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가지 않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죽은 자와 산 자가 자리바꿈하는 날이 오리라. 숲은 움직이게 되리라. 우리에겐 희망이 없지 않다. 많은 경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심각한 범죄들은 미결로 남으리라. 마찬가지로 우리 삶 어딘가에 미결의 위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지만 오늘은 다른 숲, 밝은 숲을걷는다. 노래하고 꿈틀대고 꼬리 흔들고 기는 모든 생명들! 봄이 왔고 공기가 무척 강렬하다. 나는 망각의 대학을 졸업을 하였고, 빨랫줄 위의 셔츠처럼 빈손이다. (<소곡> 전문) - P282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아마 수많은 대답이 나올 겁니다. 문학은 그만큼 복잡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태도‘입니다. 최근 시인 이성복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선생께서도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축구선수가 찬 공은 발의 각도를 그대로 가지고 날아간다. 공이 작품이라면 발은 정신이다." 이 ‘정신‘을 다른 말로 ‘태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제게는 이상과 김수영이 삶과 문학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김수영의 태도를 한마디로 ‘정직‘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럴듯한 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무엇을보태어 시를 꾸며내는 일을 그는 혐오했습니다. 그런 사기를 김수영은 포즈(pose)라고 불렀습니다. 포즈는 사진을 찍을 때만 인위적으로 취하는 자세니까요.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도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이다."(<요동하는 포즈들>) "진지성이다. 포즈 이전에 그것이 있어야 한다. 포즈의 밑바닥에 그것이 깔려 있어야 한다."(<포즈의 폐해>) 그래서 김수영은 포즈를 버리고 자신의 옹졸함과 폭력성을 시로 썼습니다. 자기 자신을 폭로하는 시 쓰기가 읽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율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입증한 사람이 바로 김수영입니다. - P305
급기야 3연에서는 인과관계 자체가 소멸된다. 1연에서 풀은바람보다 늦었지만 2연에서 풀은 바람을 앞섰다. 3연의 핵심 구절에는 이 두 방향이 뒤섞여 있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이렇게 인과가 해체되면 ‘풀이 운다‘라고 생각할 이유는 또뭐겠는가. 마침내 화자는 풀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흐린 하늘과 눕는 풀을 원경으로 보여주는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제 비관주의만은 아닌 어떤 것이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시는 여기서끝나지만, 그 시작은 삶에서 계속 실험될 것이었다. 그러나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 실험은 중단되고 말았다. 당대 한국 사회의 후진성에 절망하지 않으려고 고투했던 김수영은 풀에 자신의 절망을 투영했다가 풀로부터 다시 희망을 길어 올린다.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 P311
-부기 이후 2018년에 출간된 개정판 《김수영 전집》(민음사)에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적었다.
"시인 김수영은 한국시사에 최소 두 개의 시학적 발명품을 선사했다. 비속한 일상어로도 계시적 효과를 거두는 기술, 그리고 카오스모스에 가까운 시적 구조로 역동적인 난해함을 창출하는 기술, 시를 쓰는 데에만 사용된 기술이 아니다. 일상적 시어는 제 자신의 속물성을 적발하고고백함으로써 나날이 거듭나려 했던 그의 사인(私人)적 고투의 반영이고 카오스모스적 구조는 한국 사회가 억압적인 질서정연함이 아니라해방적인 혼란으로 가득하기를 바랐던 그의 무한 자유를 향한 시민적신앙의 반영이었다. 그는 각각을 ‘죽음의 연습‘과 ‘사랑의 변주‘라 불렀는데, 이는 4.19에서 목격한 빛을 5.16 이후의 동굴 속에서도 끝내 잊지 않기 위해 그가 연마한 존재의 기술이기도 했다. 다시 온 세상이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오기를 바랐던 그의 희망은 1987년과 2017년의 시민혁명으로 실현됐으니, 과연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에게서 배운다. 그러나 아무리 배우고 또 배워도 언제나 새로운 그를 누구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리라. 이 시인.• 사인 • 시민의 성(聖)삼위일체를 우리는 ‘김수영‘이라고 부른다." - P312
둘째, 왜 정확한 칭찬인가. 칭찬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서 하는 일이 아니다. 칭찬은, 칭찬의 대상에게도 그렇지만 칭찬의 주체에게도 위험할 수 있는 일이다. 부정확한 비판이 분노를 낳는다면 부정확한 칭찬은 조롱을 산다. 어설픈 예술가만이 정확하지 않은 칭찬에도 웃는다. 진지한 예술가들은 정확하지 않은 칭찬을 받는 순간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칭찬은 자신이 칭찬한 작품과 한 몸이 되어 함께 세월을 견디고 나아간다. 그런 칭찬은 작품의 육체에 가장 깊숙이 새겨지는 문신이 된다. 지워지지도 않고 지울 필요도 없다. - P324
모든 관계는 일종의 교환이라는 생각이 출발점이었다. 사랑도 하나의 관계라면, 사랑 안에서도 모종의 교환이 이루어지고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여타의 관계와는 다른, 사랑 고유의 교환 구조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결여의 교환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결여를 갖고 있다. 부끄러워서 대개는감춘다. 타인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그의 결여를 발견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의 결여가 못나 보여서 등을 돌리게 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여 때문에 그를 달리 보게 되는 일. 그발견과 더불어, 나의 결여가 사라졌으면 싶은 어떤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의 결여와 나누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내가 아니면그의 결여를 이해할 사람이 없다 여겨지고, 그야말로 내 결여를 이해해줄 사람으로 다가온다. 결여의 교환 구조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로 만들었으니, 두 사람은 이번 생을 그 구조 안에서 견뎌나갈 수 있으리라. 말하자면 이런 관계가 있지 않을까. 있다면, 바로 그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 P332
그 이후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위 논의를 보완하고 싶어졌다. ‘사랑의 관계 속으로 진입할 때 나에게 생기는 변하는 어떤 것일까? 흔히 다시 태어난다고들 하는데, 새로 태어난 나는 이전의 나와 어떻게 다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완전함‘과 ‘온전함‘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으나, 영어의 ‘perfect‘(완벽)와 ‘complete‘(완성)사이에도 어감의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하기로하자.) 사랑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해서 내 결여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여가 없다는 의미에서의 ‘완전한 사람이될 수는 없다. 그러나 상대방을 통해서 내 결여와 새로운 관계를맺을 수는 있다. 내 결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과 더불어살아가는 관계. 결여가 더는 고통이 아닌 생, 그런 생을 살 수 있게 된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지금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그와 함께있을 때, 나는 더 온전해진다.‘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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