥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의식이 점점 흐려진다. 아이와 초밥을 함께 먹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세 번의 기회를 다 써 버렸기 때문에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수십 년 만에 머릿속에서 울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는 깔깔깔, 하고 웃는다.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지지. 깔깔깔."

나는 눈을 감는다.

아이가 현관을 들어오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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