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가지 않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죽은 자와 산 자가 자리바꿈하는 날이 오리라. 숲은 움직이게 되리라. 우리에겐 희망이 없지 않다. 많은 경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심각한 범죄들은 미결로 남으리라. 마찬가지로 우리 삶 어딘가에 미결의 위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지만 오늘은 다른 숲, 밝은 숲을걷는다. 노래하고 꿈틀대고 꼬리 흔들고 기는 모든 생명들!
봄이 왔고 공기가 무척 강렬하다. 나는 망각의 대학을 졸업을 하였고, 빨랫줄 위의 셔츠처럼 빈손이다. (<소곡> 전문) - P282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아마 수많은 대답이 나올 겁니다. 문학은 그만큼 복잡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태도‘입니다. 최근 시인 이성복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선생께서도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축구선수가 찬 공은 발의 각도를 그대로 가지고 날아간다. 공이 작품이라면 발은 정신이다." 이 ‘정신‘을 다른 말로 ‘태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제게는 이상과 김수영이 삶과 문학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김수영의 태도를 한마디로 ‘정직‘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럴듯한 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무엇을보태어 시를 꾸며내는 일을 그는 혐오했습니다. 그런 사기를 김수영은 포즈(pose)라고 불렀습니다. 포즈는 사진을 찍을 때만 인위적으로 취하는 자세니까요.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도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이다."(<요동하는 포즈들>)
"진지성이다. 포즈 이전에 그것이 있어야 한다. 포즈의 밑바닥에 그것이 깔려 있어야 한다."(<포즈의 폐해>) 그래서 김수영은 포즈를 버리고 자신의 옹졸함과 폭력성을 시로 썼습니다. 자기 자신을 폭로하는 시 쓰기가 읽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율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입증한 사람이 바로 김수영입니다. - P305

급기야 3연에서는 인과관계 자체가 소멸된다. 1연에서 풀은바람보다 늦었지만 2연에서 풀은 바람을 앞섰다. 3연의 핵심 구절에는 이 두 방향이 뒤섞여 있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이렇게 인과가 해체되면 ‘풀이 운다‘라고 생각할 이유는 또뭐겠는가. 마침내 화자는 풀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흐린 하늘과 눕는 풀을 원경으로 보여주는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제 비관주의만은 아닌 어떤 것이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시는 여기서끝나지만, 그 시작은 삶에서 계속 실험될 것이었다. 그러나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 실험은 중단되고 말았다.
당대 한국 사회의 후진성에 절망하지 않으려고 고투했던 김수영은 풀에 자신의 절망을 투영했다가 풀로부터 다시 희망을 길어 올린다.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 P311

-부기
이후 2018년에 출간된 개정판 《김수영 전집》(민음사)에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적었다.

"시인 김수영은 한국시사에 최소 두 개의 시학적 발명품을 선사했다. 비속한 일상어로도 계시적 효과를 거두는 기술, 그리고 카오스모스에 가까운 시적 구조로 역동적인 난해함을 창출하는 기술, 시를 쓰는 데에만 사용된 기술이 아니다. 일상적 시어는 제 자신의 속물성을 적발하고고백함으로써 나날이 거듭나려 했던 그의 사인(私人)적 고투의 반영이고 카오스모스적 구조는 한국 사회가 억압적인 질서정연함이 아니라해방적인 혼란으로 가득하기를 바랐던 그의 무한 자유를 향한 시민적신앙의 반영이었다. 그는 각각을 ‘죽음의 연습‘과 ‘사랑의 변주‘라 불렀는데, 이는 4.19에서 목격한 빛을 5.16 이후의 동굴 속에서도 끝내 잊지 않기 위해 그가 연마한 존재의 기술이기도 했다. 다시 온 세상이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오기를 바랐던 그의 희망은 1987년과 2017년의 시민혁명으로 실현됐으니, 과연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에게서 배운다. 그러나 아무리 배우고 또 배워도 언제나 새로운 그를 누구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리라. 이 시인.• 사인 • 시민의 성(聖)삼위일체를 우리는 ‘김수영‘이라고 부른다." - P312

둘째, 왜 정확한 칭찬인가. 칭찬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서 하는 일이 아니다. 칭찬은, 칭찬의 대상에게도 그렇지만 칭찬의 주체에게도 위험할 수 있는 일이다. 부정확한 비판이 분노를 낳는다면 부정확한 칭찬은 조롱을 산다. 어설픈 예술가만이 정확하지 않은 칭찬에도 웃는다. 진지한 예술가들은 정확하지 않은 칭찬을 받는 순간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칭찬은 자신이 칭찬한 작품과 한 몸이 되어 함께 세월을 견디고 나아간다. 그런 칭찬은 작품의 육체에 가장 깊숙이 새겨지는 문신이 된다. 지워지지도 않고 지울 필요도 없다. - P324

모든 관계는 일종의 교환이라는 생각이 출발점이었다. 사랑도 하나의 관계라면, 사랑 안에서도 모종의 교환이 이루어지고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여타의 관계와는 다른, 사랑 고유의 교환 구조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결여의 교환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결여를 갖고 있다. 부끄러워서 대개는감춘다. 타인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그의 결여를 발견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의 결여가 못나 보여서 등을 돌리게 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여 때문에 그를 달리 보게 되는 일. 그발견과 더불어, 나의 결여가 사라졌으면 싶은 어떤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의 결여와 나누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내가 아니면그의 결여를 이해할 사람이 없다 여겨지고, 그야말로 내 결여를 이해해줄 사람으로 다가온다. 결여의 교환 구조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로 만들었으니, 두 사람은 이번 생을 그 구조 안에서 견뎌나갈 수 있으리라. 말하자면 이런 관계가 있지 않을까. 있다면, 바로 그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 P332

그 이후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위 논의를 보완하고 싶어졌다. ‘사랑의 관계 속으로 진입할 때 나에게 생기는 변하는 어떤 것일까? 흔히 다시 태어난다고들 하는데, 새로 태어난 나는 이전의 나와 어떻게 다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완전함‘과 ‘온전함‘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으나, 영어의 ‘perfect‘(완벽)와 ‘complete‘(완성)사이에도 어감의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하기로하자.) 사랑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해서 내 결여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여가 없다는 의미에서의 ‘완전한 사람이될 수는 없다. 그러나 상대방을 통해서 내 결여와 새로운 관계를맺을 수는 있다. 내 결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과 더불어살아가는 관계. 결여가 더는 고통이 아닌 생, 그런 생을 살 수 있게 된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지금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그와 함께있을 때, 나는 더 온전해진다.‘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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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없다. 내가 이 글을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마땅히붙일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별로 없고 결말이 죽음이나 결혼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며 따라서 포괄적인 결론이다. 결혼 역시꽤 괜찮은 마무리 방식이지만, 고상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해피엔딩이라 부르는 것을 비웃어야 한다고 경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결혼으로써 이제 필요한 이야기는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본능이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면 그들은 생물학적 임무를 완수한 셈이고 이제 관심은 그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그러나 나는 독자들에게 정해진 결론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이따금 만나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한 남자를 회상한 내용이다. 나는 그가 나와 만나지 않았던 기간에는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 거의 아는 바가없다. 나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기간에 있었을 법한 일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 좀 더 조리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단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이야기를 쓰고 싶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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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청준이 암시하듯 예언이 동시대의 사회역사적 진리에 대한 통찰이자 그 통찰에 대한 헌신일 수있다면, 우리 문학사에서 그런 예언자를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올해 50주기를 맞은 김수영이야말로 그에 부합하는 사례일 수 있다. 김수영 자신은 "나는 사후 백 년 후에 남을 시를 쓰려고 노력할 수는 없지만, 작품이 끝난 후 반년 정도의 앞을예언할 만한 시를 쓰고 싶다"(<시작 노트 2>)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지나치게 겸손했던 것이 아닐까.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사랑의 변주곡>) 이를테면 이런 구절은 1980년 5월, 1987년 6월, 그리고 2017년 겨울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는 없겠는가. - P196

물론 다른 이들도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서 입신출세한 사람을 선망은 할 수 있어도 존경까지 할 필요는없다.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그 고통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사람,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자신의 안락을 포기한 사람들만을 존경한다. 나는 우리의 대통령이 부디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혹자는 성품이 아니라 능력을 봐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성품이나 능력이냐‘라는 물음은 잘못된 양자택일이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능력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성품이 곧 능력이다. 이 판단이 정치적으로는 매우 순진한 것일 수있음을 안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고만 싶다.
환상을 품고 있지는 않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구세주가 될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삶이 오늘의 그를 믿게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과 그것을 차마 외면하지못하는 능력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치명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귀 기울일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말을, 반값 임금에 혹사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말을, 차별당하는 소수자들의 말을. 그 고통을 알겠어서, 차마 도망칠 수 없어서,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 대통령(大統領)이 대통령(大痛靈)이면, 우리 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2017.5.4) - P203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에 따르면 ‘인간‘과 ‘사람‘은 다르다. 인간은 그냥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고 사람은 ‘사회적 인정‘의 문제라는 것. 한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31쪽) 우리 사회가 장년층·노년층을 사회적 인정의 장에서 배제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고 삶의 의미를 생산해내는 거대한 발전소를 만든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기만 할까. ‘사회적 인정‘의 영역에서도 복지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는 날들이다. - P211

첫째, 대상이 ‘강자인가 약자인가‘는 오래된 기준 중 하나다.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강자를 대상으로 할 때에만 풍자다. 그때 그 일은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폭로하는 숭고한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적 권력자와 단순한 유명인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권력자는 대개 유명인이지만, 유명인이 연제나 권력자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나에게 위해를 가할수 있는 사람이 권력자라면, 직업의 성격상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졌을 뿐인 사람은 유명인이다. 유명인을 향한다고 해서 조롱이 풍자로 변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매체 환경 속에서 실명이노출된 유명인과 익명의 보호를 받는 네티즌 중에서 누가 더 강자인가 유명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
둘째, 대상의 속성이 ‘선택인가 조건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권력자의 판단과 행위와 그 결과가 광범위하고 부정적인 대중적 영향을 끼쳤을 때, 그의 그런 ‘선택‘과 관련된 사항들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가 스스로 선택한바 없는 자신의 ‘조건‘은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 장애인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걸음걸이를 문제 삼는 일은 비판도 풍자도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여전한 권력자이고 박근혜 현 대통령은 그야말로 권력자다. 그러나 누가 그들의 판단과 행위와 그 결과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외모와 성별을 웃음거리로 만든다면 그 대상이 아무리 권력자라 해도 그 행위는 비열하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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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밀은 부자들에게 소득세 감면 혜택을 줬던 반면, 상속세에 대해서는 다소 엄격했다. 그는 여러 철학 및 경제학 저술들에서 ‘결과의 균등 equality of results‘보다는 ‘기회의 균등 equal opportunity‘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부모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 대해 불공평한 우위를 점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은 땀을 흘려 더 많은 부를 창출하려고 하기보다는 부모가 가지고 있는 부에 안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밀은 소득세에 대해서는신중하고 느슨했던 반면, 상속세 inheritance tax에 대해서는 엄격했을까? 밀은 누진세와 달리 상속세에 높은 세금을 물린다고 해서 그것이 노동의욕을 떨어뜨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상속 재산은 상속받는자가 직접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공공선publicgood을 위해 제한을 받아야 한다""고 썼다. - P225

그러나 밀의 구제 수당은 이보다도 훨씬 더 엄격했다. 그는 구제 수당을 받는 빈민들(특히 신체 건강한 빈민들)의 노동 의욕을 고취시키기위해 그들이 구제 수당을 받는 대가로 수행하는 노동, 즉 공공근로가일반 노동자의 노동보다 더 고역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가오늘날 시행되는 재교육 프로그램을 생각해내지는 못했지만, 밀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는 구제 수당이 너무 쉽게 분배될 경우, 구제 수당을 받는 가난한가정의 자식들이 신성한 노동 윤리work ethic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있다고 우려했다. 뿐만 아니라 구제 수당이 너무 많으면 빈민들의 출생률만 높일 뿐 생활 조건 향상에 크게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입장에서 밀은 구제 수당이나 임금을 높이자는 사회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정책들은 반대했다. 이제 밀에게 남은 일은 자신의 규범적인 정책들을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모델로 제시하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아버지의 조기 교육의 쓰라린 기억을 되새겼다. 비록 그가 조기 교육의 희생자이기는 했지만,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알고보면 그런 엄격한 교육의 힘이었다. 이런 경험에 기초해 그는 빈민들에 대한 공교육을 지지했다. 당연히 밀에게 있어서 교육은 단지 읽고, 쓰는 능력을 키우거나 기본 셈을 위해 필요한 산수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설득하는 것도 교육적 측면에서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의무 중 하나는 상업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든시민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뒤에 독일 태생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는 이것을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 Protestant work ethic" (또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라 불렀는데, 이런 윤리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후천적으로 반복 학습되어야 몸에 익힐 수 있다. 혹시라도 노동 윤리라고 하는 것이 선천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가혹한 말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언젠가는 구빈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을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P231

자유방임 정책과 정부의 개입 정책에 대한 밀의 입장을 살펴보는 일은 몇 권의 책을 써도 모자란다. 그래도 간략히 요약하면, 밀은 한쪽에치우치기보다는 두 입장 사이에서 최대한 중립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극단적인 자유방임주의의 입장을 거부했던 그는 자유방임의 기본 전제만을 받아들였다. 반편, 정부의 개입에 대해서는 더 큰 행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경우에 한에서만 인정했다. 밀은 "더 큰 선이 필요로 하지도 않는데, 자유방임을 포기하는 것은 확실히 악이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과세, 화폐 발행, 국방, 법질서 확립 등 국가가 개입해서해야 할 일들이 분명이 있다. 하지만 소비자 보호, 교육, 그리고 사업규제 같은 것들은 국가가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 분야들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선택적 optional‘ 기능들은 각각의 경우에 따라 개입을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밀은 국가복지보다는 사적인 자선 사업을 선호했지만, 이런 자선 사업이 부분적인 성공 밖에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누가 한 푼이라도 더 준다면 좋아하겠지만, 부자들이 직접 나서서 그렇게 할 가능성은 거의없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무임승차free-rider‘ 효과 때문인데, 무임승차란 자신은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해 놓은 일에 편승해 같은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밀은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하기 위해 과세의 힘 taxing power 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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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에는 몇 가지 가치가 있는데, 이를 인식적 · 미학적·정서적 가치로 명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치들의 우열 관계가 시대별로 어떻게 변동하는지를 통시적으로 말해볼 수도 있겠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시대에 사람들은 소설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한다. 그 시대가 저물면 그 반작용처럼 소설의 ‘미학적 본질에 관심을 기울이는 때가 온다. 그런가 하면 요즘처럼 멘토 · 공감 · 힐링 등의 어휘가 유행하는 시절에는 소설도 그런 ‘정서적 맥락에서 많이 읽힌다. 이런 식으로 그 상대적 우열 관계가 변하며 소설의 특정 가치는 주목되거나 간과되거나 한다. - P166

저자이기도 한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1962)라는 글에서 이런 대답을 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 P173

소설가 김연수가 적어놓은 문장이다. 먼저 ‘쓰기‘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진다." 《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 221~222쪽) 인간은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신호를 다섯 배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그러므로 한 번 비난을 받으면 다섯 번 칭찬을 받아야 마음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을 긍정하는 일인 것이어서 그덕분에 우리 존재가 실제로 바뀔 수 있다는 것 등이 그의 체험적결론이다.
그리고 ‘읽기‘에 대해 그는 ‘무용한 독서‘의 소중함을 말하는 와중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들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우리가 보낸 순간·시>, 287쪽) 읽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후배로서 선배의 결론은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정말 그럴까? 읽고 쓰는 일만으로 우리는 점점 더 좋은사람이 될 수 있을까? - P175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고유명사를 줄여 ‘이명박근혜‘라고부르지만 이를 다시 세 글자로 줄이면 ‘박정희‘가 된다. 과감히 말하자면 두 사람은 박정희의 두 가면을 각기 쓰고 권좌에 올랐다. 박정희 신화가 가진 두 얼굴은, 공세(勢)적 개발주의자의 얼굴과, 가진 것은 애국심뿐인 고독한 단독자의 얼굴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독재자의 낮과 밤이었다. 그러나 두 전직 대통령이 실제로 행한 것에는 더 정확한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 그것을 ‘물신 정치‘와 ‘공작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물신 정치를 상징하는 사건은 용산참사와 4대강사업이다.
이 물신 정치는 ‘인간‘과 ‘생태‘라는 최상위 가치에 대한 몰이해와 거부감에 기초한 폭력적 성과주의다. 그 과실은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몫이었을지언정 국민의 것은 아니었다. 박근혜의 공작정치를 상징하는 것은 물론 세월호참사와 블랙리스트다. 세월호참사는 사실상 ‘죽게 내버려둔‘ 결과를 낳았고 블랙리스트의 본질은 ‘내버려두지 않고 죽이는‘ 데 있었다. 전자로 육체가 수장됐고 후자로 상상력이 검열됐다. 그들은 전자를 무릅쓰고라도 후자에 몰두하는 것, 즉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좌파를 척결하여‘ 냉전 왕국을 부활시키는 것만이 애국이라고 믿은 시대착오적 편집증자들이었다. - P186

 지난 5.18 민주화운동 37주년기념식에서 1980년 5월 18일에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어야했던 김소형 씨의 편지 낭독이 끝나자 문재인 대통령은 무대를 내려가는 그를 돌려세워 안아주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다시피 이는 단지 감동적인 순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부의 정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사망자 ○○○명‘이라는 통계 자료의 추상 속에서 느껴지지 않는 고통을 개별화해내서 그 개별적 고통들에 성실히 응답하는 정치, 그것이 현실의 모든 고통들에 대해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정치의 목표로 설정될 수는 있겠다는 희망을 품은 것만도 오랜만이었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지난 9년 동안 두 전직 대통령에게 결여돼 있는 능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실감이며, 사람이 사람을 위해 행하는 ‘정치‘라는 과업이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고양시키는 데 기여할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확신이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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