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달리 말해야 한다. 덜 끔찍하다는 것은 사실 더 끔찍하다는말이다. 봉천동의 마지막 작은 집이 허물어지고, 정릉의 고층 아파트들을 둘러싼 원주민이 이주를 마저 끝내기 전까지는, 저 빈집의 두터운 빗장이 다삭기 전까지는, 우리가 제사상 앞에서 올리는절이 아직 허망하지 않다. 그러나 없는 신에게 절을 하는 것보다 없어질 신에게 절을 하는 것이 덜 끔찍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불안은 슬픔보다 더 끔찍하다. - P172

게다가 이 재능과 긍지가 사회적으로는 또 무슨 소용인가. 시가인간의 불행을 끌어안고 감동을 준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거라면 대중가요 한 곡이나 연속극의 대사 하나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아름다움에 관해 말한다면, 여기저기 광고방송에만 해도 가슴이뭉클할 정도로 빛나는 장면이 널려 있지 않은가. 시가 그 위에 더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이만 뜸을 들이고 결론을 말한다면 이렇다. 온갖 종류의 대중물과 상업물에는 ‘시‘가 충분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를소비할 뿐 생산하지는 않는다.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저 대중 소비적
‘시‘의 소구력과 성공에 비한다면, 새로운 감수성과 이미지의 생산이 목표인 본격적인 시의 수요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미미하다. 그러나 시가 생산한 것은 어떤 방법과 경로를 거쳐서든 대중물들 속에 흡수되고 전파된다. 시는 낡았고 댄스 뮤직은 새롭다고 믿는가. 사실을 말한다면 시에서는 한참 낡은 것이 댄스뮤직의 첨단을 이룬다.
프랑스 상징주의를 알고 중국의 3세대 영화나 5세대 영화를 아는사람들은 그 둘이 기이하게 닮았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것이다. 시의 열병을 심하게 앓았던 사람이 지금 동숭아트홀에서 상연하는 <헤드윅>을 본다면 거기에 랭보와 아폴리네르와 휘트먼이어떻게 개입하고 있는가를 또한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은 시의 소용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 거기에도 있다는 것이다. (2002) - P184

오늘날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시인들, 더 넓게 말해서는 예술가들이 삶에 대해 지니고 있는 태도가 이와 같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헐렁하게 살며 동시에 엄숙하게 산다. 지금은 다른 세상사람이 된 한 판화가는 자주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외출을 했지만 그가목판에 새긴 칼자국 하나하나는 시대의 고뇌와 희망으로 가득 충전되어 있다. 문학 수업에 너무 전념한 나머지 대학을 중퇴하고 뒤늦게 명예졸업을 해야 했던 어느 시인은 총장이 교무위원들을 대동하고 증서를 수여하는 자리에 월남치마를 입고 나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시도 때로는 월남치마를 입은 듯 헐렁하지만 형식이 그럴 뿐이며, 거기 표현되는 삶의 내용은 처절하고 엄숙하다. 그들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가장 좁은 길까지가보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자유로운 삶으로 그 엄숙함을 책임진다.
영화감독 이창동씨가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자유를 구하는 예술가이며, 그가 원하는 자유는 그의 좋은 소설과 영화들이 보여준바 삶에 대한 엄숙한 태도와 맞물려 있기에 우리의 기대가 크다. 형식은 자유로워야 하지만 그것으로 추구하는 내용은 엄숙해야 한다. 말을 바꾸자면 정치는 자유로워야하고 문화는 엄숙해야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것이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아왔다.
(2003) - P215

그렇더라도 11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마른 잎사귀들이 떨어지고나면 감춰져 있던 나무들의 깨끗한 등허리가 드러난다. 꽃 피고녹음 우거졌던 지난 계절이 오히려 혼란스러웠다고, 어쩌면 음란하게 보이기까지 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시절의 영화는 사라졌어도 세상을 지탱하는 곧은 형식들은 차가운 바람 속에남아 있다. 작은 새들의 날갯짓을 볼 수 있는 것도 이때이다. 마른석류보다 더 작은 새들이 주목의 붉은 열매를 쪼다가 돌배나무의 앙상한 가지로 날아올라간다. 높은 가지에서 관목 숲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져내릴 때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구별하기조차 어렵다. 이제 겨울이 오면 저것들은 어디에 몸 붙이고 살아갈까. 그러나 새들은 욕망도 불안도 떨어져 쌓인 나뭇잎들 속에 벗어두고 한 알의 맑은 생명으로만 남은듯하다. - P240

한때 이 땅에는 그런 귀신들이 참 많았다. 안방에는 술을 익게 하는 귀신들이 있었고, 건넛방에는 메주를띄우는 귀신들이 있었다. 또다른 방에는 엿기름을 엿으로 만드는귀신들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생전에 안방에는 결코 엿 항아리를 들이지 못하게 했다. 엿이 술을 ‘탁한다‘는 것이었다. ‘탁한다‘는 말은 닮는다는 뜻이다. 엿 항아리가 안방에 들어간다고 해서 엿이 술을 닮다니,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런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일종의 미신일 것이라고만 치부했다. 안방에는 누룩곰팡이의 뜸씨가 살고 있고, 건넛방의 벽지에는 메주 곰팡이의 뜸씨가 스며들어 있다고 깨닫게 된 것은 아주 훗날의 일이었다.
어느 집이건, 집에는 성주신이 있고, 부엌에는 조왕신이 있고, 변소에는 측신이 있는데, 이 신들은 모두 뜸씨들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이제 나는 생각한다. 이 신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왔고, 우리와함께 그 영검이 깊어졌으며, 또한 우리 운명의 많은 부분을 지배했다. 그것들은 우리와 숨결을 교환하고 냄새를 교환했다. 그것들은 우리의 고독한 몸을 세상의 만물과 이어주는 연결선이며, 그렇게맺어온 관계의 흔적들이며, 세상과 사랑을 나눈 내력들이며, 우리마음속 깊은 곳에 남은 기억의 시간들이었다. 그 귀신들의 조홧속을 몸과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느끼며 살아가는 동안, 저 오뉘죽의 마지막 혀였던 우리 외할머니처럼 우리들도 모두 죽기 전에 귀신이 된다. 그래서 이 귀신들이 없다면, 한 사람이 백 년을 살았어도, 단 한 시간도 살아보지 못한 셈이 된다. - P252

나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을, 다시 말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남이 모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식구들에게도 그런 시간을 가지라고 권한다. 애들은 그 시간에 학교성적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소설이나 만화를 보기도 할 것이며, 내가 알고는 제지하지 않을 수 없는 난잡한 비디오에 빠져 있기도 할것이다. 어차피 보게 될 것이라면 마음 편하게 보는 편이 낫다고 본다. 아내는 그런 시간에 노래방에 갈 수도 있고, 옛날 남자친구를만나 내 흉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늘 되풀이되는 생활에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여름날 왕성한힘을 자랑하는 호박순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자랄것이며, 폭죽처럼 타오르는 꽃이라 한들 감시하는 시선 앞에서 무슨 흥이 나겠는가. 모든 것이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 P281

고인은 순간마다 한 뜻을 위해 자신의 온몸을 내던졌던 사람답게죽음 앞에서도 전적으로 죽음에 관해서만 말했다. 처절한 결단을향해 추호의 주저함도 없었던 고인의 유서에는 짧은 문장과 비교적긴 문장이 어울려 만드는 단호한 리듬과 처연한 속도감이 있다. 이 다감하고 열정적이었던 사람의 절명사는, 고결한 정신과 높은 집중력에서 비롯하는 순결한 힘 아래, 우리 시대의 어느 시에서도 보기 드문 시적 전기장치를 감추고 있다. 고인의 믿었던 미래의 힘과 깊이가 그와 같다. (2009)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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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욕망을 일으키는 것은 굉장히 즐겁다. 상대가 남자건, 여자건.
버터가 녹듯이 상대의 눈이 빛나며 드러나는 달콤한 굶주림이 눈에 보인다. 자신의 힘을 동원하여 누군가를 열광하게 하는 것은 나쁜 일, 비열한 일, 더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그런 식으로 느꼈더라…… 무의식중에 상관하고 싶지 않은 상대의 욕망을 깨웠음을 알았을 때는 소름이 끼치고, 자기혐오에 빠진다. 하지만 자기가 점찍어서 작업한 상대가 욕망한 것이라면, 조금도 리카의 존재를 깎아내린 것이 아니다. 줄곧 눌러두었던 순수한 감정이 피부로 배어나는 걸 느꼈다. 이거. 멈출 수 있을까. 불안해진다.
"메리 크리스마스 마치다 씨."
사바랭 savarin 시럽 같은 가지이 마나코의 목소리는 녹진하게 울려 퍼져, 면회실의 차갑고 단단한 벽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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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포기한 타락한 모습에 멀어져간 측근, 찬양하다 돌아선 언론, 무엇보다 자신을 버린 아내와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을 향한 저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비참한 내 모습을 잘봐둬, 너희들 탓이니까…… 말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누군가손을 내밀 때까지 소란을 피운다. 요지부동 자신의 생활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고집. 가족이 소중하다면서도 세간에 처자식이 자신을 버렸다는 인식을 심으려 한다. 마음을 고쳐먹고 자기 힘으로인생을 만회하려 한다면, 그는 이제 목숨쯤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가지이 마나코에게 살해당했다는 남자들에게도 많건 적건 그런 냄새가 나지 않았는가. 피해자가 생전에 한 말, 그리고 그들 주위에 있던 사람의 증언이 하나둘 떠오른다.

이대로 혼자 나이를 먹는 게 두렵다. 생활이 점점 피폐해진다. 누구든 좋으니 밥을 차려주고, 돌봐줄 여자가 필요했다. 수상하다고는 생각한다.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한다. 가족들은 그런여자와 헤어지라고 들볶는다. 그래도 상관없다. 가족과 절연하더라도 그녀를 선택하겠다.

그 여자는 외로운 생활을 보내는 피해자의 마음속 빈틈을 파고들었어요. 남자는 모자란 생물이지 않습니까? 여자의 보살핌과 따스함 없이는 생활해나갈 수 없잖아요?

요리 잘하는 착한 여성이 있다면, 남성이라면 누구라도 끌리지않겠어요? 남자를 잡으려면 먼저 위부터 잡으라고 하잖아요.

이 사건은 어디를 잘라도 그 단면에 고독한 남성의 지나친 자기 연민과 여성을 향한 증오가 배어 있다. 피해자를 탓하는 사고방식일까. ‘자기책임론‘이 제일 싫은데.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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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지은 밥에 버터와 간장을 넣고 비벼 먹는 거예요. 요리를하지 않는 당신도 그 정도는 하겠죠. 버터가 얼마나 훌륭한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음식이에요."
얼버무리고 넘어가지 못할 만큼, 그녀는 엄숙하게 말했다.
"버터는 에쉬레Échire"라는 브랜드의 가염 타입을 써요. 마루노우치에 전문점이 있으니 거기에서 손에 들어보고 잘 확인해서 사면 돼요. 버터 품귀인 지금이 해외 고급 버터를 시험할 좋은 기회예요. 맛있는 버터를 먹으면, 난 뭔가 이렇게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떨어져요?"
"그래요. 붕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떨어져요. 엘리베이터에서한층 아래로 쑥 떨어지는 느낌. 혀끝에서 몸이 깊이 가라앉아요."
방금 타고 온 엘리베이터에서 느낀 중력을 떠올려보았다. 메모하는 것도 잊고, 리카는 몸이 절로 앞으로 쏠리는 상대의 말솜씨에 빨려들었다. 가지이의 눈과 입술이 촉촉해지기 시작해서 흠칫놀랐다. 그녀의 황홀한 듯 멍한 시선은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향해 있다.
"버터는 냉장고에서 막 꺼내서 차가운 채로 넣어요. 정말로 맛있는 버터는 차갑고 단단한 상태에서 식감과 향을 맛보아야 해요. 밥의 열기에 바로 녹으니까 반드시 녹기 전에 입으로 가져가야 해요. 차가운 버터와 따뜻한 밥. 일단 그 차이를 즐겨요. 그리고 당신 입속에서 두 가지가 녹아서 섞이며 황금색 샘이 될 거예요. 네, 보이지 않아도 황금색이란 걸 아는, 그런 맛이죠. 버터가 엉킨 밥 한알 한 알이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마치 볶은 듯한 향기로움이 목에서 코로 빠져나가죠 진한 우유의 달콤함이 혀에 감기고..."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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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지색의 좁은 분양주택이 완만한 언덕배기를 따라가며 끝없이 이어졌다.
잘 정비된 동네는 어디에 있어도 똑같은 인상이어서, 마치다리카는 아까부터 계속 같은 장소를 뱅글뱅글 도는 기분이었다. 꽁꽁 언 오른손 손가락의 거스러미가 벗겨졌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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