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무리 이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도 양심이 그 무서운 환영들을 일으켜 세워 그의 눈에 보이도록 그 환영들에 형태를 부여하고 바로 그의 면전에서 움직이도록 했다고 생각하니 이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밤낮으로 그가 저지른 범죄의 그림자가 조용한 구석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고, 은밀한 장소에서는 그를 조롱하고, 연회장에서는 그에게 다가와 그의 귀에 속삭이고, 잠들어 있는 그를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으로 깨운다면 그의 삶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멀스멀 파고들자 그는 두려움에 얼굴이 점점 더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고, 방 안 공기도 갑자기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 P309

「세상이 우리 둘 다를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일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도 세상은 늘 자네를 숭배했다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걸세. 자네는 이 시대가 찾고 있는 그런 유형의 존재야. 그리고 찾아낸 것이 오히려 두려운, 그런 존재야. 난 자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조각도 안 하고, 그림도 안 그리고, 자네 자신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인생이 자네의 예술이었네. 자네는 스스로를 음악에 맞췄어. 자네가 지낸 나날이 자네의 소네트였네.」 - P334

방 안으로 들어선 그들의 눈에 벽에 걸려 있는 눈부실 정도로 멋진 초상화 하나가 들어왔다. 그들 주인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젊은 주인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한 사람이 쓰러져 죽어 있었다. 야회복을 입은 그의 가슴에 칼이 꽃혀 있었다. 찌글찌글 늙고 주름살 늘어진 흉측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그가 누군지 몰랐다. 그 사람이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살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그가 누군지 알게되었다.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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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잔 정말 똑똑한 여자야. 여자치고 그렇게 똑똑한 여자를 못 봤어. 그걸 뭐라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자들이 약한 척하면서 내보이는 매력 있잖나.
그 여자에겐 그런 게 없어. 황금으로 된 형상을 귀중하게 만드는 건 진흙으로 구운 발일세. 그 여자 발이 아주 예쁘긴 한데 진흙으로 만든 발은 아니야. 하얀빛이 나는 도자기로 만든 발이라고나 할까? 뜨거운 불을 견뎌 낸 발이지. 불이 그 발을 파괴한 게 아니라 더 단단하게 만든거지. 그뇨는 온갖 시련을 다 이겨 낸 여자야.」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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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우리 삶과 역사 속에서 우연과 필연이 어떤 식으로 이어지든, 그 결과는 똑같이 불가피한 결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캉디드의 대답에는 또 다른 진실이 담겨 있다. 우리는 주어진 어떤 시점에서도 역사를 이끄는 우연과 필연을 결코 모두 알 수 없으며, 나아가 어느 역사적 선후 관계에서도 초기 조건들을 모두 알 수 없다.
바로 이런 방법론적인 약점에서 철학의 힘이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자유 -밭을 일구는 것-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데이터를 처리할 수 없다는 우리의 무능함뿐만 아니라, 우리 행동을 빚어내는 초기 조건들과 사건들의 맞물림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우리의 무지함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지 속에서 자유로우며, 우리를 결정짓는 원인들의 대부분이 과거 속으로... 영원히...묻혀 버린다는 삶 속에서 자유롭다. 영생의 물리학과 슈퍼컴퓨터에 의한 부활이 아니라, 이런 삶이 바로 희망이 영원히 마르지 않고 샘솟는 원천이다.
- P499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이 무한하고, 보살핌이 없고, 무목적적인 우주를 제시하면서 오직 차갑고 잔인한 논리만 내놓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사이비 과학, 미신, 신화, 마술, 종교는 도덕과 의미에 대해 단순하고 즉각적이고 위안이 되는 규범을 제공한다.  - P509

영원히 마르지 않는 희망 
이상한 것들을 믿는 이 모든 이유를 한데 묶어 이 책의 마지막 장 제목으로 삼았다. 이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언제나 더 나은 수준의 행복과 만족을 찾아 앞날을 내다보는 종이라는나의 확신을 담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 결과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비현실적인 약속을 붙들려 하거나, 오로지 불관용과 무지를 고집함으로써, 오로지 타인의 삶을 가벼이 생각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다가올 미래의 삶에만 집착한 나머지, 지금의 삶에서 우리가 가진 것을 놓쳐 버린다는 것이다. 희망의 다른 원천도 있다. 원천이 다르더라도 희망은 희망이다.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 측은지심과 더불어서 무수히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각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으리라는 희망, 역사의 진보가 계속 이어져 보다 큰 자유를 향해 나아갈 것이며, 모든 사람들을 보듬어 갈 것이라는 희망, 사랑과 공감과 아울러 이성과 과학도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바로 그것이다.
- P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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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한때 향수를 연구하기도 했다. 진한 향이 나는 오일을 증류하고 동방에서 들여온 향기 나는 수지를 태워 가며 향수 제조의 비밀을 캐보기도 했다. 그는 우리 마음의 기분 가운데 감각적 삶에서 그 대응물을 찾을 수 없는 기분은없다고 생각했다. 기분과 감각적 삶의 진정한 관계를 찾기 시작한 그는 유황 속에는 사람을 신비스럽게 만드는 것이 있고,
용연향에는 사람의 정열을 자극하는 것이 있으며, 향제비꽃에는 지나간 사랑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것이 있고,
사향은 우리의 뇌를 혼란스럽게 하고, 노란 꽃이 피는 챔팩나무는 상상력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 P208

그러다 어느 날 밤에는 불쑥 집을 빠져나와 블루 게이트 필즈 근처의 지저분한 곳을 돌아다니며 하루고 이틀이고 쫓겨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곤 했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그 초상화 앞에 앉아 때로는 그림과 자기 자신을 혐오하기도 하고,
그러나 또 어떤 때는 어느 정도는 죄악이 주는 매력이기도한 개인주의를 뿌듯해하기도 하면서 응당 자신이 짊어져야할 짐을 맡아 질 수밖에 없는 일그러진 초상을 바라보며 은근한 쾌감 속에 미소를 짓곤 했다.
- P220

그러나 사람에게는 혈통에 따른 조상도 있지만 문학 작품속에서도 자기 조상을 찾을 수 있다. 그 유형과 기질에서 자기와 아주 가까운 인물들, 스스로 확신컨대 자기에게 영향을듬뿍 끼쳤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이 많이 있다. 가끔 도리언은역사 전체가 자신의 삶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때가 있었다. 실제로 그 상황 속에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력이 그를 위해 창조한 삶의 역사, 그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정열적인 삶의 자취가 바로 역사가 아닌가싶었다. 세상의 무대 위를 지나며 죄를 그렇게 멋진 것으로만들고 악을 더욱 정교하게 만든 기이하고 무서운 인물들 모두를 도리언은 다 알 것 같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방식에 의해 그들의 삶이 바로 그 자신의 삶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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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주의 - 기능주의 논쟁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 동안 역사학자들은 홀로코스트를 놓고 의도주의 (intentionalism)와 기능주의 (functionalism)로 갈려 논쟁을 벌였다.
의도주의에 따르면, 1920년대 초반부터 히틀러가 유대인 대량 학살을 염두두었으며, 1930년내의 나치 정책은 이 목적을 위해 구상된 것이었고, 곧바로 러시아 침략과 생활권 Lebensraum 추구가 기획되면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과 결부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기능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원래 계획은 추방이었지만, 대러시아전의 실태로 최종 해결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역사학자 라울 힐버그는 이런 해석들이 인위적인 구분이라고 생각한다. "실상은 이 두 해석 이느 쪽보다도 더 복잡하다. 나는 히틀러가 정시 명령을 내렸다고 믿지만, 그 명령 자체는 어떤 과정의 최종 산물이었다고 생각한다. 히틀러는 줄곧 관료들이 일정한 틀에 따라 생각하고 솔선할 것을 독려하는 많은 애기들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체계적인 총살, 특히 어린 아이들과 고령의 노인들을 총살하는 것, 독가스로 살상하는 것은 모두 히틀러의 명령이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 P417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사건이 일어난 순서를 살펴보자. 처음엔 독일인의 삶에서 유대인을 내쫓는 것이 목적이었다(여기에는 유대인들의 재산과 주택 대부분을 압류한 것이 포함된다), 그 다음은 강제 수용과 격리였다(그곳들은 대개 수용 인원이 과다하고 환경이 불결해서 질병과 죽음을 수반했다). 다음은 경제적인 착취였다(무임 강제 노동을 시켰는데,
보통 중노동, 굶주림, 죽음을 수반했다). 그다음이 바로 학살이었다. 구트만은 이런 상황 해석에 동의한다. "최종 해결은 바닥에서부터 국지적으로 시작되어, 곳곳에서 일종의 상승이 일어나, 결국 하나의 포괄적인 사건으로 귀결된 것이었다. 그것을 계획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것이 청사진이었다고 말한다. 대학살은 유대인에 대한 일련의 단계와 공격을 거치면서 나온 결과였다." (1996) - P149

인종 분류가 문제가 되는 까닭에는 집단 속 변이성이 집단 사이 변이성보다 더 크다는 점도 있다. 카발리 스포르차와 동료는 이렇게논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군집 속 유전자 변이는 군집 사이 유전자변이보다 크다." 달리 말하면 집단 속 개체들이 집단들 사이 개체들보다 더 다양하다는 얘기이다. 왜 그럴까? 그 대답은 진화이다.
제아무리 규모가 작다고 해도 모든 개체군 속에는 큰 유전자 변이가 있 다. 이런 개체의 변이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되어 왔다. 왜나하면 사람에게서 관찰되는 대부분의 다형성은 각 대륙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전, 어쩌면 족히 50만 년 전 사람종이 기원하기 전에 이미 형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체군들에서 똑같은 다형성이 발견된다. 그러나 각 개체군마다 빈도는 다르다. 왜냐하면 인류가 지리적으로 분화한 것은 최근의 일이며, 분화에 걸린 시간은 아마 사람종이 존재해 온 시간의 3분의 1 이하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질적인 분기分岐가 축적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 P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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