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면에서는 왜 피고 측 변호사가 시온주의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아이히만의 견해를 보충하기 위해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아이히만은 자센과의 인터뷰에서도 시인했듯이 자기는 "축사로 끌려가는 소와 같은 무관심으로 자신의 임무를 맞이하지 않았고,
그는 "기본적인 책(즉 헤르츨의 유대인의 국가)도 읽어본 적이 없고이를 연구하고 흡수해본, 흥미를 갖고 흡수" 해본 적이 없는 자신들의 동료와는 아주 달랐으며, 따라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과 내면적 관계가 결핍된 다른 동료들과는 달랐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들은 "사무실의 일벌레일 뿐이었고,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문장을 통해, 명령을통해" 결정되었으며, "다른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바로 ‘작은 톱니바퀴‘였는데, 피고 측에 의하면 아이히만이 그와 같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총통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들은 모두 작은 톱니바퀴였다. 심지어 힘러의 안마사였던 펠릭스 케르스텐에 의하면, 힘러가 최종 해결책을 열정적으로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상관인 하인리히 뮐러가 신체적 전멸‘과 같은 ‘거친‘ 것을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경찰심문관에게 확언했다. 분명한 것은, 아이히만의 눈으로 볼 때 작은 톱니바퀴 이론이 상당히 논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물론 그는 하우스너 씨가 묘사하려고한 것처럼 비중이 큰 인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히틀러가 아니었고, 그런 점에서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에 관해서는 뮐러나 하이드리히, 또는 힘러와 그 중요도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과대망상증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피고 측이 보여주려 한 것만큼 작은 인물도 아니었다. - P116

 왜냐하면 "그들이 시행한 유대인 정책의 첫 단계에서 나치스가 친시온주의적 태도를 채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고, 아이히만이 유대인에 관한 교훈을 배운 것은 이때였다. 이 ‘친시온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것은 결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독일계 유대인 자신들조차도 ‘이화‘(異化, dissimilation) 작업을 통해 ‘동화‘ (assimilation)를 해체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으로 생각하고 시온주의 운동에 대거 가담했다.  - P118

 테레지엔슈타트의 생존자인 한 독일계 유대인의 편지는 나치스가 임명한 제국연합회(Reichsvereinigung)의 모든 주도적 직책들은 시온주의자들이 차지했다고 전한다(그에 비해 진짜 유대인제국대변단(Reichsvertretung)은 시온주의자와 비시온주의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치스에 의하면 시온주의자들도 역시 "민족적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점잖은‘ 유대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어떠한 저명한 나치스도 공개적으로 이런 맥락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치 선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맹렬하고 솔직하며 비타협적으로 반유대적이었고, 결국 전체주의 정부의 신비에 대한 경험이 아직도 없는 사람들이 ‘단순한 선전‘이라고 무시한 것만을 중요시했다. 그 처음 몇 해 동안 나치당국과 팔레스타인 담당 유대인 기관 사이에는 상호적으로 매우 만족스러운 협약이 존재했다. 하바라 또는 이송협약이라고 불린 이 협약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자기 돈을 독일 물품의 형태로 목적지에 보낸 다음, 도착 즉시 그 물건들을 파운드로 교환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곧 이것은 유대인이 돈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방법이었다. (그 당시의 대안은 봉쇄 계좌를 만드는 것뿐이었는데 여기에 든 금액은 해외에서는 50퍼센트에서 95퍼센트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변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미국의 유대인이 독일 제품의 불매운동을 조직하려고 크게 애썼던 1930년대에 엉뚱하게도 팔레스타인에서는 온갖 종류의 ‘독일제‘로 뒤덮이게 되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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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의 말이 옳았다. 곰곰이 자신을 돌이켜보건대 나는 실제로는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으며 단지 어린애에게 부과된 금기에 불편함을 느낄 따름이었다.
금기에 대한 불편은 몇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한동안 나는남자들에게 성기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도 불편을 겪었다. 남자에게는 여자가 드러내놓고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부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저 바지 속에 있다는 사실이 자꾸만 의식된다는 사실이 크나큰 불편이었던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남자들의 성기에 내포된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것이 바지 안에 감춰져있다는 사실 자체였다. 나에게는 내가 그것의 존재함(존재 자체가아니라)을 의식하는 것이 지나치게 의식되었다. 혹시 부주의한 내눈길이 이성의 만류를 배반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 성기가 있는 부분으로 향해지지나 않을까 의식했으며, 그래서 번번이 일부러 다른 곳을 쳐다보려고 하다보면 또 그러고 있는 나 자신이 견딜 수없이 의식되었다.
동네 아저씨나 가겟집 총각들은 물론 교장 선생. 사진 속의 대통령, 심지어는 액자 속에 들어 있는 예수의 거룩한 모습을 볼 때마저도 나는 ‘저 사람도 그것을 갖고 있겠지‘ 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즈음에는 어떡해야 남자들에게 성기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였다. 남들의 오해를 받을까봐 남자 허리띠의 버클조차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 P125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사랑이다.
할머니의 사랑 중에 고운 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나라면 이모는 물론 미운 정 쪽이다. 이모는 고운 정을 갖기는 틀렸기 때문에 할머니에게서 완전한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그러나 나는 미운 정을 얻기 위해 할머니에게 함부로 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이 없다. 어쩌면 미운 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더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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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분이. 즉 광진테라 아줌마는 이 모든 것을 견뎌냈다.
아줌마가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의 삶이라는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양복점 뒷방에서 강제로 순결을 잃은 순간 이미 자기의 삶은 결정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아저씨가 자기의 삶이 아니라는생각이 들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줌마는 그런 생각을꿈에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줌마들은 자기의 삶을 너무 빨리 결론짓는다. 자갈투성이 밭에 들어와서도 발길을 돌려 나갈 줄을 모른다. 바로 옆에 기름진 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번 발을들여놨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뼈빠지게 그 밭을 개간한다.
나는 아줌마가 자기의 삶을 한 발짝 벗어나서 바라보았으면 하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성실하고 선량한 사람의 삶에 드리워지는그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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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보니 상실감은 더 컸다. TV 화면에 킥복싱이 커져 있는일도 없었고, 현판 바깥에서 운동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일도 없었고, 계단 꼭대기에서 엄마한테 뭐가 어디 있느냐고 소리쳐 묻는 소리도없었다. 덩치가 나만 한 사람이 나를 ‘기인‘이라고 부르거나 "아빠, 셔츠멋진데요. 혹시 베트남 난민에게서 뺏어온 건 아니죠?" 하고 묻는 일도없었다. 그제야 나는 그 동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은 큰아이가 여기 없는 것 같았어도 사실은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이곳을 떠나고 없는 것이다.
나는 차 뒷좌석에서 발견한 둘둘 말린 스웨터나 아무데나 붙여놓은 씹다만 껌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에도 눈물이 났다. 하지만 아내는 그마저도 필요 없이 마냥 눈물을 흘렸다.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멍청하게 집안을 돌아다니며 농구공이나 큰아이가 달리기 대회에서 탄 트로피, 오래 전의 명절 때 찍은 사진 등을 쳐다보는, 그리고 그 물건들을 통해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을 생각하는나 자신을 발견했다.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아들이 여기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예전의 그 아이도 영영 가고 없다는 갑작스런 깨달음이었다. 아들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삶은 계속되며, 아이들은 자라서 집을 떠나기 마련이다. 아직 이것을 모르시는 분이 있다면 내 말을 믿으시기 바란다. 아이들이 집을 떠날 날은 여러분이 상상했던 것보다 빨리 온다.
그러므로 나도 이쯤에서 펜을 놓고 집 앞 잔디밭에서 막내아이와 야구를 해야겠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1이슈 발치하 미국학 151 - P151

지금은 고전이 된 <북미대륙 중동부 나무들의 자연사)에서 피티는 좋게 말해야 학자답게 썼다고밖에 할 수 없는 문체로 434쪽을 단조롭게 기술하고 있지만("오크 나무는 우람하고 묵직한 나무로 나무껍질에는 기다란 홈이 파여 있으며, 잔가지는 단면이 대개 오각형으로 되어 있고 그주변을 다섯 개의 잎사귀가 둘러싸고 있다" 같은 표현이 대부분이다), 뉴잉글랜드의 사탕단풍과 그 선명한 빛깔에 대한 설명에 이르면 마치 누군가가 그의 코코아 잔을 뒤엎기라도 한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그는 숨 가쁘게 사탕단풍의 빛깔에 대한 비유를 늘어놓는다.
"대군의 함성 같고•••••••, 불의 혀 같고•••••• 교향곡의 바다의 물마루를 타넘는, 그리고 그 울부짖는 듯한 노랫소리로 오케스트라의 모든 계산된 불협화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찬 선율 같다."
그의 아내가 옆에서 "알았어요. 도널드. 이제 약 드실 시간이에요"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 않은가.
피티는 열띤 어조로 그렇게 두 단락에 걸쳐 사탕단풍의 색깔을 묘사하다가 돌연 축 처진 엽액)과 비늘에 싸인 잎눈, 하늘거리는 잔가지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나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킬링턴봉 정상의 초자연적으로 맑은 공기 속에서 시야가 온통 가을빛으로 물든것을 보았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두 팔을 벌린 채 목청껏 존 덴버의 노래들을 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것뿐이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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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가 살인의 방조자로 기소되었다면 유죄라고 인정했을까? 아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건들을 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회고를 할 때에만 범죄일 뿐, 자기는 언제나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해 수행한 히틀러의 명령은 제3제국에서는 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피고 측은 아이히만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제3제국 시대에 가장 유명한 헌법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현재 바바리아의 교육과 문화장관으로 있는 테오도어 마운츠의 말을 인용하려 할 것이다. 그는 1943년에 "총통의 명령은...... 현재 법적 질서에서 절대적인 중심이다"라고 썼다). 오늘날 아이히만에게 그가 달리 행동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단적으로 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잊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와서 ‘자신들은 언제나 반대한 척하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수행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마운츠 교수처럼 그도 "다른 통찰에 도달했다." 그가 한 일들은 한 것이고, 이를 굳이 부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구상의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로 공개적인 교수형을 당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말은 그가 무엇을 후회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후회는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 P77

재판 내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라는 주장의 이 두 번째 논점을 해명하려고 애썼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기소장이함축하고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부정하지는 않은 점인 그가 고의로행동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비열한 동기와 그의 행동의 범죄적인측면을 전적으로 인지한 상태에서 행동했다는 것도 함축하고 있었다.
비열한 동기에 대해 자기 자신이 마음 내면에서부터 더러운 후레자식(innerer Schweinehund)은 아니라는 점을 그는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양심에 대해 그는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는 점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일이란 수백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분명히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든일이다.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를 ‘정상‘으로 판정했다(그들 가운데 한 명은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다‘ 라고 탄식했다고 전해지고, 또 다른 한 명은 그의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자매,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그의 태도, 그의 모든 정신적 상태가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끝으로, 대법원에서 그의 항소를 들은 후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한 성직자는 아이히만이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발표함으로써 모든사람들에게 확인해 주었다. 이 영혼의 희극 뒤로 전문가들은 그의 경우가 법적인 이상 상태는 물론 도덕적인 이상 상태도 아니라는 고통스러운 사실을 내놓고 있다(최근 하우스너 씨가 새터데이 이브닝포스트』에 밝힌 ‘자신이 재판에서 털어놓을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예루살렘에서 비공식적으로 제공된 정보와 상반된다. 아이히만은 살인에 대한 위험하고 탐욕스러운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이며, ‘도착적이고 가학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정신과 의사들이 생각했다고 지금우리는 듣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더심각한 것은, 그의 경우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나, 열광적인 반유대주의나 세뇌교육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유대인에게 거부감을 가질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유대인 증오자가 되지 않을 많은 ‘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 P78

나치스 시절 이후로 변하지 않은 그의 신앙에 의하면(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을 신을 믿는 자(Gottgläubiger)라고 했는데, 이 말은 기독교와 결별한 사람을 지칭하는 나치스의 용어이다. 그는 성경에 대고 맹세하기를 거부했다) 이 사건은 의미를 전달하는 더 높은 사자(使者)‘에 귀속된다. 이 사자는 ‘우주의 운행‘과 어떤 면에서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그 자체로 ‘보다 높은 의미를 갖고 있지 않는 인간의 생명이 종속된다. (이 용어는 매우 암시적이다. 신을 뜻을 전하는 더 높은 사자(Höheren Sinnestrager)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상으로 볼 때 그에게 군대질서에 속한 어떤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치스는 군대를 명령을 받는 자(Befehlsempfänger)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Befehlsträger)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옛날의 ‘나쁜 소식의 사자‘와 같이 명령을 실행해야하는 자들 위에 놓인 중요하고 책임성 있는 부담을 암시했다.  - P80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의 규정을 위반하면서 일반징병제를 도입하고, 공군과 해군 건설을 포함하는 재무장 계획을 공표한 것이 1935년이었다. 또한 1933년에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독일이 조용하지도 비밀스럽지도 않게 라인란트 비무장 지역을 점령할 준비를 하고 있던 해였다. 또 히틀러가 "독일은 평화가 필요하며 평화를 원한다" "우리는 폴란드를 위대하고 민족적 의식을 지닌 국민의 나라로 인정한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국내문제에 간섭하거나, 오스트리아와 합병하거나, 무엇보다도 합방을 실행하려고 하지 않으며 할 생각도 없다"라는 평화 연설을한 때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해는 불행하게도 나치 정권이국내외에서 일반적으로 진정한 인정을 받았고, 히틀러가 모든 곳에서 위대한 정치가로서 존경받은 해였다. 독일 내에서는 변화의 시기였다. 엄청난 재무장 계획 때문에 실업은 사라졌고, 노동계급의 초기 저항은무너졌다. 그리고 처음에는 주로 ‘반파시스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좌파 지식인, 그리고 높은 지위를 가진 유대인)에게 향한 정권의 적대감이 아직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탄압하는 쪽으로 완전히 전환되지는 않았다 - P92

유대인의 일에 대한 그의 학습이 거의 전적으로 시온주의와 관련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모두 오랫동안 지위를 유지해온 저명한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지도층인사들과 그의 첫 개인적인 접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유대인문제‘에 그렇게 매혹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고 그는설명했다. 그가 언제나 멸시한 동화론자들이나 그를 지루하게 만든 정통파 유대인과는 달리 이 유대인은 그와 같은 ‘이상주의자‘였다. 「아이히만의 생각에 따르면 ‘이상주의자‘란 단지 어떤 ‘이상‘을 신봉하거나, 또는 도둑질하거나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필수불가결하기도 하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는지만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 P97

 재판관들이 피고에게 그가 말한 모든 것이 ‘공허한 말뿐이라고 드디어 말한 것은 옳았다. 다만 그들은 이 공허함이 가장된 것이며, 피고가 공허하지 않은 끔찍한 다른 생각들을 감추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반박될 수 있는 것은, 아이히만은 기억력이 상당히나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나 사건에 대해 동일한 선전문구와 자기가 만든 상투어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반복한 점 때문이다(자기가 스스로 만든 문장을 하나 말하더라도 그는 이말이 상투어가 될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있었기 때문이다. - P105

아이히만의 정신은 그런 문장들로 넘치도록 채워져 있었다. 실제로일어난 일에 대한 그의 기억은 상당히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격분하게 된 몇 안 되는 순간에 란다우 판사는 피고에게 (만일 당신이 갖가지 살상방법에 대해 다룬 이른바 반제회의에서 이루어진 토론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무엇은 기억할 수 있습니까?"라고물었다. 그 대답은 물론, 아이히만은 그 자신의 출셋길의 전환점들은상당히 잘 기억한다는 것이지만, 그러한 전환점들과 유대인 몰살 이야기에서의 전환점, 즉 사실상의 역사의 전환점들과 반드시 일치하지는않았다. (그는 언제나 전쟁이 시작된 날이나 소련 침공이 개시된 날짜를 기억하는 데 힘들어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에게 어느 순간이든 ‘의기양양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던 그 자신의 문장들은 하나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질심문에서 판사들이 그의 양심에 호소하려고 할 때마다 ‘의기양양‘함을 마주치게 되었다. 피고가 자신의 인생의 모든 시기와 모든 활동마다 그것에 대해 의기양양함을 느끼게 하는 다른 상투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판사들은 당황한 동시에 분노했다. 그의 정신 속에서는 종전 무렵에 걸맞은 "나는 내 무덤에 웃으며 뛰어들 것이다"라는 말과 "나는 지상의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로 기쁘게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할 것이다"라는 말 사이에는아무런 모순도 없었다. 이 말은 아주 다른 상황들 가운데서도 그의 기분을 북돋우는 데 완전히 똑같은 역할을 했다. - P111

검찰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괴물‘이 아님을 알수 있었지만, 광대라고 의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의심은재판의 전체계획에 치명적일 수 있고, 그와 그 같은 이들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안겨준 고통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의심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가 행한 최악의 광대짓들은 거의 주목받지 않았고, 거의보도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허송한 젊은 시절에 배운 단 한가지는 바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대단히 강조하며 선언하고는("오늘 그 누구도, 어떤 판사도, 나로 하여금 증인으로서 선서한 진술을 하도록 할 수 없고, 선서상태에서 무엇을 단언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거절합니다. 나는 그것을 도덕적인 이유로 거절합니다. 내 경협상 누군가가 맹세를 성실하게 따르면 어느 날 그 대가를 치르게 되기때문에, 나는 앞으로 영원히 이 세상이나 어떤 다른 권위로도 나로 하여금 맹세를 하거나, 선서 하의 증언을 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자발적으로 선서하지 않을 것이며 그 누구도 내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 후에 판사로부터 자신의 변호를 위한 증언을하고 싶으면 "선서를 한 뒤 할 수도 있고 선서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을 분명히 듣고 난 뒤, 두말 않고 즉시 선서 아래에서 증언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또는 경찰심문관에게 그랬듯이, 법정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짓은 자신의 진정한 책임을 벗어나 자신의 목숨을 위해 싸우거나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매우 감정적으로 확언한 뒤, 자신의 변호인의 지시에따라 자비를 호소하는 자필 문서를 제출한 사람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이히만에게는 이것은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들이었고, 그가기억 속에서나 즉흥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북돋우는 관용구들을 찾을수 있다면 그는 모순‘ 따위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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