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는 맥 모르고 그대로 잠잠합니다. 다른 이가 볼까봐 가랑이가 켕겨서 얼른 집어들고 얼른 나왔습니다. 바로 내년 봄에나하면 했지 이거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보니 왜 집에서 나왔는지저로도 영문을 모를 만지 떠름합니다.
집에 갈 때에는 큰길로 버젓이 내려갑니다. 찬바람을 안느라고얼어붙는 듯이 눈이 다 씹벅씸벅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염려는벗었으나 또 한 걱정이 생깁니다. 이걸 그대로 데리고 가면 필경 아내가 쨍쨍거리며 등쌀을 댈 겁니다. 그러지 않아도 요즘에 버쩍 지가 의사라지 왜? 또는 이까진 미화가 의사면 꽤게! 하고 건뜻하면 오금을 박는 이 판인데.
"에이, 이거 왜 나와 이 고생이야 !"
그는 털털거리며 이렇게 여러 번 입맛을 다십니다.
- 〈문장〉, 1939. 12.
- P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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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그래 인젠 안 그럴 테야."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내움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너 말 마라?"
"그래!"
조금 있더니 요 아래서
"점순아! 점순아! 이년이 바누질을 하다 말구 어딜 갔어?"
하고 어딜 갔다 온 듯싶은 그 어머니가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점순이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꽃 밑을 살금살금 기어서 산 아래로 내려간 다음 나는 바위를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산 위로 치빼지 않을 수 없었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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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봉날개마나킨의 데카당트한 날개뼈 진화는 조류의 기이한 생물학적 특징 때문에 촉진되어왔다. 모든 새의 날개뼈는 배아발생 초기에 발달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는 부화가 시작된 지 약 6일 후로, 성 분화 sexual differentiation 가 시작되기 전이다. 따라서 수컷의 날개뼈 형태와 크기에 대한 성선택은 암컷의 날개뼈에도 영향을 미칠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컷을 미적으로 변화시키는 암컷의 짝짓기선호는 종 전체를 데카당트하게 변화시킨다. 그러나 배아가 성적으로분화한 직후에는 발생학적 성차가 뚜렷해져, 배아발생 후기에 일어나는 사건들(예: 날개뼈의 완전한 골화)이 모습을 드러낸다. 암컷 곤봉날개마나킨이 수컷과 달리 완전히 골화되고 속이 꽉 찬 날개뼈를갖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 P208

공룡의 색깔을 발견한 것은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으로, ‘공룡의 생물학‘과 ‘새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해 많은 근본적 의문들을 제기한다. 안키오르니스의 과감하고 복잡한 깃털색소 패턴은 성적 또는 사회적 신호로 사용되었을 게 분명하다. 따라서 미적인 깃털장식의 기원은 새 자체가 아니라 수각류 공룡까지 한참 더 거슬러 올라간다. 공룡 중에서 하나의 예외적인 계열이 ‘비행하는 새‘로 진화하기 한참 전에, 공룡들은 이미 공진화를 통해 아름답게 변신한 것이다.
(착각하지 마라. 여기서 아름답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공룡이 볼 때 아름답다는 것이다). 새의 아름다움은 쥐라기의 수각류 공룡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풍부한 역사를 갖고 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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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은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참으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더구나. 내가 무심히 물었다.
"아, 그렇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시고……."
그러자 박 시장님이 정색을 하며 말을 정정하셨어.
"공지영 작가님, 잠깐만요. 저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했지 불행하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도 어린 시절의 집을 생각하면 가난한 중에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아끼며 서로 나누고 사랑받았던 기억이 제게는 충만합니다."
엄마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토록 부끄러웠던 적이 또 있었나 싶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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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 있잖아. 별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하는 날,
그 때문에 실은 하루 종일 우울한 날, 갑자기 모든 가능성의 문이 닫히고 영원히 세상의 불빛 밖으로 쫓겨난 것 같은 날, 열심히 노력하면 어찌어찌 손에 잡힐 것 같은 소망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누군가가 네 귀에 이런 말을 속삭이지……. "너무 애쓰지 마, 넌 안 돼.
그건 처음부터 너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거야,
넌 아니구." 뭐 그런 날. - P11

위녕,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지금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의미 있게, 그 순간을 가장 어여쁘고 가장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만들면 돼. 평생을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는 없어. 그러나 10분은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 있다. 그래, 그 10분들이 바로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첫 번째 걸음이고 그것이 수억 개 모인 게 인생이야. 그러니 그냥 그렇게 지금을 살면 되는 것.
- P27

명심해라, 이제 너도 어른이라는 것을, 어른이라는 것은 바로 어린 시절그토록 부모에게 받고자 했던 그것을 스스로에게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이 애정이든 배려든 혹은 음식이든.
너는 무엇을 엄마에게 받고자 했으나 받지 못했니? 네 마음은 뜻밖에도 너의 질문에 많이 울먹거리게 될 것이고, 너는 오늘 밤 오래도록 네 안에 사는 어린아이와 대화해도 좋겠구나. 오늘 밤은 충분히 기니까. 그리고 그 안의 아이가 훌쩍 아름답게 자라날 만큼 깊으니까.
- P30

만일 어떤 친구와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는데 네 뺨이 싱싱하게 보이고 눈이 반짝이면서 아름다워 보이고 ‘이 정도면 어디내놔도 괜찮지?‘ 하는 생각이 들고 왠지 책상에 앉아 차분히 일기라도 쓰거나 좋은 책을 읽고 싶어진다면, 그런 친구는 만나거라. 그런데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왠지 화가 나고 아이스크림, 짜장면, 라면,
불닭볶음, 이런 게 막 먹고 싶어지면서 오늘따라 내가 왜 이렇게 밉지, 하는 생각이 들거든 그 친구하고의 만남을 자제하거라. 이게 엄마가 네게 줄 수 있는 인생 선배로서의 가장 단순한 충고야.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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