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에는 몇 가지 가치가 있는데, 이를 인식적 · 미학적·정서적 가치로 명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치들의 우열 관계가 시대별로 어떻게 변동하는지를 통시적으로 말해볼 수도 있겠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시대에 사람들은 소설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한다. 그 시대가 저물면 그 반작용처럼 소설의 ‘미학적 본질에 관심을 기울이는 때가 온다. 그런가 하면 요즘처럼 멘토 · 공감 · 힐링 등의 어휘가 유행하는 시절에는 소설도 그런 ‘정서적 맥락에서 많이 읽힌다. 이런 식으로 그 상대적 우열 관계가 변하며 소설의 특정 가치는 주목되거나 간과되거나 한다. - P166

저자이기도 한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1962)라는 글에서 이런 대답을 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 P173

소설가 김연수가 적어놓은 문장이다. 먼저 ‘쓰기‘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진다." 《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 221~222쪽) 인간은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신호를 다섯 배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그러므로 한 번 비난을 받으면 다섯 번 칭찬을 받아야 마음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을 긍정하는 일인 것이어서 그덕분에 우리 존재가 실제로 바뀔 수 있다는 것 등이 그의 체험적결론이다.
그리고 ‘읽기‘에 대해 그는 ‘무용한 독서‘의 소중함을 말하는 와중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들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우리가 보낸 순간·시>, 287쪽) 읽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후배로서 선배의 결론은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정말 그럴까? 읽고 쓰는 일만으로 우리는 점점 더 좋은사람이 될 수 있을까? - P175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고유명사를 줄여 ‘이명박근혜‘라고부르지만 이를 다시 세 글자로 줄이면 ‘박정희‘가 된다. 과감히 말하자면 두 사람은 박정희의 두 가면을 각기 쓰고 권좌에 올랐다. 박정희 신화가 가진 두 얼굴은, 공세(勢)적 개발주의자의 얼굴과, 가진 것은 애국심뿐인 고독한 단독자의 얼굴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독재자의 낮과 밤이었다. 그러나 두 전직 대통령이 실제로 행한 것에는 더 정확한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 그것을 ‘물신 정치‘와 ‘공작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물신 정치를 상징하는 사건은 용산참사와 4대강사업이다.
이 물신 정치는 ‘인간‘과 ‘생태‘라는 최상위 가치에 대한 몰이해와 거부감에 기초한 폭력적 성과주의다. 그 과실은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몫이었을지언정 국민의 것은 아니었다. 박근혜의 공작정치를 상징하는 것은 물론 세월호참사와 블랙리스트다. 세월호참사는 사실상 ‘죽게 내버려둔‘ 결과를 낳았고 블랙리스트의 본질은 ‘내버려두지 않고 죽이는‘ 데 있었다. 전자로 육체가 수장됐고 후자로 상상력이 검열됐다. 그들은 전자를 무릅쓰고라도 후자에 몰두하는 것, 즉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좌파를 척결하여‘ 냉전 왕국을 부활시키는 것만이 애국이라고 믿은 시대착오적 편집증자들이었다. - P186

 지난 5.18 민주화운동 37주년기념식에서 1980년 5월 18일에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어야했던 김소형 씨의 편지 낭독이 끝나자 문재인 대통령은 무대를 내려가는 그를 돌려세워 안아주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다시피 이는 단지 감동적인 순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부의 정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사망자 ○○○명‘이라는 통계 자료의 추상 속에서 느껴지지 않는 고통을 개별화해내서 그 개별적 고통들에 성실히 응답하는 정치, 그것이 현실의 모든 고통들에 대해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정치의 목표로 설정될 수는 있겠다는 희망을 품은 것만도 오랜만이었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지난 9년 동안 두 전직 대통령에게 결여돼 있는 능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실감이며, 사람이 사람을 위해 행하는 ‘정치‘라는 과업이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고양시키는 데 기여할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확신이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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