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이 창귀들을 소집해서는, "날이 저물어 가는데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할꼬?" 하니, 굴각이 말하기를, "제가 예전에 점쳐 두었습니다. 뿔 달린 것도 아니고 날개 달린 것도아니요 대가리가 새까만 동물인데, 눈 속에 발자국이 나기를 가다 서다. 한듯 듬성듬성 났고, 꼬리를 살펴보았더니 머리에 있어서 꽁무니를 가리지도 못했더군요." 하였다. 이올이 말하기를, 동쪽 성문 부근에 먹을 것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의‘ 醫(의원)입니다. 입으로 온갖 약초를 맛보아 살갗이 몹시 향기롭지요. 서쪽 성문 부근에 먹을 것이 있는데, 그 이름은 ‘무‘ 巫(무당)입니다. 온갖 귀신들에게 아양을 부리느라 날마다 깨끗이 목욕재계하지요. 이 두 가지 중에서 고기를 선택하십시오." 하니, 범은 수염을 떨치며 화가 난 낯빛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의醫란 의疑(의심)다. 의심스러운 의술을 사람들에게 시험하여, 해마다 늘 수만 명을 죽게 만들지. 무巫란 誣(속임)다. 귀신을 속이고 백성을 홀려서, 해마다 늘 수만 명을 죽게 만들지.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그 놈들의 뱃속에 스며 금잠金蠶으로 변했으니, 독해서 먹지 못하느니라." - P89
범은 나무나 풀을 먹지 않고 벌레나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누룩으로 빚은 술과 같이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것을 즐기지 않으며, 새끼를 배거나 알을 품은 하찮은 생물들에게 잔인하게 굴지도 않는다. 산에 들어가면 노루나 사슴을 사냥하고 들판에서는 말이나 소를 사냥하되, 한번도먹고 사는 데 급급하거나 음식 때문에 남과 다툰 적이 없다. 그러니 범의 도의야말로 어찌 광명정대하지 아니한가! 범이 노루나 사슴을 잡아먹으면 너희들은 범을 미워하지 않지만, 범이 말이나 소를 잡아먹으면 사람들은 범을 ‘원수‘ 라고 부른다. 이 어찌 노루나 사슴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은혜가 없으나 말이나 소는 너희들에게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만약 말이나 소에게 수레를 끄는 노고와 주인을 사모하며 충성을 다하는 정성이 없으면, 날마다 도살하여 부엌을 가득 채우면서 쇠뿔이나 말의 갈기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침내 또 나의 노루나 사슴까지 침탈하여, 내가 산에서도 먹을 것이 모자라고 들에서도 먹을것이 없도록 만드니, 만약 하늘이 세상을 공평하게 다스리기로 한다면, 너를 잡아먹어야 되겠느냐, 아니면 놓아주어야 되겠느냐? 무릇 제 것이 아닌데도 가지는 것을 ‘도‘盜라 부르고, 생물을 잔인하게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부른다. 너희들이 하는 짓이란 밤낮으로 허겁지겁하면서 팔을 휘두르고 눈을 부릅뜬 채 남의 것을 낚아채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 P96
범은 천명을 알고 그에 순응하므로 간사한 무당이나 의원에게 홀리지않으며, 몸을 바르게 지켜 나가고 제 본성을 다 발현하므로 세속의 이익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범이 지극히 현명한 까닭이다. 가죽 무늬의 반점斑點 하나만 슬쩍 보여주어도 천하에 문을 과시하기에 충분하며, 아무리 작은 무기라도 빌리지 않고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과이빨에만 의지하여 무武를 천하에 과시한다. - P98
"이는 너희가 알 바 아니다. 무릇 남에게 구할 게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포부를 부풀리고 제 신의를 먼저 자랑하는 법이지. 하지만 부끄러워하며 굴복하는 낯빛을 하고, 말을 자꾸 중언부언하지. 그런데 저 손님은 옷과 신은 비록 다 떨어졌지만 말이 간략하고 눈매가 오만하며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으니, 제 몸 이외의 것에는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제 스스로 만족해 하는 사람이야. 저 사람이 시험해 보려는 일이작지 아니 하고, 나도 역시 저 손님에 대해 시험해 볼 게 있네, 주지 않으면 그만이지, 기왕 만 냥을 준 바에야 성명은 물어 뭐하겠나?" - P104
"이제 내가 조금 시험해 보았구나!" 하였다. 그리하여 허생은 섬에 사는 남녀 이천 명을 모두 소집하고 그들에게 명령하기를, "나는 처음에 너희들과 함께 이 섬에 들어왔을 때, 먼저 부유하게 만들고, 그런 다음에 문자를 따로 만들고 의관衣冠 제도를 새로 만들려고했다. 하지만 땅이 좁고 나의 덕이 부족하니, 나는 이제 떠나노라. 아이가 생장하여 숟가락을 쥐게 되면 오른손을 쓰도록 가르치고, 단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에게 먼저 식사하도록 양보하여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배들을 모조리 불태우면서, "나가는 자가 없으면 들어오는 자도 없으리라." 하였다. 또한 은 오십만 냥을 바닷속에 던지면서, "바닷물이 마르면 얻을 자 있으리라. 백만 냥은 국내에서도 용납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 작은 섬에서리오!" 하였다. 그리고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자들을 배에 태워 함께 섬에서 나오면서, "이 섬에 화근을 끊기 위해서다." 라고 하였다. - P108
"가물거리는 등잔불에 제 그림자 위로하며 홀로 지내는 밤은 지새기도 어렵더라. 또 처마 끝에서 빗물이 똑똑 떨어지거나 창에 비친 달빛이하얗게 흘러들며, 잎새 하나가 똑 떨어져 뜰에 날리거나 외기러기 하늘에서 울며 날아가고, 멀리서 닭 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린 종년은 세상 모르고 코를 골면, 이런저런 근심으로 잠 못 이루니 이 고충을 누구에게 호소하랴. 그럴 때면 나는 이 엽전을 꺼내 굴려서 온 방을 더듬고 다니는데, 둥근것이라 잘 달아나다가도 턱진 데를 만나면 주저앉는다. 그러면 내가 찾아서 또 굴리곤 한다. 밤마다 늘상 대여섯 번을 굴리면 먼동이 트더구나. 십 년 사이에 해마다 그 횟수가 점차 줄어서, 십 년이 지난 이후에는 때로는 닷새 밤에 한 번 굴리고, 때로는 열흘 밤에 한 번 굴렸는데, 혈기가 쇠해진 뒤로는 더 이상 이 엽전을 굴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것을 열 겹이나 싸서 이십 년 넘게 간직해 온 것은, 엽전의 공로를 잊지않으며 이따금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서란다." 말을 마치자 모자는 서로 붙들고 울었다.
그러므로 세월이 도도히 흘러감에 따라 민요도 누차 변하는 법이다. 아침에 술을 마시던 사람들도 저녁이면 그 자리를 떠나고 없으니, 그때부터는 그 순간이 천년 만년토록 옛날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라는 것은 ‘옛날‘과 대비하여 일컫는 이름이요, ‘비슷하다‘는 것은 그 상대인 ‘저것과 비교할 때 쓰는 말이다. 무릇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비슷하기만 한 것이니, 저것은 저것일뿐이요, 서로 비교하는 이상 이것은 저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바로 저것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종이가 희다고 해서 먹도 따라서 희게될 수는 없으며, 초상화가 아무리 실물과 닮았다 해도 그림이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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