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 점멸 다음에는 괴성이 찾아왔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수면이 흔들리고 바닥이 진동했다. 젖은 흙냄새가 물씬 쏟아졌다. 물은 젖은 육지에 마른 발을 댄 채로, 제게로 쏟아지는 흙더미를 바라봤다. 산이 흐르고 있었다. 그토록 높고 단단했던 산이 물처럼 흘렀다. 마을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의 비명과 웅성임과 후회도 함께 물의 귀에 닿았다.
[산사태입니다. 주민 여러분들은 모두 긴급히 대피를 하여 주시기•••]
방송은 지직이는 잡음과 함께 멎었다. 물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곳곳에서 굴러떨어진 흙더미와 바위가 하천을 메워 갔다. 하천이 없어지면 물귀신은 어떻게 되려나. 사라질까? 그렇게 원하던 끝이었는데 반갑지 않았다.
이영을 보고 싶었다. 쏟아지는 비와 흙과 돌 사이에서 물은 이영을 기다렸다. 이영은 분명 올 테니까. 빗줄기가 얼굴을 아프게 때려서 눈을 제대로 뜰수가 없었다. 물은 힘겹게 눈을 떴다. 탁하게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흰 손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여울." - P71
1
평소와 다름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김치콩나물국의 시큼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고,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간간이올렸다. 주연은 애꿎은 밥알을 괴롭히며 맞은편에앉은 엄마를 바라봤다. 국에 밥을 마는 손등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돋아 있었다. "밥 안 먹고 뭐 해?"
엄마가 툭 물었다. 주연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되물었다.
"이 상황에서 멀쩡하게 식사하는 게 더 이상한거 아니야?"
엄마는 김치를 집어 올리며 답했다.
"안 될 건 뭐니?"
주연은 사각형 식탁 앞에 앉은 아빠를 가리켰다. 창백한 안색의 아빠는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빈 그릇에 헛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눈에 초점이라고는없었고, 그의 주위에서는 은은한 쉰내가 풍겨 왔다. 주연은 화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끓어오르는것을 꾹꾹 눌러 참고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 P75
"괜찮을 거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아 보였다. 당연히 울 줄 알았던 엄마는 울지 않았다. 이번엔 자신이 울 거 같아서 주연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옆에 눕는 엄마를향해 주연은 말했다.
"내 옆에 눕지 마. 내가 갑자기 좀비로 변할 수도있잖아. 내방 가서 자." "상관없어. 좀비가 되면, 엄마 꼭 물어 줘."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진심이야. 꼭 물어야 해." - P98
집안에 은은한 향내가 맴돌았다. 굿판이 끝난 뒤에 거대한 뱀의 시신은 나무 아래 묻혔다. 주연도 그저께, 제사를 지내자 바스라진 뱀의 가루를 엄마와 함께 동네 뒷산에 묻었다. 엄마가 텔레비전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라 망신이다. 저게 뭐 하는 짓이래니?" "엄마도 제사 지냈으면서."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엄마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다음 주에는 네 아빠한테 다녀오자."
주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가 남긴 잇자국을 더듬었다. 그 잇자국은 꽤 오래 갔지만 분명하게 옅어졌고, 결국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었다. - P108
내가 떨어뜨린 비닐봉지를 주워 들었다. 안에는어머니가 먹고 싶다던 초밥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제일 좋아하던 연어 초밥과 새우 초밥을 꺼내 뒤틀린 그녀 앞에 두었다. 다행히 어머니의 눈은 감겨있었다. 만약 뜨여 있었다면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별로 좋아하지 않던 문어 초밥을 골라 입에 넣었다. 문어 초밥은 그녀가 왜 싫어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나는 초밥을 씹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더 빨리 집에 왔다면 달라졌을까? 내가 초밥을 사러 나가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전날 사과를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면 달라졌을까?
집안의 모든 과도를 버렸다면 달라졌을까?
어머니는 죽지 않고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을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는 상황이 바뀌지 않았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는 굳이 사과가 아니어도 언젠가 무슨 핑계로든 어머니를 찔렀을 것이다. 나 역시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언젠가 아버지를 죽였을 것이다. 동기나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언젠가는 벌어지고야 말 일이었던 것이다. 단지 그날이 오늘이었던 것뿐. 질긴 문어 초밥을 꼭꼭 씹어 삼키자 모든 미련이 사라졌다. 그리고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칼을 들어 내 목을 찔렀다.
사라져 가는 의식 사이로 들어서는 안 될 생각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상황이 조금만 달랐다면 누군가는, 기왕이면 어머니가 살 수는 있지 않았을까? - P113
처음엔 아버지가 집에 온 것이라 생각했다. 배가고파서 부엌을 뒤지다가 멀쩡해 보이는 초밥을 발견했겠지. 나는 좁은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아버지는 없었다. 만약 그사이에 다시 나갔다면 내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절대로 조용히 나가지않는다. 열려 있는 안방 너머로 모로 누워 잠든 어머니의 구부정한 등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사왔던 두 개의 초밥 상자 중 하나가 깨끗이 비워진채로 놓여 있었다. 마음에 작은 빛이 들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일어나 눈을 뜨면 다시 피 묻은 과도가 날 반기더라도, 기쁘게 내 목을 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 P127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다. 내가 바꾸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게 아니다.
나는 그제야, 어머니의 눈과 나의 눈을 보고서야, 누구를 막고 누구를 먼저 죽이든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제의 시발점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곳에 있었다. 이보다 훨씬 이전에 어머니가표정을 잃기 전, 아버지가 술을 마시기 전, 아버지의 회사가 망하기 전, 그리고 우리가 행복했을 때보다 더, 더, 더 전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그 두 명이 만나기 전에.
"이제 한 번 남았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나는 이제 진짜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어떤 확신이들었다. 나는 목소리에게 물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으로도 갈 수 있어?" "당연하지."
목소리가 기다렸던 대답이란 듯이 깔깔깔 웃어댔다. - P136
터덜터덜 걷는 뒷모습을 붙잡고, 손수건을 건네주고, 손도 한 번 더 잡고, 기왕이면 입맞춤도 한 번더 하고, 그럴 생각에 나는 설렜다. 이윽고 골목의코너를 돌았을 때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듬직한 뒷모습이 아닌, 목에 칼이 박힌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찬석이었다.
찬석은 목에 박힌 칼을 붙잡은 모습으로 정지해있었다. 멀겋게 눈을 뜬 채였다. 검은 눈동자로 찬석의 붉은 피가 비쳤다. 찬석이 뽑지 못한 칼을 뽑은 것은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검은 옷의 남자였다. 남자는 꺾인 찬석의 목을 쥐고 칼을 쏙 뽑았다. 칼이 뽑혀 푹 꺾인 머리는 부서진 마네킹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남자는 그 모든 걸 지켜보고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것도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도망을 가는 것도, 경찰을 부르는 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모든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는 우는 것 같이 웃었다. 찬석을 찌른 칼로 나 역시 찌를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이게 마지막이에요."
뒤돌아 골목길을 뛰어가는 남자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무엇이 마지막이라는 것인지, 무엇이 다행이라는 것인지,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남자가 뛰는 발소리를 알았다. 그 숱한 밤, 나를 따라오던 골목길의 발걸음. 나의 스토커. 그가 결국 찬석을 죽였다.
그리고 모든 게 암흑인 상태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기회는 세 번이야. 시간을 되돌려 줄까?" - P132
다음 날 나는 그들이 지나가는 골목 어딘가에 몸을 숨겼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을 잡고 서로 <작은별>을 한 소절씩 나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아, 이노래.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추운 밤거리를 배회하며부르던 노래. 이 노래도 결국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불러 주는 노래였던가. 서로의 미래를 모르고마냥 행복해하는 그들이 안쓰럽고, 부러웠다. 부럽고 슬펐다. 너무 슬퍼서, 나는 그 좁은 골목 틈에서어머니를 데려다주고 홀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울었다. 젊은 아버지를 마주할 때까지 계속울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된 거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왜 이때처럼 계속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 없었던 거지. 이렇게나 반짝반짝 빛나던 그들이었는데. 품 안의 과도를 버릴까 고민하던 그때, 쭈그려 앉아 있던 나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맑고 반짝반짝한, 작은 별이 박힌 동공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추운데, 괜찮으세요?"
아, 나의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나의 젊은 아버지는 어머니 말씀대로 좋은 사람이 맞았다.
그리고 나는 품속의 칼을 고쳐 잡았다. - P149
아이가 어릴 적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부르던이름인데, 언제부터인가 부르지 않게 되었다. 부르지 않았다기보다는 부르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것이다. 아마 아이의 키가 점점 커지고, 얼굴의 윤곽이 잡혀 가면서부터였다. 나는 차마 그 아이를 우리들의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었다. 커가는 아이의얼굴이 점점 ‘검은 옷의 남자‘의 얼굴이 되어 갔기때문이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세 번이나 찬석을 죽이려했고 그중에 두 번은 진짜로 죽였으며, 결국 한 번은 내가 죽였던 그 얼굴을. 내 눈앞에서 홀연히 증발해 버린 그 남자를. 우리의 아이가 그 남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얼굴은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어 가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나는 아이를 사랑했지만 아이를 바라볼 수 없었고 우리의이름으로 부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않았다. 아이를 보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았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에서 도망치려면, 외면하는 수밖에없었다.
역시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오늘 문득, 모든것이 귀찮아졌다. 찬석은 이미 내가 사랑했던 찬석이 아니고 나 역시 그때의 내가 아닌데 아무렴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내가 사람을 죽여서까지 지켜냈던 나의 사랑이, 삶을 견디지 못하고저 아래로 곤두박질쳐 바닥을 기는 것을 지켜보는것도 너무 힘들었고 끔찍한 남자의 얼굴을 한 사랑하는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데에도 질렸다. - P155
그리고 마침내 이성이 나간 찬석이 마구잡이로그것을 휘두르다 내 목을 그어 버린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의 얼굴이 왜 아이의 얼굴인지, 나는 왜 그때 엉엉 울었는지, 아이가 왜 과거의 찬석을 죽이려고 했는지, 왜 그 자신이 사라지고 말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닥은 이미 내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흥건하다. 찬석의 표정을 보고 싶은데 고개를 들 수 없다. 멀리서 아이가 초밥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의식이 점점 흐려진다. 아이와 초밥을 함께 먹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세 번의 기회를 다 써 버렸기 때문에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수십 년 만에 머릿속에서 울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는 깔깔깔, 하고 웃는다.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지지. 깔깔깔."
나는 눈을 감는다.
아이가 현관을 들어오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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