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면에서는 왜 피고 측 변호사가 시온주의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아이히만의 견해를 보충하기 위해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아이히만은 자센과의 인터뷰에서도 시인했듯이 자기는 "축사로 끌려가는 소와 같은 무관심으로 자신의 임무를 맞이하지 않았고,
그는 "기본적인 책(즉 헤르츨의 유대인의 국가)도 읽어본 적이 없고이를 연구하고 흡수해본, 흥미를 갖고 흡수" 해본 적이 없는 자신들의 동료와는 아주 달랐으며, 따라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과 내면적 관계가 결핍된 다른 동료들과는 달랐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들은 "사무실의 일벌레일 뿐이었고,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문장을 통해, 명령을통해" 결정되었으며, "다른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바로 ‘작은 톱니바퀴‘였는데, 피고 측에 의하면 아이히만이 그와 같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총통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들은 모두 작은 톱니바퀴였다. 심지어 힘러의 안마사였던 펠릭스 케르스텐에 의하면, 힘러가 최종 해결책을 열정적으로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상관인 하인리히 뮐러가 신체적 전멸‘과 같은 ‘거친‘ 것을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경찰심문관에게 확언했다. 분명한 것은, 아이히만의 눈으로 볼 때 작은 톱니바퀴 이론이 상당히 논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물론 그는 하우스너 씨가 묘사하려고한 것처럼 비중이 큰 인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히틀러가 아니었고, 그런 점에서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에 관해서는 뮐러나 하이드리히, 또는 힘러와 그 중요도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과대망상증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피고 측이 보여주려 한 것만큼 작은 인물도 아니었다. - P116

 왜냐하면 "그들이 시행한 유대인 정책의 첫 단계에서 나치스가 친시온주의적 태도를 채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고, 아이히만이 유대인에 관한 교훈을 배운 것은 이때였다. 이 ‘친시온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것은 결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독일계 유대인 자신들조차도 ‘이화‘(異化, dissimilation) 작업을 통해 ‘동화‘ (assimilation)를 해체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으로 생각하고 시온주의 운동에 대거 가담했다.  - P118

 테레지엔슈타트의 생존자인 한 독일계 유대인의 편지는 나치스가 임명한 제국연합회(Reichsvereinigung)의 모든 주도적 직책들은 시온주의자들이 차지했다고 전한다(그에 비해 진짜 유대인제국대변단(Reichsvertretung)은 시온주의자와 비시온주의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치스에 의하면 시온주의자들도 역시 "민족적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점잖은‘ 유대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어떠한 저명한 나치스도 공개적으로 이런 맥락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치 선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맹렬하고 솔직하며 비타협적으로 반유대적이었고, 결국 전체주의 정부의 신비에 대한 경험이 아직도 없는 사람들이 ‘단순한 선전‘이라고 무시한 것만을 중요시했다. 그 처음 몇 해 동안 나치당국과 팔레스타인 담당 유대인 기관 사이에는 상호적으로 매우 만족스러운 협약이 존재했다. 하바라 또는 이송협약이라고 불린 이 협약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자기 돈을 독일 물품의 형태로 목적지에 보낸 다음, 도착 즉시 그 물건들을 파운드로 교환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곧 이것은 유대인이 돈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방법이었다. (그 당시의 대안은 봉쇄 계좌를 만드는 것뿐이었는데 여기에 든 금액은 해외에서는 50퍼센트에서 95퍼센트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변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미국의 유대인이 독일 제품의 불매운동을 조직하려고 크게 애썼던 1930년대에 엉뚱하게도 팔레스타인에서는 온갖 종류의 ‘독일제‘로 뒤덮이게 되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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